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교차할 때, 우리는
내내 가요나 트로트, 심지어는 민중가요, 데모가를 부른 다음에, 찬송가도, 복음성가도, 잘 모르는 찬불가도, 그것을 부른 다음에, 음악에 흠뻑 젖은 후, 그러나 그것이 지식이 되지 않고, 다만 부침개 앞의 피자만 같을 때, 우리는 연주곡을 들을 수 있다. 연주곡은. 연주곡은 지붕이 없는, 하늘 지붕에다, 오모시로이, 흰 벽들로 잘 정리된, 그런 것들을 상상케 한다. 나만 그런 것 같지만, 실은 모두가 그와 같은 한길사, 한길로 로로로를 가는 중일 것이다. 연주곡은, 젊음의 상징인가? 아니면 이순신, 이순에 걸친 누군가의 창작, 그것의 불꽃이, 마침내 그것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 연주곡이 흐르는 것은 침묵과 같다. 그것은 오래된 정원 같고, 졸정원 같고, 국정원 같다. 다만 그렇게만 적은 데도, 우리는 그것을 연상할 수가 있다. 시험을 적당히 잘 봤을 때, 그것이 그렇게 연주곡 같다. 너무 많이 잘 봤을 때는, 금세 대한항공의 비즈니스석을 이용하는 것 같지만, 너무 시험을 못 봤을 때는, 지옥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오르페우스의 아내 같지만, 시험을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의 적당히 잘 본 것 같은 정신현상학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연주곡 같고, 그것이 적당히 슬픈 것 같고, 그것이 적당히 슬프지 않는 것 같고, 맑지만, 비오는 날을 기억하는 것 같고,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삼각형의 모자를 쓰고, 어째서 일본군들이 이렇게 침략하는가 골몰하다가, 뒤늦게, 사기와 삼국사기를 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먼저 읽었을 수 있고, 대충 한 번 읽었다가, 전쟁 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놀라운 한자 집중력으로 그 모든 것을 읽었을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표현주의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나, 같은 중국 저 어딘가까지 차를 몰고 가는 형세일 것이다. 그것의 꿈. 찬란한 중국 청년들의, 중국 여행의 꿈은, 어쩌면 세상의 구원일 수 있을 것이다.
낙양을 가고, 서안에 가고, 청해호를 가고, 다시 산동을 가는......
사람들이 죽을 때, 지내왔던 날들이, 광양의 중마동처럼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자동차와 지금의 도심 아스팔트 도로를 상상하면, 그것이 연상이 되지만, 도대체 얼마나 크고, 강건한 말을 타고, 얼마나 빨리 달려야, 그와 같은 풍경이 가능할는지......
연주곡은 이순신 장군의 나이에서는, 무서운 것이 된다. 그것은 진정, 중동이나 마동이 되기 때문이다.
중동 전쟁이나, 마동탁......
나이가 어렸을 때는, 그런 말이 우습다고 웃지만, 나이가 이순신 장군이 되는 사람들은, 다른 별다른 지식이 없기 때문에, 연주곡으로 흐르게 된다.
과연 이순신 장군이 삼국사기를 읽었을 때의 장소로, 바쇼로, 우리가 이를 수 있겠는가?
기둥은 이집트의 것이 유명하고, 페르세폴리스도 못지 않고, 아름답기로는 그리스의 것이 그렇게 아름답지만,
존재론은 뒤늦게 우리에게 지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너무 늦은 인식일 수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지각을, 깍지끼고, 얼차려를 선생에게 받을 때, 훗날 유명한 학자가 되고, 철학자가 꼭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국문학생 비스무레한 무역학과 학생이, 늦은 저녁 시간에, 인터넷에, 그런 말장난을 올리고, 사람들의 비난을 산 적이 있듯이, 나이가 들어서는, 그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지각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
저녁에 도서관에 가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것은 기생수 같은 매우 현란한 장면이다......
헤겔이 저녁에도 머리를 감던, 한국 더벅머리 총각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정말 모든 자연조건을 잘 만나, 그처럼 후회없는 철학자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도 물론 머리는 두 번 감을 수 있다. 거기까지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세상 법전이, 그런 마인드가, 오히려 하박국을 찬양하는 길에 빠질 수 있듯이, 우리의 존재론은, 오직 존재론으로, 나무가, 숲이, 사람처럼 걸을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구를 다만 기다려도, 때로는 그런 삶을 우리가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있을 보, 나무 수, 보수보다는, 우리는 분명, 한 나무 하나씩, 걷고, 서고, 생각하고, 걷고, 생각하고, 달빛을 맞이하고, 때로는 가르는, 달빛 가르기, 그런 진보적인 존재론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한의 중국 무협이고, 한국 청년의 화산에서의 표류기이고, 대게는 저녁에 불빛이 환한 학교, 어떤 교정을 상상하는 것이 바른 것일 것이다. 어째서 불빛이 켜져 있는 것일까? 그 남일대 해수욕장의, 어벤돈드 여관 건물 같은 모습일 것인가? 아니면, 서울 수유리 한신대학원에서 건너 보이는, 여중, 여고, 남고, 건물들의 모습일 것인가? 자하연의 서울대가, 못지 않다. 거의 모든 서울 소재 대학은, 저마다의 인문학적 죽음의 존재론을, 그와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다. 가능성이 없으면, 흥분하지 않는 편이다. 수중에 돈이 몇 백 만원이 있기 때문에, 인도 청년도, 가와사키 지구백에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각적인 십자가와 같다. 남의 죽음이 내 어깨에 건네준, 작은 생명 연장과 같다. 무역학과 친구를 두고 있는 신학생과 같다. 영화 노량에서, 수만 개의 화살이 서로 교차하듯이, 화약 화살이 솟구치고, 대포가 오가듯이, 모두가 성스러움을 가지고 있고, 초월을 가지고 있고, 어느 남녀가 마침내 섹스를 하기 시작해서, 이십사시간을 초월한다고 하면,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이십사지간이 모자라,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그리고 남자가 잘 입고, 여자가 잘 입은 것을, 서로가 박수치고, 적어도 옆에서 몇 명이서 박수치면, 그와 같은 존재론은 분명 알아보는 것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꽃구경의 물거품처럼, 가사 노래를 좋아하다가, 마침내 연주곡에 굴복하는 인간의 운명처럼, 사라지고 만다. 존재론이라는, 이순신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누군가 연주곡에 천의무봉을 달아줄 것이다 믿으면서, 우리는 그렇다면 옛날 그 전파사를 어린 시절의 눈으로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웠던 방송국 드라마들. 노래 가사들......
소레다케다......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는데
방언이 터지는.....
*
앞으로 우리는
진정 중국의 숲이
이와 같은 믿음의 존재론으로
가득할지를
상전벽해나
인해전술로
뒤덮일지를 예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존재론은 될 것 같고
내가 새로운 버전의
왕조현을 만날 것 같고
그와 같은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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