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향기
또다시 대작을 기획 중이기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겹치는 것 같다. 사람은 하나의 관심에서 나오고, 하나의 관심에서 훌륭한 글이 나오기 때문이다. 너무 작품 위주로만 생각하면, 순간적인 기쁨과, 슬픔, 희노애락 같은 것이 사라질 수 있다. 내가 학교를 다녔다면, 하루 종일, 하루 종일 순간적인 글만 썼을 것이다. 우리는 배의 높은 갑판에 있고, 그곳에서 늘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디에 문왕이 있는가?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문왕이기에는, 늘 부끄럽고, 능력이 미치지 못하고, 어려운 법이다. 우리는 자의식을 갖고자 하나, 여자 친구를 대신 갖는 편이다. 우리가, 내가, 서울에서, 비싼 차를 서둘러 타고 다녔다면, 바로 그와 같은 엄청난 갭을, 어쩌지를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소년과, 청년, 학생의 문왕이었다가, 참 문왕이 되고, 쇼팽이 되고, 쇼펜하우어가 되고, 적어도 나쓰메 소세키가 되고, 금각사의 작가가 되면, 그러면 좋지 않은가? 쇼팽이 되는 것이 좋고, 쇼펜하우어는, 어떤 최루탄 가스를 조금 마시는 것 같다가, 마는 몇 번 버스의 종점 같은 느낌이 있다. 쇼팽이 되는 것이 가장 좋고, 우리나라 지역, 도시, 숲과, 바다, 호수, 어딜 가도, 정림사지 육층 석탑, 나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내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한계가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와 같은 과장이, 시마 과장이 싫은 것이다. 골고루 나눠주는 것이 좋고, 웨이팅이 있대도, 기필코 먹는 것이 좋고, 히트 시간이, 하드 시간이, 그런 굉장히 바쁜 시간이 지나서, 방문을 해서, 기다리지 않고 먹는 것이 좋은 것이다. 울타리 안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좋고, 울타리 바깥에서도 관람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는, 그런 모든 영화평론가, 음악평론가, 국문평론가, 그들이 독자적인, 다리가 없는 풍경, 그런 자탄풍의 풍경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내가 늘 일필휘지로써, 갈무리를 하고, 천리안을 하고, 자동차 캡쳐를 하니까, 어느새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먹혀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슬픔이다. 그것은 작당이고, 그것은 작정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국문학과에 갈 줄 알았었다. 내가 산디를 간다니까, 그 실망하는 표정이, 대충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미술 선생은 뭔가 놀라는 눈치였었다. 돈이 많이 든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도와주겠다는 말도 했었다. 그리고 서울대를 지망해야한다고도 했었다. 그러나 존재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지, 일정 정도는 실망의 기획이었다. 그리고 내가 신학과를 간다니까, 비로소 안도현의 한 숨을 쉬는 것 같았고, 그것도 적당히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내가 국문학과를 갈 수는 없었다. 영연과가 갑자기 비등해진 것도, 어쩌면 내가 국문학과를 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비상사태적인 대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국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한비자를 위시한, 주자학적 중문학이란 무엇인가? 대중이란 무엇이고, 중원이란 무엇이며, 열여덟 번이나 제작되었다고 하는, 의천도룡기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늘, 어린아이 같은 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을 때리게 되면, 존재의 힘이 처음에는 강해지는 것 같으나, 일제처럼, 순식간에 몰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계속해서 놔두게 되면, 지금의 우리나라 국문학처럼, 바하의 웅장한 배경 음악과 함께, 샤콘느, 콘이 느해지는, 세련된 콘이, 느해지는, 샤. 콘. 느. 그것의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죽은 샤콘느가, 살아있는 국문학생들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죽은 샤콘느, 비디오 킬즈, 살아있는 국문학생, 레디오 스타알. 우리가 프로야구를 보고, 국문학생들이, 정식이 아니어서 더욱 눈물 나는 사람들이, 원정 응원을 가서, 하루하루 저녁 시간을 채우는 것은, 도연명과 같은 것이다. 도연명이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시대를 초월해서, 지금까지도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슬픔이다. 그것은 내 눈에 슬픈 비, 박지윤의 제법 괜찮은 좋은 노래 중에 그런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안타까움이고, 그것은 구조주의이며, 그것은 슬픈 좀비이다. 우리는 응원하고, 내가 대작을 연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겠지만, 우영우처럼, 주자 바깥의 사람들도, 영향을 가질 수 있기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거제도의 지나는 거리 풍경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가장 복이 있는, 복을, 웰쓰를 소유한 사람인 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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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공을 던지는 것만 봐도, 저 아이가 나중에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줄 예상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예상을 백 명 한다고 하면, 나처럼 산디 간다는 사람이 열 명 정도 나오고, 다들 훌륭한 과를 지망하고, 국문학과를 지망해도, 죽은 샤콘느가, 살아있는 국문학생을 죽이고, 자살하는 시간을 걷는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만 봐도, 국문학과 대학원을 갈지 안 갈지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내가 한석규를 닮았지만? 아무도 내가 탤런트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나 가난해서, 아무도 내가 쓸데없이 배우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국문학과에 지망해서, 군선도의 풍경처럼, 무리 지어,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는 공부자들이 되었다면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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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창작을 한다고 하면,
밤마다 축제와 같다.
우리는 야스퍼스, 그러니까 살리에리의 시간을 살 수도 있고
모차르트의 시간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국문학은, 이상하게 나타샤의 당나귀와 같다.
우리는 비상한 비평의 문법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영우의 절벽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들의 마음은, 높은 신축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그 모든 드라마를 본다고 해도, 우리들은 이 드라마가 훈련인 것인지, 아니면 훈련이 아닌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 죄, 이처 신, 그것으로 인해서 뇌가 적당히 짓눌리는 경험을 갖게 된다. 우리는 사랑을 연기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들의 사랑은, 그것을 연기하는 것을, 가로지르면서 질주하는, 고래나, 돌고래와 같다. 우리들의 소설은, 그것의 증거이고, 남겨진 화석이며, 도연명이고, 백거이이며, 한유이고, 이순신이다. 우리들의 드라마도 그렇다. 형식과 도식, 심벌과 현대 엔시리즈 같은 것은, 진리의 순수한 표현의 훈련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느 풍경에서 돌아와서, 우리들의 기숙사나, 자취방, 문왕과 문황의 캡슐 속으로 사라지고, 재집결할 때, 꼭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교수의 줄을 잡아서, 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림자가 되고, 그림자가 되어서, 대학을 그림자의 지배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과 싸우지 않는다. 만일 싸워도 된다고 하면, 문과의 캠퍼스에 진입하면, 항상 앰뷸런스와 형사들이 와 있을 것이다. 아침부터, 서로의 알리바이를 묻고, 확인하고, 정리할 것이다. 항상 교수들은 자기들의 얼굴에 히스기야가 있는지, 자기의 손에 못 자국이 있는지, 온몸이 찔리고 맞은 곳 투성이라는 것을, 감추기도 하고, 때로는 자랑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구조의 지배를 감식하지 않는 경찰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결국 그림자의 편에 서고, 그림자들이 학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그것은 한강의 범람과 같다. 동물들은 그래서, 항상 이중적이다. 인간이 그래서 가장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림자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
그는 무영탑과 같다.
그는 일본 문학과 같고
중국 문학과 같다.
베트남 문학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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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지혜가 있다면,
가볍게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