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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그리드 칠 편: 평생 DMZ 같은 글쓰기

by 마음대로다 2022. 4. 1.

 

 

 

 

 

 

 

 

그리드 칠 편: 평생 DMZ 같은 글쓰기

 

 

 

 

 

 

 

 

 

우리는 공부의 그리드가 처음 분열할 때의, 우리들 정신 세포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마친 것 같은 서구와 미국, 그런 것들의 공부와 정신을 선망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불만은, 우리가 동양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동양인을 사랑한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주자학의 관점에서는, 다만 서양 것으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비상한 천재의 발로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죽어갔다. 우리는 다만 공부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유무로 삶과 헤어지기 때문에, 기독교인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도인 어머니가 무슨 마음의 은혜와 공덕을 갖고 살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동쪽 해안에서부터, 혹은 설악산에서부터 시작한, 거대한 구름이, 지면을 타고, 디엠제트의 골짜기를 지날 때, 서쪽으로 향할 때, 나는 그것이 나의 유비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 사는 나라를 지날 때, 지방이나, 지구, 지방자치제, 혹은 광역시, 그런 것을 지날 때, 양 옆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쳐있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모습이 구름과 같아서,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숱한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과 비교해서, 그런 것을 의식할 수 없었다. 조금은 의식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하면, 전 세계적으로, 지구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뭘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나는 구름을 몰아, 철조망을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래 볼까도 싶었지만, 우리 가난한 동지들은 모두가, 가난한 채로, 그렇게 평범하게 죽을 수도 있었지만, 사탄이 도리어 우리 편을, 그리고 나의 편을 들 때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북한이 먹고만 지내면, 통일에 대한 관심이 없지 않겠는가? 먹고만 지내면, 적당히 남한 드라마나 노래를 보고 들으면서, 지낼 수 있지 않겠는가? 도리어 통일 편을 들고, 도리어 내 편을 드는 것이, 어느 때는 대단히 우습고, 그런 일들을 내가 추진하는 것인 줄 착각하는 시간도 그래서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처음 정리로부터, 그리드 칠 편, 우리는 많이도 지나오게 되었고, 드디어 고통스러운, 차마 말하기도 어려운, 도식적 사건사고의 원형(The origins of terrible accidents as a whole schematic)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일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고통’인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열광하는 것은, 그것의 배경음악적 진행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는, 그것의 내부적 분자와 세포가, 팽창하여서, 회전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것이 꼭 음악이 흐르는 것처럼 비유되고, 착상되고, 느껴지기 쉽다. 우리가 사랑이 없어도, 그와 같은 영화를 볼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십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의 시간과 같다. 우리는 거기서 죽고, 거기서 죽는다. 우리가 미국을 좋아하고, 유럽을 좋아했던 것은, 사랑과는 별개로, 민주주의가 먼저 확립되었고, 그것들이 우리가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것의 착상, 혹은 행정소송이 되었었다. 여자가 결혼도 안 한 채로, 착상이 되면, 눈물이 나오고, 그때도 우리가 미국을 좋아하고, 유럽을 사랑했던 것은, 다만 억울한 인생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포괄적 지위 협정 같은 것, 민주주의의 앞선 노력과 그것의 합당한 결과 때문이었다. 우리가 시간을 겪고, 시련을 겪고, 우리들의 생각도 동시에 놓치지 않으면서 맞이하게 된 것은, 다만 결혼이라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일 것이다. 아이들은 자랄 수 있다. 아이들은 우리가 기독교를 갖는 이유이다. 결혼한 남자라면, 여자가 자기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보다, 착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미래가 천년 같은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무슨무슨 말로써 자기에게 충격을 준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헤어지지 못하는 것이고, 부부는 서로 낯설게 하기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모더니즘이 거기에 있고, 우리들의 포스트모더니즘이 거기에 있다. 우리들이 가족 드라마를 많이 보는 것은, 서울에서, 차가운 얼굴로 지하철에서 그 소리를 간혹 듣는 것은, 내가 슬픈 양자물리학처럼, 내가 슬픈 화전민처럼, 전진하는 기호에서, 스스로의 의식을 잃는 이가 되던지, 그것은 아니던지 하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생사의 갈림길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못했다고 해서, 경제와 결혼하고, 이문열과 결혼하고, 이정재와 결혼하고, 김경재와 결혼하는 것은, 전철에서, 그러는 것은, 이성의 간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코 죽음에 이르지 못하며, 모든 작품들이 죽어갈 무렵에는, 뿌띠 부르조아 가족의 마지막 정다운 대화처럼, 짧고, 작고, 오현란한 문예 비평을 마지막으로, 하나님께도, 갈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 전신은, 전조는 꾸준히 있어왔다. 우리가 칼럼을 재밌게 읽은 적이 없어도, 어딘가에는 무사가 있을 것 같고, 씨네 21 마지막 칼럼을 잊지 못하고, 대놓고 사랑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랑하고, 항상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착시, 로봇, 우리들의 익숙한 건물들, 새로 생기는 건물들인 것 같은 느낌이 반복되었지만,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그 마지막 시간에까지 진입하여서, 마지막으로 사랑하여서, 우리들의 멈춰있는 세포가 회전하기를 바라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서울이 춥고, 겨울이 되고, 겨울에서 조금 이제 겨우 벗어나고, 여름에 춥고, 나무들과 경쟁하고, 초록들과 경쟁하고, 한국말도 점점 잊어갈 무렵에, 이중국적, 이중 언어, 삼중 언어, 그런 사람들의 장관을 티비에서, 낯설기 하기 안에서, 바라볼 무렵에는, 더더욱 그와 같은 바람은 간절해지는 것이다. 드디어 교회는, 우리들의 도시 풍경 안에서, 아직 대단한 입체가 없는데도, 모래시계가 끝이 난 것이다. 그런 뜻이 있었어? 하지만 말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반드시, 뒤늦게 발견한 상처를, 서로가 달래고, 맥주로 적셔주고, 소주로 소독하고, 안주 같은 것으로, 마음에 어떤 안주를 차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점을 차리고, 가게를 열고, 성공하는 확률이 칠십, 실패하는 확률이 삼십이라고 해도, 실패하는 확률이 엄연한데도, 가게를 열고, 뭔가를 차리는 것은, 어쩌면 영원한 상처와, 그것의 마지막 형태 때문일 것이다. 육이오 때처럼, 우리는 삼팔선에서 바로 죽지 않고, 부산에서 가게를 열고는, 결사항전을 하는 것이다. 비도 오고, 해무도 끼고, 우리들의 삶이 열세에 있어도, 경제만큼은, 김경재와 결혼하지는 않았어도, 전철을 부지런히 오간다 해서, 전철과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경제가 다만 경제로 그치지 않고, 내가 평생 문예 비평을 쓰지 않았어도, 그와 같은 디엠제트의 진행만 하였어도, 신현균이 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오목이 실은 볼록이 되어서, 도시를 만들고, 볼록이 이동하고, 생각은 오목하지만, 시험에는 공부한 것 이상으로 볼록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면, 우리는 반드시 어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의식을 깨고, 단순한, 그리고 문학을 공부하고, 부처를 부수고, 억불정책 같은 것, 철학을 공부하고, 항상 문학을 의식하고,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결계를 쳐놓았어도, 도리어 피를 마시고 공부를 한 것처럼, 힘을 내어 철학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진정 우리나라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문장을, 다만 표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나의 일처럼 여기고, 받아들이고, 뜻을 깊이 통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차가운 도시를, 지방 도시를, 소도시를, 말도시를, 말표 맥주를, 할인행사를, 이제는 하지 않는 것을, 그런 것의 오목을 지날 때마다, 다만 생각 없이 지난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고, 어떤 영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지런히 영화평을, 문예 비평을 해와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철학을 공부하면, 문학을 공부하고 싶고, 음악을 전공하다 보면, 문학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예쁜 여성인 경우에는, 영화에도 출연하고 싶고, 문예 비평만 많이 읽다 보면, 나의 수준을 깎아내리기 위해서는, 서양에는 지금 없는 철학자들의 귀신을 불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흡사, 바알의 철학자들을 불러내는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철학은 전쟁에서 기호적으로 인지되는 경향이 있어서, 지금 우리들이 맞이하는 어려움이 바로 거기에서 기인하였을 확률이 있다.

 

그렇다고 나의 글이, 반듯하고, 건물 같고, 반듯한 건물 같고, 직장 같고, 그런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드라마가, 나를 조롱하는 것 같고, 거리두기 하는 것 같고, 십인 이상 허용하는 것 같고, 경유값만 인상하는 것 같고, 그렇지 않은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모조리 그랬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여기에 있고, 방송국과 화려함과, 경제와 여자들은 저기에 있다 하였었다.

 

그런데 그리드 칠 편에서는, 우리는 뜻하지 않게 행복하였다. 내가 비평을 아름답게 해주니, 방향을 교정하고, 원형으로서의 도식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마련해주니, 그것이 그만 반영된 것 같은 것이다. 먼저 드라마를 만든 것 같으나, 나의 이런 해석도 일면, 힘이 있는 주장처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집 나간 드라마를, 집으로 인도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비평가도, 세상에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말로 장난치고, 그런 저급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시험으로 늘 우리가 언어에게 상처를 입고, 화상을 입기 때문에, 화상을 입히기도 하고, 동시에 연고전도 제공하는, 그런 수준으로 월북했다가, 탈북했다가, 그것을 십 년 안에 반복하는 것 같은 평론가만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평론가가 성경을, 문지방 없이 언급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영원히 우리 한글 문학 사회 안에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상하게 행복했고, 내가 아버지가 되면, 겨울 옷을 입지 않은 신하리 양을 소개해주고 싶고, 내게 그런 아버지가 있다면, 다른 더 예쁜 사람을 소개받을 것만 같은 것이다. 그것은 문예비평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랑으로 살아서, 늘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한국어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피리를 백번 불고, 좋은 현을 비싸게 팔고, 사고, 백번을 연습해야만, 겨우 달성할 수 있는 문장이, 진행이, 우리들에게는 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서양의 예술은 발전하고, 우리는 늘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런 아들과 딸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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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지나다 보면, 클래식이 진행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오목하게, 갯벌의 게들처럼, 작고 오목하게, 바닷물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게 클래식 음악과 소설, 문장들을, 넘겨주고, 전해주고, 실어주고, 날라주고 해서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콩을 먹지 않는다 하고, 누군가는 소를, 누군가는 개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다 사연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모든 것에 노사연이었던 우리가, 도리어 크던 작던 간에 게를 먹을 수 없는 것은, 서울 사람들이 좋은 비평을 읽고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게 게 눈처럼 올라와서, 그 예쁘고 귀여운 모습을 본 다음에는, 거기에는 그만 사연이 생길 것 같아서인 것이다. 다만 흘려 지내기만 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처럼, 사람처럼, 피부가 단단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의 생각을 읽고, 생각하고, 거기에 디즈니 드라마처럼, 자기 생각을 덧붙이니, 거기에 맞게, 우리들의 사랑이 그처럼 단단해지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