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어를 못할 권리가 있는가?
우리는 한국어를 못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집에서, 그냥, 집에 돈이 있고,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며, 자녀가 하는 일을 부모가 서포트해주지 못하고, 포트 미스, 그러면 어떠한가? 자녀는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 자기만의 방은, 스승이고, 체력이며, 혼자이고, 우주이며, 학교이고, 비대면이고, 옛날보다 넓어진 것이고, 이제는 침대도 있지 않은가? 침대는 늘 누워있는 내 친구 같은 이이다.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좋은 친구라는 뜻이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중국을 여행할 수 있다. 동남아도, 버스를 타고, 그렇게 여행을 할 수 있다. 우리도 억지로, 그런 것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어떤 권력의 부모가, 자식이 집에서, 방에서 누워있는 것이 못마땅했는데, 그대로 명을 달리 한 것을 경험한 다음에, 그 아이를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미안한 마음에 그리했다는 소리가 있다. 왜냐하면, 중국에 갔더니, 어떤 청년이 그렇게 누워서, 아침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더란 것이었다. 우리에게 아버지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자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어를 못할 권리와 같은 것이다. 한국어는 지치고, 나갔다 오면, 망각이 된다. 피아졸라의 오블리비온이 된다. 그것은 남자가 여자 친구를 위해 란제리 가게를 들르는 것과 비슷하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때마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우리의 기억은, 그와 같은 인의 분자를 너무나도 뻔뻔하게, 너무나도 명약관화하게 아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어가 만만하고, 우리가 연변을, 어떤 언변을 갖추는 것을, 북한이건, 남한이건, 한국어가 갖고 있는 훌륭한 주름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 외에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연사나, 웅변학원은 있는 것은 보았으나, 문학학원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기일까? 아니면 미래의, 어떤, 냉동인간과 같은 약속일까? 우리가 한국어 소설을 읽고 좋아하는 것은, 어떤 야합과 비슷한 냄새가 있다. 우리가 지하철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사람 별로 없는 곳에서, 델리만쥬로 우리의 코 신경을 자극하고, 우리의 어떤 욕망, 대신해서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을, 잡아 흔드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모두 노려보고, 우리는 그 대학로 연극 같은, 미술의 오브제 같은 것을 보면서, 다시 잠이 들 수 있는 것이다. 한국어를 못할 권리는, 사람이 죽을 때는, 죽고 살 때는, 없는 것이지만, 철저히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바쁘고, 상대가 그냥 그렇다고 하는 경우에는, 마치 어떤 정말 다른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한국어를 못할 권리를 꺼내, 손현주의 어떤 시골역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런 것이다. 내가 당나라 당자, 당장에 그런 것이다. 내가 북한 장마당처럼, 당장마당에 그런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열을 올리는 어떤 프로그램은 볼 만 하지만, 국제 정세의 깊은 골을 꺼내, 내가 늘 언제나 그 얼음이 있는 크레바스에서 나온 것처럼, 아빠와 크레파스, 어쩔 수 없이 무덤덤할 수밖에 없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것이다. 대화적 존재라는 것은, 지하철 역 이름 대화처럼, 그렇게 화곡하고, 까치산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좌절을, 그 순간, 아주 작게 역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신과 같은 것일 순 없으나, 민방위 훈련을 하지 않는다는 지하철 기관사와는 같을 수 있는 것이다. 정발산역을 보면, 대학원 수준의 커리어, 지력을 갖고 있는 젊은이라면, 항상 상현의 기도와 같은 멜로디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는 부분이고, 우리는 부분 책임을 지고자 하나, 인간이라면, 우리가 숨을 부분적으로 쉬지 않는 것처럼, 정발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벌거벗은 역사에서 두드러진다 하겠다. 그들은 그나마 정신이라고 분류되는 역사를 갖고, 스파르타 반도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프로파간다, 북한의 사회상을 보고, 놀라는 것은, 표면적인 것이고, 놀라지 않는 것은, 우리들의 경험으로, 그들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이 문제인가? 문재인. 무엇인 문제인가? 문학이 문제인가? 우리가 문사철을 부를 때, 정발산역을 지나듯이, 우리가 그와 같은 경쾌한 관념을 지날 때, 우리가 혼자서, 아직 한국어를 못할 권리를 아버지에게 꺼내지 않고, 다만 침대에서 누워있을 때, 그와 같은 천문학적인 숫자를, 파편같은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문사철을 부를 때, 국문학과 영문학도 궁금했지만, 르네 데카르트 궁금했지만, 신학의 부재가 늘 부산 고신대학교처럼, 가파른 언덕처럼, 궁금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한국어를 못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가난은 그것을 쉽게 조장하고, 조장혁, 혹은 박혁거세, 중산층 사람들도 하나둘씩 포섭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녹슨 한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가, 다른 자동차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다가, 쓸쓸했다가, 기분이 좋았다가, 바쁜데 이 무슨 머리 낭비인가? 하지 않는가? 그런 사람이 없을 수 있는, 그런 높낮이의 차이가 없는, 혹은 전문적인 카 전문적인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는 많을 것이다. 래핑 작업도, 이삼 년이면 시도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상현의 기도, 내용은 너무 슬프고, 그것의 풀피리 소리만을 인용한다면, 어떻게 진행하는 목적지가 너무 슬프고, 아무도 없고, 우리가 야구장에 가서, 우리 도시의 친목을 도모하고, 북한과의 통일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정말 아무런 구원도, 구원 투수도 없을 것 같은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할 때는, 구원 투수가 구원 투수 같기만 하더니, 우리가 가볍게 옷을 하나 사고, 저 깊은 가능성에서 자동차를 하나 사고, 마음으로 사고, 래핑 작업까지 원하는 색깔로 하고 나면, 관념과 시간의 불균형 때문에, 처음 경험하는 것 때문에, 그다지 모범생이 아닌 사람들도, 폭포와 계곡으로, 가을 계곡으로 구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 소설을, 마음에 맞는 것을, 수준에 맞지만, 그래도 높이도 못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고, 우주의 출사표 같고, 슬픈 비목의 가곡 같고 하지만, 나의 포토샵만 보더라도, 이제는 마네나 모네, 므네요시, 달리와 로트렉에 조금도 뒤지지 않으니까, 그만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어를 못할 권리를 갖고, 제시하고, 차원을 이동했던 사람들도, 그 깊은 살라만더의 시간 속에서, 소환이 되고, 환율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관념의 이중 계산 때문에, 육체의 홀대가 이뤄지지 않음을 경험하고 나서는, 마음이 기쁘다 못해, 못내 이상해지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 모두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미술가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가는 우리의 존재의 순서에서, 처음에는, 어린이들과 함께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중일 수밖에 없고, 조금이라도 중등교육을 받고 나면, 얼른 대충 숙제로 내고, 시험 공부를 하는, 이마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는 돈을 들여, 지나치게 서양의 로컬리즘을 추구하고 찾아갔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마땅한 지도교수가 없었고, 그것은 박사과정을 생각하는 청년들에게만, 그런 비단뱀의 고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지도교수가 암살당하고, 처음부터 싹이 제거가 되고, 겨우 야트막한 것에, 그런 그에게 공부를 못하는, 돈만 많은 여자가 붙고, 마침내 떨어지지 않고, 그와 같은 천변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은 영어를 못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사람이 미국에 빠지면, 영어를 바로 잘한다는 것은 미신이고, 신화이지만, 도중에는 정말 미국에 빠져, 영어가 폭증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미국에 빠져 있는데도, 그 미세한 입자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도리어 한국어를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도, 아버지가, 그 예쁘고, 총명하던, 아이, 그가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어,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다만 드라마나 음악만 듣고, 지금 것들을 겨우 듣고, 한국어를 잘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마음이.
마호가니 같은 목소리가, 미국 대학 도시 근처에서는, 남녀가, 남자가 많았었다. 그러나 그 베트남 전쟁 같았던 유행이, 공부는 그처럼, 아주 먼 나라의 전투 같고, 후방에서의 열병 같은 것이니까, 캄보디아에까지 와서는, 그만 실종이 되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는, 대학에서는 실패했던 한국인들의 목소리가, 사탄들의 공중 제비 시스템에서는, 도리어 보존되는 경우가 발생하여서, 일부러 교수님과 같은 캐릭터는 일절 금지가 되는, 지경이나, 단계에까지 우리가 도착하게 된 것이다. 한국어를 못할 권리로만 쓰였던, 기사나, 프로필, 에세이들이, 나 한 사람에 의해서 척결이 되고, 마치 시스템 보완 작용이나 효과 같은 영화나 드라마들이 있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렇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 한국어를 못할 권리를, 혼자만의 방에서, 침대에 모로 누워 확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와 같은 마호가니의 키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말 뜻이 무엇이었는지, 밴쿠버가, 토론토가 무엇이었는지, 턱썬이, 투싼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들의 한국어를 못할 권리를, 기사로 읽고, 학생들이 논문으로 읽어도, 혼자만의 방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크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자라지 않는 것이다. 만일 제갈공명처럼, 그렇게, 공간의 불분명하고, 존재가 불분명했던 우리의 것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들의 사탄의 지배가, 그림자가 빠져나간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오순절의 다락방 기적처럼, 한국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일제에 지배를 받을 때, 얼마나 한국어를 마음껏 하고 싶었고, 해방이 되고, 통일이 되었을 때, 얼마나 한국어를 마치 타산지석처럼 잘할 수 있었는가? 아프다던 아이도, 몇 십리 길을 걸어와서, 함께 기뻐하였지 않았는가?
......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그 모든 사연을 다 말하기에는, 우리에게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 학생들이, 그래서 요약을 했다가, 그것을 하지 않았다가,
이름을 짧게 불렀다가, 길게 불렀다가, 그런 것도,
영어를 못할 권리,
한국어를 못할 권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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