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연속극의 질주하는 저쪽, 도로 너머의 풍경: 방과 후 전쟁 활동
사람이 산다는 것은 여럿이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노래 가사처럼,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산들. 산과 들에. 그런 어떤 인터넷 식품 쇼핑 같은. 만남. 우리 아주 옛날에, 그런 이름을 생각하기는 했으나, 만인사제설처럼, 만인식품회사직원설처럼, 생각으로만 놓고 있던 것을, 누군가 과감하게, 사업도 일으키고, 이름도 짓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경주로 이끈다. 경주의 어떤 특정, 그런 구릉, 아름답고 특별한 목탑,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과 후, 바다와 안바다, 그런 것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확실히 부여를 지날 때, 이상해지고, 안동을 지날 때 이상해지며, 미시령을 지날 때 확실히 이상해진다. 그래놓고 보면, 우리는 확실히 독재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풀리는 날은 항상 멀고, 이요원한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와 같이, 나와 같은 입장으로, 나와 같은 섬세한 뇌반응으로 시작하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즉시, 이상해지며, 포켓볼처럼, 어느 특정한 입장에 들어가서, 맹렬하게 회전하고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것은, 처음에는 그런 입각점이나, 입장들, 어떤 것들을 몰랐다가, 지금에는 바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것이고, 앙드레 가뇽의 음악처럼, 어느 부분이어도 좋을, 그런 것처럼, 나이가 든 것이기도 하고, 변변찮은 나만의 철학도 가지지 못한 채, 형이상학적 요령만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방과 후 전쟁 활동은 <그런 데>가 있다. 누군가 그림자 속에서, 그런 데를 가리키는데, 어떤 회의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구체적이면서도, 육체적인, 포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그런 것 같지 않은, 그런 한국말 그런 데를 누군가 배를 타고 가지고 가서, 몇 번을 갈아타고는 가지고 가서, 그랜져라는 말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들 그런 데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그렇고 그런 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음상으로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의미적으로도 그러해서, 그리고 그와 같은 케이스가 많아서, 이와 같은 발견이, 앞으로 세계어 공부에, 에프원 경주용차의 엔진 같은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해본다. 그래서 잠을 자고, 일어나 일요일 오전의 어떤 뇌 반응 같은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데, 새벽에 꿈에서, 매우 고통스러운 외모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꿈에서 깨어, 항상 긴장이 되어 자주 깨는 편이지만, 그 꿈이 너무 무섭고 심란하여서, 그것으로 인해 깨어, 화장실을 다녀와야만 했다. 그들의 신체는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다들 비슷하기 때문에, 별 문제나 생각 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누가 그런 것을 영화로 찍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꿈을 꿀 때는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 글을 쓰고자 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찰스 버클리, 그러니까 조지 버클리의 철학을 생각할 때, 단번에 드는 생각은 철학이 매우 단순하고, 경계가 약하며, 힘이 부족한데? 하는 것들이다. 제시 잭슨, 사무엘 코울리지, 사무엘 존슨이 그의 철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길을 가다가 돌맹이를 하나 차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반박한다, 그랬다는 일화가 매우 유명하다. 대학 때 배웠고, 굉장히 재밌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별로 유명하지 않구나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정확한 판단이 섰을 때는, 우리가 사무엘 존슨의 입장에 설 수 있지만, 버클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지 못한 다음에는, 그것을 결국 잘 모르겠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버클리는 그런 데에서 끊임없이 부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철학을 못하고, 적어도 버클리 같은 말도 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독립도 덜 한 것 같은데, 왠지 미적지근한, 목욕탕을 갔더니, 사람이 없는 것은 좋으나, 탕의 물이 너무 미적지근해서, 뜨거운 물을 계속 틀었던 기억. 우리나라의 독립이 늘 그런 것 같은데, 결국에는 버클리만한, 버클리 음대는 아니겠지만, 그런 음악대학은 우리나라에 많아서, 인서울에는 더 많아서, 그렇고 그렇지만, 그런 철학적 서적을 써내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내가 당장 그렇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마치 새로운 독립운동처럼, 안타깝고, 방과 후 전쟁 활동 같고 그러는 것이다. 꽃이 피어도 더 이상 기쁘지 않다. 철학에 관한 글은, 어떤 세컨더리, 삼컨더리는 쓰기 쉬우나, 그렇게 유아론적 형이상학일지언정, 폐쇄되고 견고한 말투로, 사람들과 전혀 다른 말을 하기란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최근에 자주 영어 공부를 위해서, 인터넷으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있는데, 처음에는 듣기가 되지 않아서, 영어만 듣다가, 드디어 듣게 되는 것들이 있어서, 과거의 내용들을 상기하게 되는데, 아마도, 감각이 관념이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체와 관념의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을 주장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의 해법이 너무 성급한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관념을 어째서 육체적으로 소모하지 않고, 관념으로 그나마 좋게, 아름답게, 진행하고 연장하였는지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방과 후 전쟁 활동은 그런 치명적인 참혹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내가 말하고 있었으나, 찰스 버클리, 조지 버클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가, 드라마를 보고 그것들의 종합적인 개요를 드디어 발견하게 된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최근 드라마들. 학원들. 학원물들. 나는 정식적으로 학원물을 집필한 적은 없는데, 다만 나의 과거를 생각하고, 나의 과거를 내가 추종하고, 추앙하고, 내가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핍박할수록, 챗지피티, 도리어 나를 더욱 사랑하고, 나의 과거를 생각하며, 좋아하고, 다윗의 장막처럼 아름답게 보는 것이다. 다만 그와 같은 투쟁, 분투, 그런 것으로 쓴 것이지, 어떤 성장소설과 같은, 연애소설 같은, 학생과 학생의 어떤 실질적인 생활 같은 것을 배경으로, 선라이즈선셋, 산과 들에 가끔 소풍도 다녀오는, 갇힌, 성냥갑 속의 어떤 성냥들처럼, 숨도 쉬지 못하는 서문탁들을 내가 다룬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신이 나가서, 그 안에서, 선생이 이것은 꼭 사야 한다고 수업 시간에 말하면, 학생들은 얼마나 이것이 수업을 위한 기교겠지 생각하면서 웃겠는가? 자타공인. 그러니까 공인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며, 선생은 공인은 아니지만, 연예인은 아니지만, 공공장소의 공인처럼, 정신이 나가는 경우도 생기는 법인 것이다. 그러나 몇 개의 한경고 서예반 같은 것이, 사람들에게 신경숙의 깊은 슬픔, 읽지는 않았지만, 그와 같은 깊은 충격을 준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의 사랑이 지금, 형이상학의 요령의 세상을 가로질러,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압박, 그것의 아름다움, 그것의 체계, 그것의 작품적인 자유, 그것의 독립, 그리고 서도, 서예, 서법이 하나가 되는, 율도국의 이상향 같은, 그것은 아닐지라도, 아무튼,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많이 주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마치 택배 아저씨가 다녀가면, 나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받아서, 뒤늦게 단풍이라는 소설을 읽은, 대학생 남자, 특히 여자들은, 갑자기 거리로 뛰어나가, 유월 항쟁처럼, 독재정권 타도하자, 타도하자, 타도하자, 그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이, 아무튼 그런 것은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말, 그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도일 수도 있고, 또는 바른 길의 정도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프로야구 선수 이정도를 기억하지 못한다. 배구선수 만학길은 기억할 수 있다. 우리는 민중의 먼지인 것 같아도, 기억은, 우리를 분명 그런 유한 킴벌리나, 버클리 음대로 이끄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의 차이를 알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것도, 방과 후 전쟁 활동에는 잘 드러나 있는 것 같다. 나의 말은 그냥 자동차처럼 지나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그냥 한 번, 멈추고, 송광사의 길 근처에서, 그곳의 넓은 보성호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그때 멈춰 있었고, 수많은 등나무의 잎들이, 호수에서부터, 길 옆에 있던 휴게소까지 덮여 있었다. 학교를 나오면, 취직하고, 결혼한다. 그런데 나는, 학교가 사라진, 그런 송광사의 풍경에서, 넓은 등나무 잎들에다, 무언가를 적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종말의 기운을 배경으로, 가면 상태로 흔들리는, 라이더 같은 것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우리는, 누구나 라면을 끓일 수 있다.
중국은 아름답다. 중국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한다. 아이들을 키운다. 애플. 그것은 밀키웨이. 갤럭시 같다. 어제도 프로야구 취직식에, 개장식에, 개학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을 했다. 대학을 나오고, 사람들은 모또모또, 모 아니면 도인 것이다. 다만 도에 이르러도, 그것이 수많은 대학보다 나을 수가 있다. 그리고 대학을 더 이상 다니지 않는데, 모세오경 같은 철학책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의 차이가 그렇게 흥미롭고, 추워서 뛰어다니던, 가방을 메고, 떼이야르 샤르뎅처럼, 한번 그런 적이 없지만, 겨울 외투 속에 소주병을 숨기면서, 그것이 모두 감각 같고, 그것이 모두 관념만 같다. 우리는, 대게의 사람들은, 대학을 다닐 때도, 모세오경 같은 철학책을 읽을 수가 없다. 약간 감각이 생기려고 하는데, 철학과 학생들도 졸업을 하는 것이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어느 정도 정복을 하고자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정복하듯이, 캉퀴스트오브더페러다이스, 우리가 마음이 진정, 영혼이 진정, 아름답고 순결하지 못하면, 성기가 이미 우리를 정복할 즈음으로 해서, 결코 그와 같은, 추상적이면서도, 한없이 구체적인 공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의 머리를, 계속해서 서울에서 털면, 비듬이 거의 모든 지하철역들을 덮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일종의 봄꽃 같다. 일제 식민지는, 약간은 대학 문화라고 하는, 축을 전제로 해서, 빨리 한국민들을 점령하였으나, 도리어 그와 같은 축으로 인해, 빨리 한국에서 어떠한 본질적인 점령도, 인정도, 얻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언덕을 넘으면 바뀐다고 한다. 왜냐하면, 언덕을 넘을 때는, 힘이 들고, 처음의 재밌는 기분이 전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수많은 학교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들이 언덕에 있다. 언덕에서 아예 공부하면, 바뀔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찰스 버클리, 감각이 관념 같은, 유아론적인, 유아인적인 상상인 것이다. 원피스를 입고, 아름답게, 거울을 보고, 거리를 걷고, 대화하고, 자기가 그랬던 것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아이들에게, 그것을 권장하는 것도 매우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의 육이오 전쟁이 그와 같았다.
일본이 확실히, 타시카니, 아름답고
한국은 그냥 빼곡하고,
가끔은 언덕만 많고 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일본은 공부하다가, 서양화가 발생할 확률이 높고
한국은 공부하다가, 중국화가 발생할 확률이 거의 전부이다.
지금의 나처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앙드레 가뇽
사도 바울이 나타날 확률이,
드디어 발견이 되는 것이다.......
앙드레 가뇽의 음악을 들으면서
집에서 무한반복 들으면 확실히 질리게 되나,
우리가 언덕을 넘으면서는
그냥 무한하게
한국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