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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드라마 <그리드>가 갖는 인간통합적인 성격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22. 3. 24.

드라마 <그리드>가 갖는 인간통합적인 성격에 관하여

 

 

 

 

 

 

 

 

우리는 그리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롭다기보다는, 새롭지 않고, 오늘은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메디칼 드라마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경찰들도 모두,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드디어, 뭔가가, 갈피가 잡힐 찰나인데, 정신이 흩어져서, 위안부 되어서, 자유의 정신이 자리잡지 못하고, 진주 목걸이가 실을 잃은 것처럼, 사람들의 마지막 콴툼으로나 진행할 것 같아서이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나를 의존하고 있고, 콴툼을 의식하고 있으며, 독립적인 매력을 확충하고 있고, 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하지만 이런 소소한 관계들 때문에, 드라마는 아카데미를 관철하고, 도리어 능가하고 있다. 우리는 주파수에 예민해야 하며, 보이는 모든 것을 검색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통과시키면, 우리는 낮게 된다. 우리는 낮은 자 사상이 된다. 우리는 라자냐가 된다. 우리는 거기서 죽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콴툼이고, 연기인데, 어디에서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하는가 물을 것이다. 감동은 그것의 회전의 수레바퀴와 같다. 감동으로, 우리는 그날 저녁, 살아나는 것이다. 음악도 없고, 기초적인 선전선동적인 노래조차 없다면, 우리는 정말 희한하게 된다. 그것의 끝을 가본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대서양 방방곡곡, 동서양을 통틀어서, 전국 방방곡곡, 라디오도 없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정말 라디오도 없이, 밥 주면 밥 먹고, 대충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마음은 어떤 것일까? 콴툼은 바로 그런 것에 있다. 

 

사람들은 콴툼을 싫어한다. 어감에서부터, 왠지 모르게, 콴, 툼,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비진리, 그러니까 일본어로, 미인리,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비진리라고 해서, 무리라거나, 악행이라거나, 몹쓸이라거나, 아니스티, 그러니까 아닌 것이라거나, 아너스, 아닌 것들의 명예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비진리는 재밌고, 있다가 없거나, 없다가 있으면 재밌지 아니한가? 만화책이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으면, 얼마나 마음속에서부터, 탄성이 터져 나오는가? 우리는 만화로밖에, 콴툼띠오리, 전진할 수밖에 없고, 오직 만화로만 우리는 생각을 저장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찢남이나, 만찢녀를 좋아하는 것은, 만지고, 옷을 찢고,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콴툼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열흘이나 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는 영웅이 될 것이다. 현진건이나, 이연걸이 될 것이다. 박혁거세가 될 것이다. 북한 사람들은 콴툼을 도리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괌 사람들이라면, 고향이랍시고, 백 퍼센트 좋아할 것이다. 아름다운 태평양의 풍경은, 만화 중에 만화이고, 아닌 것 중에 최고의 아니스티이기 때문이다. 불교에 아난자라고 있다. 우리가 처음에는 정자였다가, 갈수록 난자가 되는 것은, 필연적인 불교이고, 아라한이거나 아난자일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버저비터, 콴툼은 우리에게 고통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이제는 콴툼이 싫다 하게 되는 것인가? 처음에는 그렇게, 공각기동대나, 프랑스 제오원소를 좋아하다가, 디즈니 플러스 그리드, 그리드를 좋아하고, 내가 글을 쓰고, 비평하면, 마음의 안정을 얻고, 사람들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하티크바, 소망하게 되었는가? 그러니 그와 같은 콴툼에 관한 콴툼도, 실은 비정기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정기적인 것이 우리에게 안정을 주고, 안심을 주며, 마음에 깊은 정감을 준다. 그러니 진리라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도, 오래 먹고, 또 먹으면, 질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드라마를 싫어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지금도, 드라마들을, 콴툼으로 여기지 않고, 진리로 여겨서, 하루하루 자라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하티크바, 코레아, 하나님이 부르신다, 그것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명은 진행과 같고, 어떻게든 진행만 된다면, 그 사람이 사탄인지 아닌지, 훌륭한 사람인지 아니면 평범한 사람인지, 기아 타이거즈 팬인지, 아니면 골수 롯데 자이언츠 팬인지, 차후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적 진행이라는 것은, 선악의 판단에 반드시 우선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진리도 콴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새로운 콴툼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은 이제 진리가 아니다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와 같은 계통적 연구 때문에, 도리어 진리로 여기는 잘못을 범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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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족속과, 사람은 죽는다는 족속이 나뉘어 대결하는 것을 우리가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입장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것의 궁극성이 무엇을 향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며, 그것을 제외한 상태에서,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또한 뻔한 실험실적 메디칼 미제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이고, 우리는 그와 같은 아무리 족속, 모압 족속이 되는 것이다. 항상, 그런 고급하고, 급진적인 상태에서, 우리의 생각과 갈등을 고양시키고, 아픔을 혁파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다. 콴툼은 항상, 언저리를 돌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이호선 같다. 그것은 서울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주고, 연세대학교로 만들어주며, 홍대 앞이라든지, 당산, 삼성역, 잠실경기장 입구로 만들어준다. 건대입구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하며, 다만 반포나, 센트랄시티 입구, 대방역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우리가 소설을 좋아하고, 읽고 하는, 키가 콴툼만한 사람들일 때는, 지하철 역의 이름은 다만 지하철 역과 같았으나, 음악이 최소한 우리들의 콴툼을 높여주면, 그렇게, 소설보다 키가 높은, 큰, 서울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그와 수다를 떠는 이호선 진행이 하늘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네이버 콴툼을 던져주면, 콴툼 키가 작기 때문에, 쏟아져 들어가며, 드라마가 그중에 하나를 채택하는 것도 오래된 우리들의 커스텀, 그런 컨벤션이 되었다. 그리드는 미국 공포 영화와도 연결이 되는 것 같고, 큐브라고 하는 같은 미국 공포 영화와도 연결이 되는 것 같다. 그것의 차이는, 식민지 통치 국가와, 피지배 국가의 그것과 굉장히 일치한다. 그것이 아닐 때는, 내가 일본 디즈니 채널을 좋아하고, 그와 같은 아름다운 내면적인 콴툼을 갖고, 글을 쓰고, 때로는 소설을 쓰고 하는 사실이 현상될 때일 것이다. 그 외의 시간은, 단순하게 디즈니, 일제에 저항하면서, 미국에 투항하는, 북한에 종속되면서, 미국에 종속되는, 그와 같은 한 길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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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초에 한자는 한자로 쓰고, 중국 사람이 쓰지 않고, 구어체 한국어는 한국어로 쓰는, 그러니까 그 시원을 알 수 없는 시간을 살았을 수 있다. 사탄은 생명들이 많기 때문에, 늘 언제나 배움의 어려운 길을 자기의 쎄임니스, 그러니까 동일률로 삼는다. 그중에 살아남는 사람들이 모든 세상에 빛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초에는, 서양까지도, 한자를 쓰고, 쐐기 문자나,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알파벳을 낮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콴툼, 억지는 틈을 갖고 있고, 그것이 점점 더 벌어진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시영이 그렇게, 한자문화권의 종주국인 것처럼, 일종의 증거적 피사체처럼 갇혀 있었으나, 틈이 활짝, 그러니까 창세기마냥 벌어진 것처럼, 사람들은 생활 세계의 말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없었고, 한국 사람들이 한자를 당연히 더 잘하는 대중들의 침입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원래, 이스라엘, 하크티바, 그 사람들보다 아이큐가 높아서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를 한글로 읽는 것을 어느 때는 갈 之처럼, 그것에 관해서는 어려운 진리는커녕, 재밌는 콴툼조차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자 교육을 개창하고, 그것의 시험을 치르는 것은, 우리가 한국사 시험을 따로 보는 것처럼, 그 둘은 같은 것일 수 없는 것이다. 한국사 시험은 위안부에 오염이 되어 있고, 일본이 미국의 정신적 끄나풀인 것은 가르치지 않으나, 한자 시험은, 자기들의 고대어를, 사하라 사막의 에덴 상태를, 일종의 진리의 사라진 상태 같은 것들, 사막화 이전의 상태 같은 것들, 그것을 한국 사람들이 기억을 잊었다가, 가져갔다가, 잊었다가, 가져갔다가, 그러는 것 같은 매우 짜증이 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자가 일종의 아이디어 뱅크이면, 조금만 하늘천 따지, 배워도, 일반 민중들이나 까막눈인. 아무런 장애가 없는. 만일 우리가 그와 같은 이차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사하라 사막은 사막이 아니라,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 원래는 에덴동산처럼, 일본의 북해도처럼, 푸르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공연히, 우리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그런 이유로, 우리는 한자를 쓰고, 이두를 달면서, 그것을 익히고, 사람들을 만나서는, 조선시대 때의 인민들처럼, 한글이 재빨리 퍼지지 못했던 것도, 그와 같은 과거의 시대를 오래도록 관찰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는데, 말로는 우리들끼리, 충분히, 철학적 높이까지도 달성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의 젊어서의 지식은, 서예 같고, 한자 같고, 푸르른 나무 같고, 형상이 아름답고, 아름답다. 너무 지나치게 이집트 상형문자스럽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아야 한다. 왕의 이름을 알아서, 어떻게 고대 문자를 유럽 사람들이 해석하기 시작했다는데, 신현균의 서양사와 서양철학이 아니고서는, 모두 범죄와 거짓의 콴툼 속에 있는 지금의 처지와 같이, 그런 것들의 사연에도 하나 들을 만한 말들이 없는 것이다. 

 

콴툼으로도 오래가고, 살고, 살고 사랑하고 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콴툼이 아닌 것도 인정하고, 콴툼인 것도 좋아한다면 모를 일이지만, 콴툼을 지키고, 보장하고, 자기들끼리 진지한 콴툼들을 만들고, 그것으로써 계속되는 콴툼들을, 쫓기면서, 영원히 보장하면서 사는 것이, 무슨 사탄들이나 좋은 짓인지,

 

 

우리로서는 그들의 입장이나 주장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