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학생: 세상 나라와 모든 다른 학생
우리는 그와 같은 글을 쓸 수 없다. 그와 같은 글은, 구글, 삼성 홈플러스, 쓸 수 없다. 나는 아직도 허영만의 질 수 없다, 그 만화를 기억한다. 제목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고, 마라톤이라고 하는 허영만,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소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극이고, 비극의 시작이었다. 전조는 어디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가 미감하고, 아주 작게 감각하고, 그것을 긴기라 무슨 노래처럼, 긴가민가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밝아진 하늘은, 동방의 꽃과 같았다. 그것은 분명, 한 손으로는 이광수의 무정을, 한 손으로는 에키벤을 든, 가메가제 특공대의 억울한 하늘과는 달랐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계속해서 살았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중국인도, 심지어는 미국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계속해서 죽었다. 공중에서. 그것은 장미덩쿨의 장미와 같았다. 그것은 어디에도 잘한다. 자란다. 그것은 아파트촌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웠고, 우리는 그것을 볼 때, 장미란, 장미인애, 장미희, 흥분을 하였다. 언젠가는 육체파 배우가 나타날 줄 알았다. 하지만 허영생, 우리의 삶이 허영으로 치닫게 되면, 치밥, 우리는 결국 가게 문을 닫게 된다. 오직 장미가 나타날 때만이, 우리는 부흥하고, 우리의 인식은 참으로 거룩하고 활력이 넘치게 된다.
이병우의 슬픈 노래들처럼, 우리나라는 갑자기 밝아졌다. 올리비아 뉴튼존 같았다. 여기서 존은 지역, 어떤 특수 장소를 뜻한다. 그런 뉴튼존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동방의 타고르, 불꽃이 되기 전에는, 필리핀도, 아프가니스탄도, 브라질도, 아르헨티나도 잘살았다. 유럽도 잘살았다. 그러나 우리가 동방의 타고르, 불꽃이 된 다음에는, 일본이 잘살았다 말았다, 저녁에 카레를 먹었다가, 돈카츠를 먹었다가, 스테이크를, 그렇게 런닝맨의 한이 서린, 그것을 먹었다가 하였다. 당연히 북한은 못사는 나라로, 사람들이 굶어죽는 나라로, 낙인이 찍혀야 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사건이, 갑자기, 생산성이 생산관계의 모순이 아닌 유순으로, 유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발생할 수 없는, 불의 그레고리인 것이다.
학생운동을 하면, 운동을 하느라고, 학살자를 처단하는 학살을 하느라고, 공부는 뒷전에 두고, 필리핀에 가서 빨치산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대는 다 가고, 다 갖다 오고, 공무원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만나면, 서로 웃고, 그렇게 현명한 단기적 기억상실 같은 드라마를 찍는다.
가난하면, 또한 가난하고, 원한에 사무친 곡성의 괴물이 되어야 하는데, 또한 그렇지 않았다. 가난하면, 그 가난함을, 인식의 쏘스로 삼아서, 비벼먹고, 불닭볶음면, 부모님은 가난하셨다고, 말을 함으로써, 이성과 사귀고, 동정을 사고, 같은 가난하지만 항상 깨끗한 옷을 입는 처자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장항선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아주 짧은 잠깐 동안의 티비문학관은, 유래가 가난도 아니고, 부요함도 아니고, 성경도 아니며, 그렇다고 안성경도 아닌 것이다. 안선영. 유래는 성경이 맞으나, 서양식의 도그마틱한, 무시무시한 호박씨 까는,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분명히 컴퓨터 차원이 업그레이드된 성경 신학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어떤 세계 학자도 조사할 수 없고, 일본식의 파견근무자, 그런 에피소드가 발생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최근까지 그나마 괜찮은 드라마가, 그들의 원인에 있지 않고, 이와 같은 알 수 없는 한국어 성경의, 개역개정, 그렇게도, 오직 그것만 해도 나라가 발전하고, 그것을 이제 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걸그룹의 일렉트리시티, 그런 대림 시티 백과 같은 것이 되는, 그것에 대한 지난한 탐구와 명상의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정식으로 그것을 발표하고,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반대 의견을 받고, 발전하지 못해서, 다만 시크릿 가든처럼, 하루살이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발전하다가, 발전하지 않는, 그런 형상의 길을 가는 것 같다. 이순신 장군 영화도 그렇다. 그렇게 멋지게, 한산, 노량 찍다가, 갑자기, 파묘 찍는. 파행. 그것은 그도, 남의 어깨에 들어가 있다가, 어깨 펴고, 영상 제작하였는데, 다음 시간에 그것이 줄어들고, 우리가 그래서 어깨뽕 패션을 어느 때는 우습게 여기지만, 잘 묘사한 것들을 우리가 좋아하고, 옛날에 우리가 그랬던 것을, 또한 시크릿 가든, 그리워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깨가 훌쩍 줄어들더니, 도리어 두려움과 공포에 찬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노량을 보다가, 갑자기 파묘를 보고, 어깨가 홀쭉해진 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천만 천만 그렇게 보았으니까, 그러나 어느 특수 인간들의 제법 오래된 시간이기 때문에, 개인이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작품을 나머지 시민이나, 시민 사회 단체, 관계 공무원들이, 지방 공무원들이 거절하지 못해서 경험하게 된 것들인 것이다.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 거기에 특화된 배우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점점 더 특화되는 어떤 것들......
남쪽에서 남쪽으로 특파된 공작원 같은 것들.
그러니 이제는 북쪽에서는 도망 나온 사람만 생기게 된 것이다. 우리는 공부만 할 수 없고, 드라마만 봤다 하면, 금세 남쪽에서 남쪽으로 특파된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노량진은 그것의 김진호나, 마지노선일 수 있다. 그러나 컵밥. 우리는 모두가 컵밥을 먹는다.....
거기서 한 남녀가, 하루 종일 열 시간 이상을 꼬박 공부를 한 다음에 섹스를 하자고 했더니, 둘 다 원하는 시험에 합격해서 잘살고 있다는, 지금 이 시대의 꽃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은 사소하지만, 결코, 즐거운 편지, 그런 사소한 편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클래식이고, 그것은 사랑하면 할수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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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깊은 차양과 같다.
우리가 독일철학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것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서양인이 아닌데도 그것을 잘하는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밀란 쿤데라의 불멸과 같다.
오일팔은 그것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내가 중국을 첨단 현대화했듯이, 만일 오일팔이 한 번더 발생한다면, 충주나, 대전, 천안 등지에서,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하늘에도 도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슬픔이고
정신의 독도의
푸르른
외로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