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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사람들은

by 마음대로다 2022. 2. 25.

사람들은

 

 

 

 

 

 

 

 

 

 

 

포토샵이 없는 나의 글도 좋아하는 편이다. 포토샵은 도리어 성가실 수도 있다. 물론 나의 포토샵은 반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어떤 연결 같은 것들. 나만의 영토가 아닌 것 같은 것들. 민들레 영토가 아닌 것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포토샵을 하면 좋아할 것이다. 사람들은 기호가 기호주의처럼, 그렇게 뭐 어떻게 강력하고, 사람들을 구속할 정도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읽는다는 것은 남의 집 살이와 같아서, 적어도 피해는 주지 않고, 우리끼리는 충분히 왁자지껄하면서 지내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읽는다는 것은, 마냥 나의 집에서, 나만 왁자지껄하고, 나와 비슷하거나, 거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드라마를 찍는 것 같으면, 우리의 양심이 싫어하게 되어 있다. 얼마나 사회적 양심 선언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기호의 양심 선언이 지속이 되어야, 우리는 정말 양심적인 사람들이 될 것인가? 유에프오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피만 사라진 소들의, 심장이 사라진 소들의 이야기는, 미국 이야기는, 한국어 양심을 지칭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명목상 대국이지만, 소심하기 때문에, 결국 양심도 없는 이들 같다는, 알 수 없는 언어의 띠를 향한 통신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옛날에, 프랑스 작가의 만화 그림이 그려진 성경을 읽고, 얼마나 또 읽고 했었는지 모른다. 그것을 어떻게 구입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의 집에 있어서, 친구의 집에 갈 일이 있으면, 늘 읽었는지,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화로 그려진 것을, 천천히 읽다가, 헤어지는 길이 있으면 헤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영어로 헤어와 같다. 헤이즐넛과 같다. 우리는 그처럼, 완전히 낯선 것을 읽을 수 없다. 사람들이 철학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철학이 완전히 낯설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이 철학을 읽을 수 없는 것은, 대충 드라마에서 시늉을 내는 것은, 마음은 원이지만, 그것의 경험이 이해의 가능 바깥에 있어서 그런 것이다. 어느 프랑스 인의 만화 성경을 읽고, 나는 얼마나 마음이 울적해졌는지 모른다. 세상은 성경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것은, 시대극을 보고, 뱀 사자 사극을 보는 것은, 그들이 아직 그 어떤 것의 가늠도 되지 않는 능력의 바깥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중세의 기사들이 전부 철갑옷을 입고 있는 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일 것이다.

 

나에게서는 익숙한 것 천지이다. 거의 천장지구이다. 나이가 든 오천련이, 젊어서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고 풍성한 긴 파마머리로 우리에게 다시 등장할 것만 같다.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서양의 코카콜라 문화가, 그처럼, 비처럼 음악처럼, 옆문처럼, 지금은 익숙한 것들 천지가 되었다. 그러나 인격과 정신의 도야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투표를 하고 싶어도, 우리가 여름철의 시원한, 유니버셜한 코카콜라처럼 투표를 하고 싶어도, 일부러 개표장의 불을 끄고, 불을 켜고, 그렇게 투표를 하고 싶어도, 때로는 프랑스 대혁명처럼 투표를 하고 싶고, 무혈혁명, 그리고 명예혁명처럼 투표를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그처럼, 절차탁마 대기만성, 그것의 방식과, 과정, 어떤 출산의 과정 같은 것은 알게 되었다. 우리가 흰 와이셔츠 같은 것을 입고, 국민 총투표를 하고 싶어도, 그러나 우리들의 모든 옛날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필름은 그 와이셔츠와 같다. 버려진 옛날 배와 같다. 그것을 옛날 영화, 서양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해서, 그것이 지금 운명이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독일 관념론이라고 해서, 그것이 프로이센 옛날의 것이 아니고, 영국 경험론이라고 해서, 경험이 드디어 발견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은 익숙해서인 것이고, 우리가 무엇을 하지 못하는 것도, 익숙한 것의 재산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연속과 구속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무산자 계급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세계의 숙종이 되어서, 백신을 맞고, 콘디션을 조절하는 깊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손가락을 방법 삼아, 궁궐을 걷는 것이다. 숙종은 무엇이고, 안숙종은 무엇인가? 익숙하여서, 사람들과 함께 목적을 잠깐 향유하는 것이 있고, 그렇게 왕정을 계속하는 것이 있고, 익숙하여서, 구속되고, 익숙한 스케일과, 영화와, 씨엔엔과, 전쟁만 계속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숙종이 되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은지 모른다. 그리드라는 것도 그렇다. 드라마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다른 숙종들이 많았는지 모른다. 숙종은 피라미드의 그 크고 무거운 정방형의 돌들 같다. 그리고 나는 낮과 밤의, 이청아를 예쁘게 보았기 때문에, 잠깐 이력서에서만 예쁘게 나온 김아중을, 이와 같은 천문학적인 소숫점 숫자를, 효과면에서 감당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루카에서의 이다희도 매우 영웅적이었고, 북한으로 보면 그 해의 인민배우상 수준으로 멋이 있었다. 그렇게 여배우를 놓고 볼 때에, 갑자기 많은 것들이 치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모든 드라마는 숙종과 같다. 현대의 우리는 그와 같은 모나드가 되어서, 아니면 그와 같은 모나드에 관심의 사슬이 묶여서, 저녁에 침전하는 영혼들 같다. 그러나 나의 관심을 따라오면서, 킹 숙종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킹 세종은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숙종은 글과 같다. 국문학도가, 늘 만화책만 읽다가, 당근과 채찍과 같은 문제집만 보다가, 처음으로 그림이 없는 시와 시집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고, 시간을 보내고, 상상하고, 연애하고, 아무개가 잘생겼네, 아무개가 모델감이네 하는 말을 주고 받을 때, 얼마나 서울이 순간 이동하고, 낯설게 하기 되며, 마음이 울적해지면서도, 그만큼 성숙해지는지 모른다. 노출에도 관대해지고.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가 시간이기 때문이다. 가장 예쁜 대학의 숙종이고, 처음 숙종이며, 홍대 앞이고, 서울극장에서 처음 데이트하는, 노인들 사이에서, 젊은 남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대학생들이, 저마다의 콴툼띠오리 속으로, 숙종해 들어간다. 그나마 과학적 자부심이나, 현실이나, 원인의 원인에 관한 탐구가 이뤄지는, 그런 맹목적인 역사소급적인 학문들은 모르겠지만, 경제적 환원주의와 그것들의 정당성 같은 것들, 국민회의 같은 것들, 그것이 아닌 표면적인 이스라엘이 되는 사람들은, 굉장히 빨리, 콴툼띠오리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어쩌면 내 서울 변호사 친구가, 그렇게 연예인들을 만날 확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시영도 어떻게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 그런데도 한번 중간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미팅을 주선하지 않은 것은, 자기 일의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나의 필사적인 생기에 비추어, 그들의 삶이 너무 콴툼띠오리 같아서였을 수도 있다. 그것은 실제이며, 그들은 인구이고, 그들은 돈이 많고, 그들은 바쁘고, 그들은 양천구 같고, 그들은 모여 살고, 그들은 숨겨진 녹지가 있으며, 그들은 최신식의 아파트가 있고, 저녁에 성적으로 공허하며,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기도 하고, 질서정연하고, 오정연 목사 같은, 그리고 불쌍하기도 한 것이다.

 

왜 하필 런던은 노동이고, 뉴욕은 시바여신이며, 서울이 쏘울일까? 내가 서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처럼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디즈니 드라마 그리드는, 그와 같은 그리드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것은 숫자가, 다만 소숫점으로만 천문학적이지 않고, 우리가 가진 경제와 예산, 그것의 실재 숫자와, 미래적 가능 숫자를 모두 합쳐도, 그것이 가늠이 될까 말까 하는 것이다. 드디어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의 불가항력적 조건을 상대하면서, 서울역에서 러시아 사람, 그러니까 노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가정이고, 다만 가정이맹어호일 뿐인 것이다.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누구도 그런 아이엠에프, 자기가 대학에서 전과목 에프를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한계가 있고, 군복 호주머니에 담배가 한 가치 있을 줄 알았더니, 동료의 물음에 한번 확인하니까, 두 가치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반드시 한계가 있고, 우리는 헐리웃 영화를 무시할 수도 없고, 항상 부서지고, 터지고, 그런 것들의 마지막 같은 게임이나 그것의 영화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차라리 그것들을 변호하고, 옹호하는, 그것의 꼬리를 물어주는 것들이 없다면, 영화 그 자체 같은 표현법의, 매우 얇은, 얄팍한, 존나 픽한, 책임져 알피, 그런 생계형 독일철학으로 미국의 현재가 구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들의 관심과 어려움에 항상 성실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들의 숙종에, 어려움에, 사랑으로 항상 숙종하는 것처럼, 마치 숙종만이 있어서, 숙종하는 것처럼, 늘 그들은, 그들도 타자 관계와 자기 관계에 숙종하고, 숙명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들에게 백인만 준 것이 아니라, 흑인도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흑인도 매우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우리들의 숙종이고, 영역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다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인 것도 같다. 자끄 데리다. 위르겐. 뽕딸리스. 포스트모더니즘이 숙종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고, 괴물이나, 좀비, 마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가리킨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임금이 수 많은 궁녀들과 노는 것의 천문학적인 필연성을, 다만 새해의 보신각 타종놀이로써, 허락하고, 허락하는 것이지만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승인을 한다 하지만, 뇌가 없는, 스토리와, 계략, 함정과 공포, 수많은 맹목적인 알레테이아만 있는 곳에서는, 설령 뇌가 있고, 도서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감각의 설치미술이 늘 언제나, 몸과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걸리는 것은 시간 뿐인데, 그것이 너무 넓어서, 사탄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으로서의 시간인지,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사랑과 진리, 따뜻한 마음이 승리하는 과정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화성이 화성행궁의 정조, 그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보관 중인 걸작, 제목을 모르는 어떤 에스에프 영화 화성을 말하는 것인지, 감자 키우는 것 말고, 그것도 우리는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나를 돕지 않는 사람들이, 그러나, 저마다의 콴툼에서 깨어나, 괌으로도 여행을 가고, 유진, 가로수 길에서 나를 만나면 얼마나 좋겠는가?

 

서울을 볼 때 항상 드는 생각이, 겉으로 아름답지 않으면, 그것이 내면적인 우선권이 있다는 증거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치졸한 생각은 뜨겁고,

그렇게 남녀가 섹스를 하다가 자칫하면 불에 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