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귀 마지막 회의 고통스러운
서울은 항상 슬프다. 그것의 계급은 늘 이슈가 되고, 해결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무등산이 떠오르고, 무등산에는 갈등이 없는 것인가 관심이 가게 된다. 광주에서 자란 나는, 그렇지 않다 할 것이다. 예쁜 것들은 예쁜 것들과 놀고, 부자들은 부자들하고만 논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내가 모르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일 것이다. 내가 광주 소재 디아스포라 같은 영화관, 거기서 영화를 보고,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편지, 그것의 시니피앙 같은 나오는 모습 같은 것은, 진정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의 성도 극장 입구 같았던 것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사랑한다. 우리는 그 장면을 너무 빨리 언급하고, 너무 쉽게, 너무 뻔하게 다시 말하는 것이 싫다. 덥석 같은 것. 전도연의. 접속 같은 것. 조용기와 조용필이 서울의 인간, 평범한 디아스포라의 사람들, 그들의 쌍끌이 어선 같았을 때, 조용기가 차분한 목소리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진정 슬픔의 인간 로봇의 반영,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을 서둘러 구원시키기 위해서는, 서울에서는 그래야만 했다.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의, 설교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것이다. 젊어서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당나라 황제처럼, 진흙 길의 마차를 사병들과 함께 미느라고, 팔이 길어져서, 대신 한국의 오랜 남자 머리가 자리 잡지 못한 것이 있다. 물론 그런 한국 특유의 남자 머리는 또한 쉽게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문열이 뭘, 배고픈 날에, 뭘 계속 먹고 있는 것 같은, 강풀이나, 햇님이나, 그런 머리인 것 같기도 하다. 어째서 한강 옆의 교회인 것이고, 대학은 없는 것인가? 성경은 통독이 있고, 정독이 있고, 그리고 수박을 읽듯이 색독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가난할 때는, 수박의 향기만 맡아도 감기가 낫는 것 같고, 기분이 좋고, 해피했었다. 우리가 가난할 때는, 다만 수학 여행 가서, 다시 만나는 기쁨 같은 것을 나중에 느끼는 것 같은, 재회에서만도, 사랑의 감정이 생기고, 중매로 대부분 결혼했기 때문에, 연애는 기가 막힌 것이 되었다.
서울이 그와 같은 대학 도시인지,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려서는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것이 많아서,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나중에는 허무함에, 억울함과 안타까움에, 견딜 수 없는 모순들에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키가 매우 작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대신할 만한 철학자가 어떤 대학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섹스가, 처음에는 바알 신앙을 가진 것들처럼, 모여서 하기도 하는 믿음의 단계에 있었다고 했다. 우리들 눈에는 끔찍한 것이지만,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과 사회가 있다 보니, 소망의 섹스가 이뤄졌다고 했다. 소망의 섹스에서부터 우리는 성리학에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야만적인 것이고, 야만의 대지 위에 핀 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여자도 사랑 때문에 드디어 섹스하는 단계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의 요약은 우리들에게 큰 상처를 준다. 구선영과 염 교수는 서로 섹스를 할 수도 있었다. 학생들은 염교수를 늘 이상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드라마가 믿음의 단계, 소망의 단계, 소망 교회, 그리고 마지막 사랑의 단계에 드디어, 그 언저리만으로도 도달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돈이 많고 싶어 하는가? 그러나 그와 같은 소망에 풍덩 빠져서, 존재의 흔적도 찾아보지 못하는 일이 그래서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어째서 이토록 티비 드라마를 좋아하는가? 그래서 한국이 갑자기 방송국 드라마 컬처가 발전한 것일 수 있다. 뭐 특별한 서적이 없고, 신간 출판사 교수들이 없는, 그래도 그런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드라마는 단지 빵빠레 같은, 딴따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 사람들은 거의 모든 범주에 걸쳐, 그 하나에 빠지는 것과, 서로 연락이 단절되는 것을 경험한다. 계급이 있기도 하고, 계층, 숫자와 단절이 있기도 하는 것이다. 소년과 소녀일 때는, 그렇게 빛나는 광주와 공주 같더니만, 숱한 경기와 경주 속에서, 강원도가 되고, 도달할 수 없는 속초가 되고, 동해와 동해 바다가 되는 것이다. 부산 앞바다가 그런 헤어짐의 흔적 같은 것이다. 거기에 어떤 대학이 있고, 시집이 있고, 그리고 영화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형해화 되어 있는, 그것이 손에 꼭 쥐고 있는, 부러진 비녀 같은 것인 것이다. 무녀는 차원을 간파한, 여자 전도사일 수 있다. 자기 딸이 또한 희멀건한 국문학의 제논이 되려고 하니, 굶긴 것일 수 있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이고, 드디어 발견이 되는, 서울의 이면인 것이다. 서울은 항상 그런 종합적인 인간인 나에게, 단편적이고, 파편적이며, 파평 윤씨, 그런 것으로 지금껏 진행해 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신학대학에 보내는 것일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한신대학교. 자기 아들과 딸들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신학교육에 보내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따로 소망이 필요가 없는 거대 부자인 것인가? 공교롭게도 그러하다. 그러니 그것들이 다만 인간 철학적인 판단이지, 신적이며,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른 판단이나 진행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서울 시내 전체의 소망 교회 같은 우리들에게는 그런 것이 다만 인간적인 진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 그와 같은 차원의 변곡선, 그런 수학적인 궤도의 인간처럼 보였던 것일까? 내가 혼자서 성도 극장을 나왔을 때, 한성 극장을 나왔을 때, 얼마나 햇빛 같은 우박이, 우박 같은 햇빛이, 나의 문왕적인 신라 금관에 쏟아졌는지 모른다. 신학은 신앙이고 사유이다. 신앙은 당을 짓는 것이지만, 사유는 무당인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짧은 문왕에서, 문종, 내려와, 취직과 결혼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문종이면, 결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사라지고,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는 구선영이 아닌 것이다.
엘비라 마디간의 음악만 흐르지 않고
피도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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