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단편 영화 같은 불후의 명곡 '쿨'편을 스틸 라이프와 함께 펼쳐보이면서
롤랑 바르트가 그랬다. 지하철을 갈아타는 것은 배신과 같다고. 그것을 내가 잠결에 프랑스말로 들었는데, 우꾸숑 여꺼셔 무슨 배치옹했던 것 같다. 우리는 깜짝 놀란다. 그리고 나는 기대한다. 수도권으로 다시금 거주지를 옮긴 다음에, 무슨 글들을 쓸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걸스데이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사람은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은 너무 예쁜 것이었다. 쿨이라는 명제가, 에이프 같은 단기통이, 전체를 장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행복한 전체주의자. 아무튼 전체를 장악할 수 없는 시도 싫고, 소설도, 사람도 싫다. 전체를 장악할 수 없는 여자를 만날 수 없어서, 내가 이처럼 필그리미지를 계속해서 하는 지도 모른다. 사람은 첨단에 걸쳐 있는 소설가 뿐 아니라, 어째서 공감각적인 것일까? 사회적인? 이정이 소정의 수상을 거머쥔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걸스데이가 예쁜 것이 수사학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서울은 가능성의 도시이다. 걸즈데이 중의 한 명이 내게 나 여기서 내려요 하고 전철 문이 열리자 나가면, 우리는 거기서 가드오브워의 한 장면처럼, 천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그렇지 못하는 것은, 형식적인 한계가 너무나 크다. 우리는 형식적인 한계를 넘보지만, 이렇게도 아름다운 음악 방송이 있을까 싶지만, 하늘색 비치 웨어를 걸치고, 우리는 그것의 페티쉬만 보는 것이다. 전모를 보지 못하는 갑갑함은 저마다의 원죄이다. 시인 나혜석이 그런 말을 했다. 다 해석하기 나름이 아니겠어요? 그녀는 대학 교수 같았다. 승가 대학 하고 배꼽 잡는 것은 블레쉬피미인가? 우리는 우연히 해슬램의 스틸 라이프를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듣다가, 지하철을 지나가게 한 뒤에 계속 들을 수 있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서울은. 서울은 바울의 눈에 벗겨진 비늘 같을 수 있다고. 그것은 행복과 빛깔, 형식과 이념의 조화에 눈을 뜰 수 있는. 서울극장에 들어가면서, 그것의 형식은 감자나 고구마를 길게 튀긴 것으로 드러난다 하겠다. 어째서 나는 손길 한 번 주지 못했던 것일까? 혼자서, 거기까지 가기가 너무 힘이 들고, 곤해서, 음료수나 한 잔 하면 했지, 거기서 먹을 봉지를 들고 극장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형식미이다. 그리고 커플링이다. 우리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죽을 수 있다. 지하철 노선의 교차가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것처럼 배신한 것이다 하면, 그 기다란 것이 내가 좋아하는 멤버의 손톱에 네일 아트된 것으로도 될 수가 있다. 피스타치오는 폭력성이다. 붓을 꽉 붙잡는 것. 너무 많이 물감을 뿌리고, 너무 길게 삐치는 것. 남자가 도학위룡을 넘어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지하철을 잘 갈아타면,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닮았다는 뻔한 형식미에서 내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내 어린 마음에도 어커셩인 배신에 불과하겠는가?
경전철은........
.......... .................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렇다면 자연화되고 개인화된 원근이 하나도 없는 이들에게 언어란 무엇인가? (0) | 2013.08.05 |
|---|---|
| 봉준호 '설국열차'에 관한, 이런저런 보탬이 되는 글이라 생각되는 글...... (0) | 2013.08.04 |
| 어제 칼과 꽃의 인디펜던스의 문제에 관하여 (0) | 2013.08.02 |
| 어제 칼가꼿을 잠깐 보다가 드는 미학적 정치학 어떤 깊은 어낼러시스, 장마의 심란한 마당 중에 (0) | 2013.08.01 |
| 문명진의 '부산정거장'이 뜻하는 여러가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무용한 짓인가? (0) | 2013.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