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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하이성 동굴벽화

by 마음대로다 2022. 6. 4.

 

 

 

 

칭하이성 동굴벽화

 

 

 

 

 

 

 

 

우리는 누구인가? 찬찬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 친구 중에 박찬훈이라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농구 선수 중에, 박찬숙이라고 있었다. 찬찬히 돌아본다는 것은 그마만큼 중요한 것이다. 나는 공을 던질 때, 항상 많은 생각을 했고, 항상 빨리 생각했으며, 항상 빨리 결정했었다. 타자들은 너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투수들도 너무 포수가 요구하는 것들만 하는 경향이 있다. 투수는 그렇지 않고, 그럴 수 없어서, 그 가난한 어린 시절의 꿈, 마운드의 슬픈 높이 위에서, 공을 다른 투수가 없다는 이유로, 프로야구는 그렇지 않은데, 지든, 지지 않든 끝까지 던져야 했다. 끝까지 던지는데, 항상 많은 생각을 하고, 항상 빨리 생각하며, 항상 빨리 결정해야 했었다. 그러니 그 생각의 반도체를, 사실 보통의 사람들, 야수나, 타자, 관객들이나, 해설가, 그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항상 보고도 놓치고, 알고도 못 본 척하며, 몰라서 너희들도 안 예쁘고 그러는 것이다. 요즘 투수들은 옛날보다 생각을 덜하는 경향이 있다. 옛날 투수들은 그렇게 생각을 많이 했다. 집안 생각도 하고, 학교 생각, 고향 생각도 하고, 고향이 대도시인데도 그렇고,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 생각하고, 팀의 승리와 연승과, 코리안 시리즈의 우승도 생각해야 했다. 공을 하나 던질 때, 그럴 때마다, 그렇게 눈물이 나왔다. 우리는 박수근의 그림 안에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농촌이었으나, 우리는 광주 가난한 도심의 공터에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재미가 있었으나, 늘 하는 생각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하는 야구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항상 이길 것 같았고, 의외로 자주 지곤 하였다. 열 번 이긴 사람은 열 번 이긴 것을 생각하고, 아홉 번 지다가, 한 번 이긴 사람은, 그 한 번 이긴 것을 갖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집에 백과사전이 즐비한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어떻게든지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과 같고, 집에 성경책이 있는 사람은, 성경책만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안타가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투수였었다. 공이, 지그재그로 지나서, 야수들을 지나서, 야수들도 아주 꼬맹이 수준에서 벗어나서, 공이 앞으로 오면, 온몸으로 막고, 부딪혀서 막고, 다치면서 수비하고, 그랬던 수준이고, 등급이었었다. 그런데 공이, 꼭, 야수 앞에서 변하고, 다른 내야수가 가까이 가는데, 그 앞에서도 변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외야수까지 날아가는 것을 함께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내가 투수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집에 투수가 없고, 가재도구도 없고, 그렇게 늘 없는 것이 많아서, 한 번 투수가 생기면, 그가 없는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너도나도 투수를 해 보고자 하지만, 나중에는 너만 투수해라는 분위기로 바뀌곤 하였다. 안타는 늘 나오는 것이다. 안 맞을 수가 없다. 그것이 나의 터닝 포인트였다. 그리고 야수들이 온몸이 부서져가면서까지 수비를 해주니까, 나는 던질 수 있는 공들이 열 개씩, 스무 개씩 늘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공들이 있었고, 처음에는 아주 작았으나, 미약했으나, 나중에는 정말 성경의 말씀처럼, 창원대학교만 해졌었다. 나는 처음에는 쳐라, 하는 공을 던진다. 그것은 느릿하고, 그것은 편안하고, 그것은 어린아이의 정경 같은 느낌을 주었다. 스포츠가 아니었고, 처음, 친척들과, 삼촌들과, 그렇게 공을 주고받을 때, 그런 느낌으로 던지는 공이 있었다. 지금은, 지금의 프로야구는 그런 공이 일절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실투도 아닌데, 실투인 것처럼, 끄집어다가, 홈런 티배팅을 할 수 있는 능력이겠으나, 내 어렸을 때는 분명 그런 공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을 던질 경우에는, 갑자기 아이들은, 야구를 하나도 못했던 시절도 돌아가고 만다. 그것은 겨우 일이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겨우 세 달 전에는, 공을 잡을 줄도 몰랐던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 공을 한 한 개 반 정도 던지면, 금세, 배트를 부여잡고, 노려보고, 공을 보고, 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적당히 속도를 올려준다. 공은 그 정도만 빨라도, 스윙을 얻어낼 수가 있다. 그런 공을 또한 한 개 반 정도 던지면, 스트라잌 숫자에서 몰리게 되고, 그러면 정확한 아웃코스, 아웃백 식당만 가는 것만 던져도, 타자들은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처럼 힘을 잃었다. 그것은 그렇게 방정식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디 중국 작은 도시에서 온 것 같은, 그런 여행의 거리감이 있는, 그런 학생들도 있어서, 반드시 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야수들도,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짓곤 하였다. 그 타자가 다음에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리고 나는 굉장히 압박감을 느꼈다. 그래서 공을 세 개 놓고, 마치 강남 어딘가에서 오렌지 가판 장사를 하는 것처럼, 하나씩 던졌고, 치지 않는 경우에는 삼구삼진이다는 작전을 폈었다. 그것은 내게도 더욱 중요한데, 이런저런 공을 계속 던지다가, 더 이상 던질 공이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기보다는, 공은 공중에 있고, 배트는 그것을 맞혀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집중해서, 승부를 빨리 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높은 공을 던지면, 타자들은 보거나, 치거나 할 것 같지만, 또한 공이 속도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스윙이 나올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런 스윙이 나오는 높은 공과, 스트라잌을 얻어낼 수 있는 공이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공을 살짝 몸에 붙이면, 그 옛날 당나라의 금상첨화가 되는 것이다. 안동이 되고, 안산이 되고, 그 옛날 당나라의 장안이 되는 것이었다. 스윙이 나오면, 칠 수 없는 것이고, 당연히 맞히지 못하는 경우에는, 빠울이나, 땅볼이 나오지 않는 경우에는, 아웃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타석에서, 내가 결정구를, 그렇게 삼성반도체만큼 던지지 않고, 다만 가운데로만 던져도, 타자는 가운데로 여기지 못하고, 몸 쪽 공으로 여기게 되는, 착시 현상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 팀은 그렇게, 처음에는 늘 지다가, 나중에는 늘 이기는 경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백주부, 혹은 박남정의 요리, 그런 경기를 요리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기에는, 말도 못 하는 이전 수준이 많았었다. 공이 삼루로 굴러간다 하면, 무조건 타자는 뛰었다. 왜냐하면, 삼루수 아이들이, 일루로 정확하게 송구하는 것도, 아침 일찍 학교에 가는 것만큼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이 외야에서 잡히는 경우에는, 그것을 어떻게 내야수들이 잡는다는 것도, 집이 아주 부자여도, 여자들이 시집을 잘 못 가는 것처럼,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점수를 많이 내주어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았고, 중간에 점수를 많이 내주어도, 서로가 더 많이 점수를 올리면 되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야수들은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되었고, 투수는 메이저리그의 쿠바 선수들처럼 되었었다. 지는 경기를 꾹 참고 있다가, 이기는 것이 그렇게 재미가 있었고, 가장 슬플 때가, 서로 점수가 비슷하게 진행되다가, 마침내 안타를 연거푸 내주어서, 질 때였었다. 아무래도, 투수 교체가 이뤄진 팀과는 다르게, 혼자서 던질 경우에는, 공의 속도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 그런 원칙이 있는 것처럼, 그런 공을 나중에는 타자들이 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그냥 흙바닥에 떨어지는 공들을 던졌었다. 어떻게든 이기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투수가 있는 팀이 행복했었다. 나는 상당 시간, 그런 자의식이 없는 채로 공을 던졌었고, 나중에는 그런 자의식이 있는 투수로서 공을 던졌었다. 어째서 우리나라에 학자가 많지 않은가? 어째서 결정구가 늘 그렇게 없는 채로, 다만 공이 삼루에만 가면, 무조건 주자는 세이프가 되는 것인가? 어떤 논문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거리를 가로질러, 타자보다도 빨리 일루수의 글러브에 도착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 것이다. 일제 글러브가 재질이 좋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린아이들도 학자가 되기를 선망할 수 있다는 것에까지. 그리고 금남로에 있던 제법 멋진 건물들까지. 공을 온몸으로 막아도, 그것 때문에 집에 갈 것처럼 아파도, 참고, 아웃카운트를 올리고, 내가 공부를 하고, 누군가의 글이 그와 같은 무한한, 가치 있고, 아름다운 스트라잌 존을 흐를 때, 나의 남들이, 그러니까 나의 타자들이 친 공이, 홈런이 되어, 대낮에, 나무들 사이에서 빛나는 유에프오가 될 때, 우리는 그렇게 미학적으로 기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미학도 이름이 느리고, 에스떼틱스는 너무 느렸다. 우리는 그때, 미학적인 감각을 먼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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