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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과 성경

by 마음대로다 2022. 6. 28.

 

 

 

 

 

 

해석학과 성경

 

 

 

 

 

 

 

 

 

우리는 어째서 기독교에 게을렀던 것일까? 우리가 과학에 게을렀던 것은 성리학적 측면에서 납득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게을렀던 것은 이해가 되지 않고, 그래서 기독교와 과학이 쌍으로 우리를 침입하게 된 것일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성경이 좋은 것을 불교 신자들도 잘 알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좋다, 이렇게 좋다, 이런 이유로 좋다, 하는 말을, 속 시원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스피치 능력은 어쩌면 도올 김용옥의 수준으로 한정이 될 것이다. 좋다 나쁘다 말을 하면서, 남들은 하지 않는 이야기, 윤상 아이유의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 그러나 정확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논리가 딸리고, 아무도 몰랐던, 그리고 지금도 모르는 논리, 논어, 그 맑은 논에 올챙이가 돌아다니는 지경에까지, 우리는 학자와 헤어지고 노래와 가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학자가 싫다. 노래와 가수가 좋다. 대학이 가수들은 초청하면서, 물쑈, 학자들은 초청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대확 관계자들이, 학자들을 싫어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들이 티비에서도 맞는 말을 할 때는, 낮에 먹었던, 스테레오 카세트테이프 같은 자장면이 기억나고, 넘어올 것 같고, 그렇지 않은가? 김용옥을 여기저기서 불렀던 것은, 다만 우리들의 도시가 질주하는 스테레오 카세트 같은, 그런 슬픈 기억과 흔적들 뿐은 아닌 것의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목사들을, 부흥 목사들을, 늙은 가수들과 스들은 님들을 붙이면서, 나부터도 목사들은 님자 붙이는 것을 마다하는 것은, 어쩌면 시대 정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유가 그렇게 여기저기 달라붙는 것이 어떨 때는 너무 넘어올 때가 있다. 어쩌면 시대 소녀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뭣때문에 그런지, 잘 모르고, 우리들의 기억은 단절되어 있고.

 

학자들도 우리에게 훌륭한 초청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스들을 불러서, 우리가 좋은 것은, 어쩌면 기대 심리 같은 것일 수 있다. 민족에 대한 기대 심리. 선한 사탄에 대한 기대 심리. 그것에 관한 극한의 물결. 우리가 일본 애니 불교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의 불교가, 한 번도, 어청도 물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도 노력하면, 저 정도의 봐줄 만한 분석적 대상으로서의 불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 수도 있다. 일단 지식이 있고, 그것에 관해서 좋고 싫고 따질 수가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인생 같다. 한국 불교는 지식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불러다가, 사람들 앞에서 이런저런 말을 시키면, 안 하면 되지 하는 것에서 우리들의 뇌가, 영화 샤인에서처럼, 끊김 현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저마다 몰랐던 이야기가 하나씩, 둘씩, 사라지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한신포차와 같은 시공간을 맞이하게 되자, 우리는 꼼짝없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늘 내게서, 헤겔과, 사르트르, 맑스와 프로이트, 할 말 없으면 헤겔이고, 왠지 잘난 척하고 싶으면 프로이트라고, 내가 언젠가 말한 것 같은데, 단지 그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숱한 중간 지식인들의 어떤 넘실거리는 바다의 배들을 붙들어 놓은 것 같은 풍경 안에서, 그들의 인사이트가 소위 전공자들을 앞질러가는 현상을 맞이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의 보고는, 여기저기에서, 셀 수가 없다. 만일 지금과 같은 단계가 옛날, 차 대전 전에 있었다면, 공산 정권이 있었대도, 동시에 다발적이었다면, 그런 대규모 전쟁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우리 국토가,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없이, 다만 비판의 대상으로서의 성리학만 겨우, 비판의 관점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어쩌면 자랑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리학을 가지고, 서로 싸울 수는 없고, 그것은 정말로 이상하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대신에 성리학만 가지고서는, 굴지의 이데올로기를, 미학도 이데올로기가 되는 세상을, 가질 수 없지 않은가 할 것이다. 서로가 지금 당장이라도 전쟁이라도 할 듯이, 그렇게 자기를 단련하고, 나중에 성리학을 한다면 낫지 않겠는가 할 것이다. 지금은 왠지, 성리학으로 사람들을 단련시키는 것 같고, 지배하고 교육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탄이, 그런 마지막 카드마저도, 앙코르 와트, 앙꼬를 박박 긁어 뭔가를 만드는 것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그 때문에, 그 먼저의 가정이 굉장히 덧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성경을 공부하지도 않는데, 음악 중심, 그러니까 성경 중심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는데, 사탄이 우리를 춤추게 하고, 성경에 좀 더 가깝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서의 말씀처럼, 아시아에서 국가의 인구 절반이 죽어나가는 전쟁을 경험하고, 그것의 원인을 찾아, 파병 나오는 순서대로 쫓아 들어가자, 마계가 나타났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성경 해석인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것은, 말은, 표현은, 나머지 바울 서신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만 이데올로기를 가지면, 지배, 기지배들을 꼬드겨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사람 많은 곳의 서사시인데, 사도 바울과 같은 굴지의 사상가가 나타났으면서도, 그 흔한 아랍 지역, 그리스와 로마에서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전쟁 없는 서신이, 그러나, 암흑의 핵심에 있는 서신이, 그래서 절묘하고, 한 없이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의 마무리까지, 그와 같은 방향 아래서 쏙 읽히고 만다. 그것을 역방향으로 만들고 싶은 사탄과 서양의 마음이 천년의 역사라고 하면, 얼마나 인간은 갠역시, 갠지즈 강의 모래알과 같은 것인가? 다만 많을 뿐, 사탄이 천년을 넘어가자, 함구하게 되는 것이다.

 

동양의 학자들이, 늘 서양의 학자들보다, 빛이 나지 않고, 결정적으로 리밋이 걸려 있고, 항상 서양 사람들의 말에, 더듬이가 더듬거리게 되는 것은, 천년여왕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에, 대충 스테레오 카세트테이프 같은 것으로 자장면을 해 먹었어도, 사람들이 주고, 나눠 먹었어도, 토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동양에서 당한 환난을, 그렇게 정하고, 그것과 인과가 맞지 않는 몽골군의 서양 정벌이 있고, 그것과 인과가 맞지 않는 일본군의 태평양 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미사일 기술과, 전투기의 엔진 같은 것이, 전부 미쿡 것이라는 말들이, 항상 인과가 맞지 않는 어떤 게 새끼들의 플레이가 생기고, 소규모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힘이 없는 것을 좋아하고, 니체, 그렇다고 보면, 성경을 읽지 않게 되는데, 그것을 도리어 성경을 읽게 하는 방편으로 그렇게 하였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짜증을 내는 것은, 이미 어두운 시골 사람에서 벗어나, 어느덧 뭔가 있는 것 같은 도시인이 되어서일 것이다. 자장면 맛이 변한 것은, 원래 맛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지금의 레시피가 알게 모르게 바뀌어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짜증은 지금 우리가 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 불교도 일본 애니 불교 못지않아서, 단 하루도 짜증을 내지 않은 때가 없고, 서로 싸우고, 그랬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다만 그와 같은 물증이 없다는 것일 것이다. 만일 포토샵과 같은 책이 정말로 있고, 그와 같은 교양 수업 시간이 정말로 있다면, 그런 어떤 문화 강좌가 정말로 구청 문화센터에서 개설된다면, 다만 스쳐지나면서 보아도, 우리는 우리들의 진리의 증거와 같은 멀미나 구토 같은 것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만이 멀미나 구토를 하지, 개나 고양이는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분명 비위가 강한 그들이 인간과 똑같이 멀미를 하고 구토를 한다는 것은, 그곳이 매우 이상한 생활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는 그런 것이 없다. 다만 요한 서신에서부터, 그런 것의 기미가 아주 조금 있고, 요한 서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나도 어렸을 때는, 그리고 계시록에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경지가 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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