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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슬픈 불교적 유식

by 마음대로다 2024. 10. 22.

슬픈 불교적 유식

 

 

 

 

 

 

 

우리는 세 가지의 지옥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 하는 것처럼, 지옥을 아는 것이, 모든 썩어질 것들을 입는 것들의 근본, 그런 것을 아는 것인 것이다. 그런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참아내야 하고, 참고, 캔디, 또 참는, 그런 것인 것이다. 지옥을 아는 것은, 하나의 유행이 아니라, 영원한 유행이고, 우리가 교육의 백년지 대계를 꿈꾸고자 한다면, 헤겔처럼, 우리는 신건지, 혹은 동치미, 그것의 것과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청년이 되는 것이며, 성경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주자학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쇼팽의 슬픈 저녁, 비오는 날, 순연된 코리안 시리즈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경비원 신임교육 같은 것. 우리는 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 스님, 그런 것이 아니라, 초로의 경비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백번 김구가 예언한 내용일 것이다. 백번 김구는, 다만 해방된 조국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외로운 개인까지, 유관순처럼, 예언했는지 모른다. 나만 장군이 된다는 것은, 민족이 해방되고, 조국이 독립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꾸띠 에레츠. 사람들이 구찌, 여자들이 구찌 핸드백을 좋아한다는 것은, 해방신학보다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공칠 나를 사랑하는 스파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거기에는, 외로운, 불가능한, 그런 것들의 신학이 잘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은 영원히 대결한다. 그것은 신학생보다 강력하다. 우리가 유튜브를 발견하고, 쇼츠를 발견했을 때, 우리의 유식은 흔들렸다. 채연처럼 흔들렸다. 그것은 어쩌면 박혁거세와 같았다. 안다는 것. 그리고 거세하는 것. 무의식적인 한강처럼 도도한, 도저한, 그렇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는 것. 누군가의 이름 같은 안다싱. 아무렇게나 말해도, 그것은 쇼팽의 음계와 같아서, 저녁에는 더운 지역 사람들도, 가납할 수 있는 것이다. 충분히. 그러니 박혁거세는, 거제도처럼, 얼마나 어려운 이름인지 모른다. 우리는 해방신학을 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해, 해방신학이라는 것은, 독재도 되고, 가난도 되며, 제삼세계도 되고, 영혼도 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지식도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티 산업 같은 것.

 

케이시리즈, 코리안시리즈가 완전히 사탄에 의해 지배당했다고 해도, 그들은 그들을 응원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도울 수 있겠는가? 사탄에게 지배당한 나라에 봄이 올 수 있는가? 어쩌면 지금의 우리의 수준은, 그것을 부인하거나, 그것을 거절하거나, 그것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도식이고, 유식일 것이다. 밥은 하늘이다와 같은 유식이 있었다. 밥 먹다가 넘어올 뻔했었다. 그런 일은 일절 있을 수 없지만. 밥맛이 떨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지만. 그것의 재빠르고, 도저한, 도도한, 흐름이 또한 있기 때문이다. 울타리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갑자기 무게 중심이 흔들렸고,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사람의 힘에 의지하고자 하나, 그들도 모두 무너지게 되었다면, 그런 필름을 우리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보았고, 웃었기 때문에, 모든 말들이 그와 같은, 우스우나,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정리할 만한 힘이 없음으로 인해, 그리고 순수한 선동에 동의함으로 인해, 넘어갈 때가 많은 것이다. 우리도 넘어가고, 북한은 더이상 넘어갈 것이 없고, 북한군은 그래서, 남한으로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을 풀 방법이 없어서, 구토, 넘어간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단순한 언어의 지배는, 처음에는 유치했다가, 적당히 유식한 팔 뻗음이 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넘어가는, 유식 불교가 된다.

 

얼마나 선수들은, 디아스포라, 불쌍한가?

 

어떤 젊은이가 나이 먹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는, 나이가 없을 수 있고, 다만 뱀이었을 수 있다. 우리가 다국적 국가 군인들을 만날 수 있듯이, 그중에 하나 고르라고 하면, 대게가 미군을 고르지 않겠는가? 마찬가지이다. 젊음과 노인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앞으로 살 날이 많이 남은 젊음을 고를 것이다. 이미 가루가 된 상태에서, 어떠한 자기 버팀과 그것의 정신력과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 사탄이 그것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하면, 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작은, 아주 고작, 작은, 코딱지 만한 분쟁에서도, 과도한 젊음에 쏠리게 되어 있다. 사탄은 교육이 필요 없고, 그와 같은 촉매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조금만 벌침을 맞게 해도, 사람들이 존재에 주화입마 되듯이, 물론 아예 그런 논쟁이나, 꼬투리, 애국심 같은 것, 그런 것 조차 없는 것이면, 선선한 죽음을 택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나, 지금과 같은 혼탁하고, 신탁통치하는 기간에는, 조금도 그럴 수가 없다. 우리가 접하는 사건들은, 그런 젊은 세포를 이식받은 사람들의 군집을, 누군가 표시하는 내용들일 수가 있다. 우리는 뱀을 무시하지만, 뱀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고고학을 몰라서 그러하다. 누군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라마교적인 환생이라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 탁승이 나타나, 정신의 그와 같은 도가, 길 도 자, 긴 길 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촉촉한 것이, 초코칩 쿠키나, 초코파이 같은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한국 초코파이가 대 인기이기 때문에, 코브라가 알에서 깨어나, 존재하려고 서는 것을, 대단히 귀엽고, 우쭈쭈쭈하면서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뱀을 두려워하거나, 징그러워하는 것은, 아직, 뱀이 권력이나 금력을, 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아서 그렇다. 늙은 노파와도 젊은 청년은 결혼할 수 있다고 말했던 칼 맑스도, 엄밀히 말하면, 실상은 뱀사골을 뜻한 것이나, 그나마 엘로우 엠페러 같은, 이상한, 그런 황색 언론을 피한 것일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 같은. 대학을 나온다는 것은 뱀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대학을 나오지 않고, 대충 중졸이나, 고졸로 지낸다고 하는 것은, 공부를 등한시하고, 그렇다는 것은, 홍콩 공포 영화나 보다가, 백백교에 빠져, 뱀을 섬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배달 대행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무한하게 전도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을 지금, 우리 모두가, 즈사, 공동 경비 구역하고 있다.

 

지옥은 누구도 처음부터 창세기 신학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사탄은 세상에 대해 승리하고 있고, 우리는 다만 신현균을 필두로 해서,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절정의 쇼팽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지옥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것은 수학과 같다. 대학의 국문학과, 수학과, 지리학과, 그 수학과가 아니라, 수학이라는 소리이다. 그것은 소설가와 같다. 우리가 윤평중은 읽어도, 최성수, 풀잎 사랑, 우리가 최인훈이나, 최백호, 최인호, 소설가들을 보고, 우리가 노량진에서 공부할 때, 번쩍하면서, 뱀이 지나가는 것을 보는, 일종의 시각적 섬망상태라는 것은, 우리가 많이 허약해서이기도 하지만, 김종모, 모종의 사실이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도 소설을 보지 않는다. 내가 추운 겨울날, 장래에 뭐가 될지 모르는, 미운 중이병, 혹은 중삼명채, 그런 날에, 가난한 단칸 방에 왔더니, 벌써 자기들끼리, 식구들끼리, 맛있는 것을 먹고 은폐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어린 내가 울먹울먹하자, 닭도리탕을 따로 두고 있다가, 내놓는 것이다. 그것은 닭도리탕을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갑자기 사랑이 넘쳐서, 계속 울먹울먹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초겨울, 소설의 전부이다. 세상은 무엇인가? 크리스마스. 편지를 주고 받고, 윤동주, 그 중에 나의 여래장이 있을 것을 예감하고, 바삐 뛰어다니는, 구한말, 그리고 전쟁 이후의 서울 풍경, 마포 종점이 아닌가? 선술집? 교육은 받아야 하는데, 육영수, 구몬, 항상 우리는 그것이 어려운 것을 아는 것이다. 운동권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들을 책을 읽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못 읽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 당구 칠 돈은 꾸준히 흘렸던 것일 수 있다. 그것까지 우리는, 수학, 한강과, 지청천, 청계천, 계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죄의식, 조이 의식을 가지고,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의 이르는 병을 가지고, 당구를 쳤던 것이다. 당구장에서 나오면, 얼굴이, 도라에몽처럼, 다만 표현과 이야기 구성으로만, 누군가를 죽이는, 포장마차, 회전목마에만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드라마를, 멈출 수가 없다. 그것은 영원하고, 우리가 지능이 떨어지면, 다시 찾는, 누군가 뽀뽀를 하는데, 그렇게 프로선수처럼 하는 것이, 프로포플이라고 한다는데, 내가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이미 먼저 했는 사람도 우리들 중에는 분명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는 프로포플이 아니라고, 말 수를 미국 사람들처럼 줄이는. 우리는 그와 같은 정신병이 있을까 싶지만, 그것 말고는 따로 할 것이, 드라마에서 없는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는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지옥의 사신, 그런 것들을 보여준다. 말수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좋고 정다운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인데, 누군가 흑수저와 금수저로, 프로뽀뽀를 하는 것을 우리는 연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당구장에서 나오면, 우리는 빠져나오는 듯 하다가, 다시금 그와 같은 당구공이 되었었다. 그것을 가로지르는 유식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신학이었던 것이고, 문학, 그리고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길을 가지 못하는, 운명을 시험하는 수학이 되고, 풀지 못하는, 우리는 마침내, 그와 같은 인간 실험의 장을, 과연, 그것이 우리 사는 지구에 실재하는지,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적당히 정해진 길을 가는 문학 소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에게는 언제나 마땅한 부처님의 여래장이 앞에 있다. 그것은 화성 같고, 화음 같고, 단순하게 조작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빌리프. 그러니까, 그런 소년이 마침 있다면, 소녀에게는 덩달아서 믿음 같은, 빌리는 것이 생기게 된다. 빌립보서. 그것은 소년의 지배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녀 혼자 자율 주행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법의 성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수학은 그림자이다.

 

예수님은 그것의 숫자이다.

 

인간은 늘 파멸한다.

 

돈으로 유식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늘 언제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져온다.

 

 

 

*

 
 
눈싸움 같은
 
보리떡으로 맞히고
 
물고기 두 마리로
두들겨 패는.....

영광

 
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