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이야기
이중 존재 삼중 존재로서의 선생
by 마음대로다
2023. 9. 5.
이중 존재 삼중 존재로서의 선생
우리가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의 테마를 듣고 슬픔을 느낄 때는 겨울이었다. 그것을 나무 창문부터 기억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스티커가 있고, 성에가 앉고,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천 드라마 세트장 같은. 그리고 웅장한 타워팰리스에 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선생이 숱한 구직난에서 벗어나, 채용이 되는,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다만 선생이 되기로 하고 노력한 것이겠지만, 그렇게 구직이 되지 않으면, 존재는 금방 어물전 망신이 될 것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접근과 도움은, 분명 도움이 된다. 자기가 주거 로봇에 주거하고 있고, 아무튼 자기가 그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건물은, 교육과 같고, 그것의 빔과 채움은, 의식과 같은 것이다.
의식은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다.
제삿밥은 맛이 있다. 그리고 삼중 존재로서의 선생이 있는 것이다. 학생이 선생을 볼 때는, 다만 선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단순 존재의 이중성, 혹은 삼중성으로 보는 것이다.
선생과 제삿밥의 언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음식의 전쟁으로서의 기원에 대해서 눈을 뜬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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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살고 있는 지금 내가, 삼십 대에 사십 대에 죽을 수도 있었을까? 팔월의 크리스마스는 마치 파월 국군 프로그램처럼, 그럴 수 있다고 예언하였었다. 우리 한반도의 존재는 처음에는 매우 단순하고, 기계 장치의 존재를, 숲을, 그렇게 은폐하면서 지금까지 진행하였는지 모른다.
칠십대 배관공의 고독사도 마찬가지이다.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에 흥분하고, 야구에 일거수일투족을 하는 우리로서는, 내가 그처럼 해태 타이거즈의 실종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여겼을 것이다. 우리들의 축제. 그것은 분명 세계사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진학도 안 되고, 등단도 안 되고, 무.등.산. 집에 유명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으로서의 삼중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중 존재나, 삼중 존재는 전부이나, 내게 돈을 주지 않고,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도와주었으나,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씩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연기와 같은 티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리를 돌아다녀도 그러했었다. 나는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사라질 수 있었다.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는, 의식 깊은 곳에서 두려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와 같은 슬픔, 중국, 그리고 슬픔 많은 선생들, 우리 아이들, 그리고 이번 기아 타이거즈의 팔 연승은, 그것의 전체 사회적인 종합은, 진정 백조의 호수의 테마 같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비밀을 안 다음에, 우리는 다만 하루라도 살 수가 있는 것일까? 살 수가 없지 않겠는가? 살수대첩. 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와 같은 고대의 전언은, 우리를 실소케 하고, 또한 맛있는 제삿밥을 한 끼 먹게 한다.
예술은 두 가지 방향에서 나온다.
하나는 천재와 같은 학교 예술이 있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성숙하고, 학교와 함께 가을을 맞이해서, 공활한, 가을, 하늘, 그와 같은 것에서 나오고, 다른 것은, 슬픔이 있고, 슬픔만이 있고, 늘 언제나 학생같이 유순한 단순 존재로서의 선생의 자기 모순과 갈등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술이 나오지 않는 것 같으나, 마운드에서, 시구자로 나와서, 때로는 보크도 하고, 해설자가 보크라고 했던 것처럼, 처음 있는 일, 그래도 공중으로 공을 던지면서, 자기의 슬픔과는 상관없이 나오는 것인 것이다. 이상하게 그런 예술과 영화, 문학과 예술, 음악과 댄스는 알아볼 수가 있다. 학생들을 배출할 때, 어째서 우리에게는 차이코프스키 같은 예술과 음악이 나오지 않는가 반성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서양은 예술이 사중 존재 오중 존재가 아니라, 실은 전쟁이 육중 존재요 칠중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천 번을 경험해도, 그와 같은 메시지는 변함이 없다. 죽의 장막. 피의 장막. 철의 장막이라는 말이, 다만 중국이나, 한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이칼호가 있는, 아시아와 유럽의 군사분계선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톡과 그들 시민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도, 다만 이중 존재, 전쟁 두 번을 하는 한이 있어도, 다소 멍청해서,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멀쩡한 의식을 가지고 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옷을, 죽은 이에게 입혀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 과거에 대한, 우리 식의 표현으로는, 드디어 아담이 눈 뜰 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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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존재는 금방 전체가 감싸게 된다. 항상 영화가 재밌고, 음식적인 기교가 항상 마음에 든다.
이중 존재는 금세 화성의, 나사 사진, 돌밭 같은 느낌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황순원의 문장들이, 문장만 놓고 보면 이문열보다 낫고, 정말 화성에 다녀온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문열은 정말 문장의 현상학으로는. 아무튼. 삼중 존재, 사중 존재로 넘어갈수록, 별다른 것이 없고, 우리는 심각한 죽음의 현상과 살아있는 고고학이나 만나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캐주얼을 입는 것도 좋다. 리추얼은 자주 입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사탄의 축복을 받고 싶어 한다.
선생의 이중 존재에서부터 이미 심각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조는 되어야 만족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