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성경의 개인적 방식으로서의 접근성의 문제에 관하여
아주 극단적인 인더스트리아와 소외의 극치, 생멸문의 디에이치로렌스의 흐름 속에서, 그게 뭔말이냐면 유튜브의 한국영화 상영 페스티벌에 관련한, 그것은 마치 아파트의 아침에 신문을 거대하게 펴놓고, 여기저기를 가보고자 약정하는 마음이, 한 열한시 즈음을 지나서, 모두 철회되고, 비빔면 두 개 먹고, 샤워 한 번 하고, 티비를 조금 본 뒤에, 우리 위대한 가뇽의 어린아이의 꿈과 같은 주자학적 주화입마에 진입하는 어떤 두시. 도시는 회색 빛 같은 흰 빛으로 가치 없이 점입가경하고, 그곳에서는 우주인들이, 촉촉함과 콘크리트의 대결, 자기는 무고생자인데도 고생자가 투사가 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대흥사. 그대는 대흥사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갔다고 단번에 써먹는, 아주 좁은, 좀더 명랑한 단어로 말하면 협량한 재산의 작가가 순간적으로 자기 우위를 구사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핑클의 나우. 어쩌고저쩌고 푸츠핸즈업. 유교는 서예를 하는 것이라면, 불교는 그 둘을 어떻게든 관계 맺음 시키려는, 그 희미한 연결에 대한 인연수의 노력이지 않을 수 없다. 공부하다가 미쳐서, 핑클의 나우를, 그러니까 그런 방식으로 지금의 금쪽 같은 개념을 팔아먹었다고. 성경은, 여기서 번쩍, 참숯총각, 대흥사에 다녀왔다고 담담하게, 예언자적으로, 이것은 정말 이콘 킴 교수에게 구약 신학을 배워야 제 맛인데, 혹은 솔로몬적으로, 스스로 산헤드린 재판정에 섰다고 말하는 솔로몬처럼 자랑하는 것 같은 것이다. 재산은 말을 타고 안타고가 아니다. 재산이 있고 없음이. 그것의 화석과 반쯤 타다 만 재 같은 저먼 아이디얼러지는. 어떤 생물체의 존재는 곧 본질인데, 강의 맑은 물이 본질이 아닐 수 없다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강물이 여러 공장 생산과 지나다니는 배들로 오염이 되면, 그와 같은 본질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만일 성경이 오토바이를 타고 대흥사를 다녀왔대도, 그것은 프리 윌, 헐이웃 영화 프리 윌리와 엇비슷하다. 범고래가 물 속으로 다시 첨벙하는 기쁨. 나머지는 잘 몰라도 되는. 오토바이는 아쉬운 소리 없이 대지에 태어났으며, 성경은 마치 푸른 초장에서 만난 선물처럼 그것에 올라타서 대흥사에 다녀오는 것이다. 흩날리는 꽃이 없다 하는 사람이 있는데, 재산의 있고 없음이 존재와 본질이 서로 야규하고 있음을 우리가 어찌 모르겠는가? 도리어 신록이, 이번에는 손님 맞이 하고 있다는, 문학의 원죄와 같은 아부 심벨, 아부로 벨이 꼴리는, 평생, 남의 집 문화적인 종살이, 그것의 가튼 말을 해도 다시금 프리 윌리 되는. 그 말이 바로 항상성, 한국어적인 아티큘레이션으로는 지.속.적.으.로.다..... 인도인처럼 스티커를 사랑한다면, 생활적인 미모의 여자 이름 이.다.도.시..... 성경은 에이도스가 밖에 없는 형상이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상상할 수 있는가? 이런 형식미? 초원에서는 타잔이고, 부잣집에서는 밤늦게 프리드리히 헤겔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도 여건만 되면 광주의 괴테 하우스를 다닐 수도 있었다. 그것도 프리 윌리. 이미 잡념이 넘치게 되었는데, 마땅한 현재적 대상이 없는 독일어를 배워서 뭣하겠는가? 그러나 한순간 만큼은 뜨거웠었다. 초원에서는 캠프, 캠핑, 캐빈, 산장, 이모집, 삼촌집, 인디안 친구집, 그것은 일본 애니 드래곤 볼에 기록된 바. 성룡과 소화자. 운동장에서 하루 하다가 형상이 그 날로 죽고 없어지던 친구들. 그리고 부자로서는 마침내 집에다가 거대한 도서관을 만들고야 마는 장관이, 대흥사로 김밥 옆구리 터지는 것이다. 대흥사는 부잣집인지, 사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엄밀히 모든 절이 그와 같은 유불선 삼도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하지만 대흥사만큼 노골적이고, 대놓고, 내 미래의 농어촌 예술가형의 오토바이 이름 대노코, 그렇지는 않는다. 안한다 그런 짓은, 사람이 양심을 갖고 있다면. 그러나 슬픔은 성경 속의 천사들만을 보여주지 않고, 도리어 성경과 결락된 사람들, 지속적인 형식선들에서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뜻하지 않게, 한낮에 디스커버리하는 것이다. 큰 아들이 대흥사에 다녀왔다고 한다. 얼마나 도전심이 많고, 체력이 넘치며, 도둑들마저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소화력인지 모른다. 성경은 우리의 깊은 외로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자존심을 극단적으로 상하게 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뼈 중에 뼈에, 살 중에 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재산과 지식의 대결, 의를 상하는 학교 아침에서의 대화, 여자 친구와의 헤어짐, 친구를 만나는 이건 뭐 극단적인 트렌젠던스, 삶이 요약인데, 그렇지 않은가? 요약이 없는 성경이 요약적인 삶의 대게에 오래도록 자리한다는 것은 또한 관점에 따라서는 쉽지 않은 것이다. 두 아들은 그래서 고통으로 태어난 것이다. 한 사람은 다리에 힘이 없고, 한 사람은 몸은 건강하고, 집안에서 일을 거의 다 하나,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리에 힘이 없는 형을 업고, 곧잘 어디 다녀오기를 좋아하는데, 여러날 동안 소식이 없다가, 이것은 극단적인 인더스트리아, 지금을 배경으로 하고 싶은 작가적인 욕심 때문에서도,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아주 건강하고 기쁜 표정으로 밖에서부터 부모님을 크게 부르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남 대흥사에 다녀왔다고.......
고전에 기록된 대로, 눈물이 터지지 않겠는가? 그대가 사소하게나마 儒林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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