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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신사론: 인사불성

by 마음대로다 2024. 9. 3.

 

 

 

신사론: 인사불성

 

 

 

 

 

 

 

 

 

우리는 어떤 학생이 붉은색 에스티 세븐을 타고, 늘 고등학교 자기 학교에 등교하고, 하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 모습을 보면, 흡사, 대충 학교에서 시간을 때우고, 집에 가는 것이 초등학생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 여자들의 목소리가,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도, 아이 같은 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평가할 내용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라진다. 사하라. 그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가까운 전라도, 많은 공원에 갈 수도 있고, 그래도, 평지, 바다를 만나 사라지는 것보다는, 높이를 갖고, 높이를 향해,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 음악적 템포로도 좋을 것이다. 아이들이 기아 타이거즈의 경기를 보고 열광하고, 야자학습하면서, 숨죽이면서 그 같은 경기를 또 보는 것은, 듣는 것은, 대체 어떠한 인간의 원리 때문일 것인가? 그것의 야자수는, 진정, 인간의 모습, 인간의 진면목 같은 것이 있다. 열목어. 우리가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에 신사다움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하나는 천녀유혼. 다른 하나는 영웅본색. 영웅본색에는 벗는 연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 끝까지 나의 어떤 기대를 저바리고, 그런 것이었다. 다음으로 내 사촌형 같은 유덕화가 나와서, 영웅본색을 유덕화를 닮은 내 사촌형과 다른 또 한 사람과 봤었는데, 영화를 보러 가는 길도, 걸어서 시내까지, 그렇게 재밌었는데, 돌아오는 길도, 영화의 여운이 지워지지 않아서, 똑같이 우리는 문학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홍콩으로 가서, 이런저런 영화를 찍은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얼마나 명작이 많은가? 그것은 영웅본색적인 신사론에서, 열혈남아적인 청년론으로, 관심을 이격시키는 힘이 있었다. 하동군의 슬픈 브람스 심포니를 듣자면, 그것이 얼마나 높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는 그 시절로 쉽게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클러치를 반대로 조작하면, 울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구불구불한 길도, 자주 가게 되면, 사촌형과 자주 탔던 경운기의 모습처럼, 느리고 보다 안전하게 된다. 청년론에도 문제가 많지만, 신사론에도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이 자기를 어떻게 꾸며놓고, 학교를 빠져나가, 에스티 세븐으로 지리산의 이런저런 골짜기를 돈다고 쳐보자. 그리고 갑자기 남해에도 가고, 진주에도 가고, 그것은 다만 영화적인 것이다. 영화는 인간이 아니고, 다만 야한 영화는 사람 같을 수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야한 영화는, 인간보다 완전한 인간 같을 수 있다. 그러니까 얼마나, 기존의 영화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는지 모른다. 기존 영화는, 무조건 죽는 영화, 좌로도 죽고, 우로도 죽는, 일본이 그랬었는데, 일본이 세계를 몰라서 침략한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산길에서, 잘 모르는 사람의 삥은 뜯을 수 있어도, 왠지 아는 사람 같고, 정말 저 멀리 살던 친척 아무개라고 하면, 갑자기 마음의 채널을 바꾸지 않겠는가? 학교 친구라고 하면, 자기도 기억에, 미어켓, 학교를 다녔던 것 같으면, 브람스의 심포니 이상가라 할 것이다. 일본은 갑자기,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 되었다.

 

그래서 그것의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자기들이 다른 세계 세력, 사탄의 조종에 휘둘렸던 것이 아니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과거 전쟁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과 한국을 침략한 것은, 근대 이전에, 꾸준한 것이다 말하는 것도, 그렇게 말하는 발상 자체가 추파카브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경험은 우리들의 선경험이었을 뿐이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오면,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미국식 자본주의, 그것의 형식적 의미 같은 것을 배우는 것인가? 사회학과는 조선일보처럼 폐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승냥이가 되어 있다. 그것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느 대학에서 불문과와 노문과를 없앤다고 하는 것이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들은 졸업해서, 숙녀도 되지 못하고, 보기 좋은 원룸의 붙박이 장롱같이 되어 간다. 그래도 부모가 물려주신 재산으로 결혼을 하려고 하면, 우리는 붙박이 장롱이 걸어 간다 할 것이다.

 

일본이 초자연적인 양의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도, 그것들은 모두 붙박이 장롱이 되고, 자신들은 한국에서는 점점 사라지는 불문과나 노문과처럼 되어 갈 것이다. 불박이 장롱이 좋은 옷을 입지만, 비싼, 그것들은 대게 장롱 안에 있다.

 

그리고 무슨 롱샤, 중국 새우 요리를 함께 먹으면서, 신사 숙녀의 시간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의 변경에서, 시험을 보고, 스스로도 보고, 모르는 내용이 너무 많으면, 자기의 신사와 숙녀의 패권을 넘기게 된다.

 

한국의 거친 드라마의 진행이 그것과 쌍계하는 것이 있다.

 

늘 붉은 색 에스티 세븐을 타고 돌아다니기 좋아하던 소년이, 틈틈이 그래도 공부를 해서, 전남대 국문학과에 들어갔다고 치자. 아니면 부산대 철학과. 거기도 어떤 교수가 있었던 것으로, 막연히 기억하는데, 아니면 최신한 교수의 해석학 수업을 장학생으로 듣는다고 치자. 그러면 다시금 일본은

 

오이도 만화 영화를 찍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서울 부촌 골목에서, 누군가 비싼 자개장을 내놓자, 그것을 일본 사람이 에스엔엘에서 대단히 놀라워했던 것은,

 

모든 사에는 구사가 있지만, 동시에 신사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것이다.....

 

구시가지가 있고, 신시가지가 있는 것처럼

 

싸가지도 그렇다.

 

싸가지 없는 것. 그것은 신사도가 없는 것, 요하네스, 그런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