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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예수와 예지, 그리고 세븐(1993)

by 마음대로다 2023. 1. 26.

예수와 예지, 그리고 세븐(1993)

 

 

 

 

 

 

 

 

 

 

하루라도 머리를 감지 않으면, 머리에서, 머리가, 어떻게 된다. 그것은 안중근 의사가 한 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만큼 머리를 감는 것이, 국가 인구 지식 총량에 도움이 된다. 춥지 않은 날씨에, 일어나자마자 얼굴을 씻는 것처럼, 하루의 날을 길게 만드는 것이 없다. 추우면, 눕고, 누운 상태로, 티비도 보고, 대화도 하고, 고구마도 먹고, 잠도 자다 보면, 가끔 일어나 걸을 때, 세상이 남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중흥동, 중흥을 겪고, 걷고, 사람들이 난방에, 냉방에 아무런 장애가 없이 살다 보니,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망각하고, 오블리비온, 카잘스, 엿 바꿔 먹고, 까먹고 그런 것 같다. 눕다가, 겨울에, 앉아있기만 해도, 우리들의 지식은, 영화 정이처럼 높아지고, 늘어나고, 깊어지고, 알고 있는 영단어는 일종의 산천어나 열목어와 같은데, 그것도 제법 많이 유지가 되게 되었었다.

 

영화 세븐은, 그와 같은

단순한 질주를 기록한, 일종의 마틴 루터킹의 기념비적 영화인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을 열지 못한다. 그것을 단순히

어떻게, 우리 살고 있는 생활 세계로, 내릴 수가 없다.

 

원래 영화배우들은 로봇과 같다.

 

그것은 영화 정이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고, 그것을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들인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관점이, 관념이, 그것의 포인트가, 우리들의 이천이십삼 년 겨울 일월의 르네상스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라면, 하는 수 없다. 우리들의 생각은 누추하고, 새들의 나는 각도는, 나와는 항상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영화배우들이 스랍, 그러니까 천사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정이, 그러니까 로봇인 줄 우리가 알게 된 것이다. 천사가 로봇이라는, 앤션트 에일리언즈 학자들이 있지만, 딱히 부정할 만한 우리들의 무기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항상 청소년기때, 이무기라고 하면, 그것이 뱀인 줄을 나중에 알았고, 이무치치, 그리고 장무기, 그런 누군가의 이름을 접했을 때, 조금 놀라기도 했었다. 우리가 전쟁이 나서, 모두 저마다 가지고 있는 철제 공구들을 무기처럼 들고나가야 할 때, 이무기가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지. 성경에 보면, 무기를 드는 자가 함께 동행 했었는데, 그것도 그렇게 잘 연상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귀해서 그랬는지, 그것이 무거워서 그랬는지, 그것의 숫자가 많아서 그랬는지, 골프를 보면 그런 것도 같지만, 캐디, 내 생각에는 말이 아직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글은, 쓰기는, 생각은, 끝이 난다. 그것은

허공 중의 신비한

용오름 같기도 하고

이 씨 성의 무기 같기도 하다.

김무기

박무기

 

사람은 그것의 바디가

나중에는

다만 무기처럼

보일 때가 있다. 친구도 없고, 친한 친구도 없고, 그냥 아는 친구도

가족도, 친척도, 민족도, 국가도, 공무원도

이것저것이 다 없고

그냥 한 무기가

벌판에서 눈에 띌 때가 있다.

 

 

예수는 그래서, 다만 마지막의 우리들 마음의 풍경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 공부했지만, 남는 것이 없다. 우리는 평생 문학을 했지만, 국문학을 했지만,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의 허전한 마음을, 어떻게 인걸은 간 데 없고, 표현할 방법이 없다. 우리들의 영화는, 오직 청소년기 때, 문학을 알고, 시를 알고,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를 보고, 클래식 음악을 듣고, 내가 교회를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가는지, 아니면 성경 말씀이 좋아서 가는 것인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구분하지 못하고, 가던 때가 그렇게, 그 모든 것이 가장 영화로운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나서, 확신이 드는 것은, 우리들의 스타더스트가 확인이 되어서인 것이고, 우리가 영화를 보고, 힘이 빠지는 것은, 세븐 사인이나, 세븐이나, 그러는 것은, 그것의 대미가 결코 인간의 전적인 존재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데미무어가, 평생 어떻게 살면서, 무주공산에다 글을 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대충 옆에 무기처럼 있다가, 그가 또한 글을 쓰면, 자기가 아이를 낳은 영화를 들이밀면서, 주자를 겁박하고, 자기는 짜증을 내고, 그런 장무기가 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인 것이다. 실은 이미 오래전에 졸업을 하고, 그것에 관해 할복을 했대도, 살면서, 시키면, 또 하는 것이, 또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들의 시계 태엽 오렌지 어떤 캡슐 같은 것이다. 예수는, 그것의 흐르는 물의 굴곡진 모습이, 영락없이 인간의 짧은 삶의 회고, 날카로운 화살, 죽음의 자기 명령만 같다. 세계 어떤 문학도, 철학도, 신학도, 그와 같은 화살을 막을 수가 없다. 손을 뻗으면, 손을 관통하고, 성에 숨으면, 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벙커에 숨으면, 그것의 정중앙에, 천무인지, 천궁인지, 태궁인지, 하는 것이 파고 들어간다. 우리의 존재는, 아무리 그런 빌미를 누군가 꼬드긴데도, 마다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자연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비좁은, 테이프 조약돌 하나가, 늘 언제나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삶을 살다 보니까, 미국은 지금, 세븐 사인과, 세븐에, 영혼이 모두 잠식되어 가는 것이다. 지금은 이천이십삼년, 두 영화는 천구백 년대 후반 작품들이다. 우리가 이런 작품들을 두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때로는 비통한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작고, 생명의 헛된 노예가 되고, 정말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처럼 중국 영화 인생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작품을 갖고, 아무런 대상지나, 관계의 거리감이나, 원근법이나, 그것이 아무리 르네상스 시대 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런 것들이 어떻게 했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런 비평의 성장을 하지 못하고, 항상 작품 앞에서 누드가 되고, 누드가 되다가, 여자들은 임신하게 되고, 누드는 임신이니까, 그러다가 누군가 재판을 받는 시간에, 일종의 대위법처럼,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여길 수 있는 것을, 매우 늦게 발견하고는, 생명의 형장, 그것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와 생명의 비평, 작품의 사랑과, 관계의 깊이가 없으면, 당연히 그와 같은 지식의 대가로 죽게 되는 것이다. 지식이 없으면, 무화과 속의 실선이 없기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노병은 다만 사라질 뿐.......

 

우리는 그것의 평균(막대기)을 갖고, 사실은 세상을 산다. 그러니 나중에는 영화는 모두 사라지고, 그와 같은 예지와 평균만 남게 되는 것이다.

 

예지는 아름답다. 안예지라는 가수도 있었다.

 

춤추고

 

.......

 

눈 오는 날 장병들 앞에서 아름답게 춤추면서 노래하던 이들이, 다만 자자, 버스 안에서만 있지 않았다.

 

나중에, 수많은 그룹들이, 천사들이, 걸그룹들이, 그렇게 예수와 예지의 짧은 시간을 살다가 사라져 갔다.

 

그들이 주자의 가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의 방향이 애초에 자기중심적이며, 자기애적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슬프고,

물을 마시지 못하고

여름 날

그 단순한 것도 행하지 못하고

 

물이 계속 코로 들어가는 느낌인 것이다........

그 사실을 숨기고

 

영화는 모두 자기로 돌아가는 운동의 경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그처럼 원래 즉자적이기 때문이다.

 

미국 영화 세븐은

화려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세븐 사인에서

사인을 빼고

단순하게 치고 들어가는 것이 있다.

 

항상 그것을 처음 볼 때가 좋았다.

특별한 비평의 강요가

그것의 해부가 없기 때문이다.

노스롭

 

그리고 그것의 해부는

수십 년이 지나

수사가 아니고

마침내

 

사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