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과 존재와 시간
내 동료와 아는 사람들이 화이트 헤드를 연구했던 것이 기억난다. 신학은 김경제라는, 김경재 교수님부터, 화이트 헤드를 공부하셨고, 내 친구 전철이 그것을 이어받아, 논문까지 쓰고, 거짐 한국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익산의 기차와 같고, 미륵사지 석탑과 같고, 그 옛날의 모습으로, 천사가, 웅크린 것과 같다. 그것은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고, 다만 기독교에 대해 천주교 같은 것일 것이다. 개신교에 비해, 천주교 같은 것일 것이다. 누군가 그런 비교를 하였는데, 항상 헤겔의 말은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비교급이 탁월한 것이 있다. 비교는, 슬픈 것이다. 내가 여학생들을 얼굴을 보지 않고 사귀었다고 하지만, 모아 놓고 보면, 다들 예뻤는 것은, 결과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듯이. 그것은 묵경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것은 철학이 필요 없다. 묵경은 누군가 누구를 향해, 대충 예쁘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이미 승기를 잡는다. 그리고 이 세상의 부처님의 손바닥을, 가볍게, 손오공처럼, 여의도처럼, 업사이드다운시킨다. 우리는 그와 같은 힘이 없다. 우리는 그와 같이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말에, 구체적인 성격을,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고, 시험에 준하는 엄격함을 갖지 못하고, 다른 데에서는 시험을 보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그와 같은 형식적인 의미와 룰, 그리고 상급 부대에 전출을 가는 행사를 치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삶을 사는 것이고, 남의 계단에 걸터앉는 것이며, 남이 그런 터미널에서 물건 좀 지켜봐달라고 하면, 그런 것은 잘하는 것으로, 이승과 저승의 길목에서 시간을 지내게 되는 것이다. 개신교는 즐거움에 대해 확신이 있고, 천주교는 엄격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비교급을 누군가 잘해놓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는, 그런 감각은, 코리안시리즈의 감각은 선명하게 갖게 된 것일 것이다. 옛날에는, 그런 것조차 없었고, 다만 마음속으로 그와 같은 진단은 갖는 것으로 있었다. 무엇이 먼저이겠는가? 즐거움에 대한 확신을 갖고, 트럼펫을 불고, 드럼을 치고, 그런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너무 야생마 같은 것이 될 것 같으니, 적당히 엄격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엄숙주의나, 경건주의 같은 것. 그러니 주체를 위해, 어떤 시간이 보탬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과격한, 선명한, 절벽 같은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주욱 하고, 어떤 윙슈트를 입고, 스카이 다이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개신교의 소년이 나아가면, 천주교의 신부가, 거기에 보탬이 되는 것. 개신교의 소년이 공부하다가, 천주교의 아퀴나스 강의가 귀에 들어오는 것. 그런 것에 무로부터의 창조가, 꽃이 피는 것이다. 개신교에게도 무의미한 인구수가 있듯이, 천주교에도 무의미한 인구수가 있다. 우리가 옛날 버려진 집터의, 식당 같은 곳을, 지붕도 무너진 곳을 들어가, 돌아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픈 것인가? 그것은 인구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떡을 좋아하는 것도, 다 같은 이유에서이다. 떡도 인구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닥에 버려져, 오랫동안 약해져, 밟으면, 밟기도 전에 금이 가는, 그런 우주의, 화성의 유물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타부타가 있대도, 떡은, 창억 떡집, 베들레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인구수는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예민함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그러나, 그와 같은 예민함으로 마땅히 읽을 책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것은 영혼이고, 그것은 피를 흘리는 영혼이며, 활활 타오르는 문학정신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와 같은 불을 갖고, 병만족이 있는 밀림을 진행할 수 없다. 그것은 헤겔이 말한 것이기도 하고, 헤겔이 말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며, 우리가 먼저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와 같은 즉자는 헤겔의 대자를 두루 경험한 다음에도, 우리의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기도 하다. 영원히.
서울의 청년들은, 저마다의 건물로 등장하고, 출근하고,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박진영,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떤, 그런 것을 행한다. 그것은 정신현상학이다. 정신현상학을 고른 다음에야, 정신은 바르게 현상이 된다. 그것은 굉장히 우스운 표현이다. 어떤 영화에, 진주라는 여자가, 진주에서 영화를 찍는 내용이 있는데, 정말 그와 같은 사단이다. 천주교 같은 여자가, 만화 같은 공간에서, 나와 함께 있다가, 내가 정신현상학으로, 도서관에서, 주화입마를 행하는데, 함께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구수와 같다. 바닥에 깨진 유리창과 같고, 그리고 기정떡, 그리고 숱한 떡집들과 같다. 라이스 케익. 케익도 마찬가지이다. 여자는 나를, 내가 정신현상학을 읽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 좋은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이수일도 좋아하고, 그것의 따뜻한 말씨, 학생이기에 가능한 모든 말들, 우리가 드라마로 아직도 선명하게 채굴하지 못한 것들, 그런 것들도 있고, 대놓고 정신현상학이라는 다이아몬드 반지도 있는 것이다. 심순애도 그런 것을 읽고 싶지만, 읽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인구수가 없다는 해괴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냥, 어떤 짜증 같은 자장면집. 우동 같은. 간자장이라고 하면, 그런 짜증을 지나치는 것 같으나, 유에프오 같은 계란 후라이를 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실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성경을 다 읽지 못하는 것도, 기독교인에게는, 크나큰 비밀이다. 신학생이나 다 읽을 수 있고, 옆에서, 교회에서, 크게 북을 치고, 꽹가리를 치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처럼, 남해에서, 노량대첩을 가져야만, 오직 다 읽는다는 일념으로만, 익산의 미륵사지 옛날 부서진 탑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는 일무소득인 것이다. 모범생이 있지 않는가? 얼마나 수학 문제를 잘 푸는 여학생들이 있는가? 피아노의 선율이, 철학적 문제나, 문장의 독해로 바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기가 막힌 인구수로서, 빗방울 몇 개를 어깨에 맞기도 하는 것이다. 여자는 내가 정신현상학을 읽기 때문에, 나와 사귀면, 자기도 정신현상학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과도한 인간관계의 미신을 가진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답다. 그것은 진정, 상상이 너무나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꿈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은 김일성이나. 아무튼 일성이라고 부르면서, 싸움을 싸웠던 코리아 탁구 영화에 그런 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정신현상학에는, 그와 같은 여자의 몫이 선명하지 않다. 어떤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도, 그렇게 문제시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은 다르다. 존재와 시간에는,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등장한다. 그것은 귀신과 같고, 귀신은 따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지,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지, 낙타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지, 그런 것이 있는 것이다. 남자는, 심지어는, 인서울 대학을 가지 않고, 삼류 한신대에 갔는데도, 철학과에 지망하여, 부서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해가 지고, 황혼이 물들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를 다니는데도, 역사학과, 아무런 역사학과, 그리고 영문학과생들조차, 존재와 시간을 읽을 수가 없다. 만일 영문학과생이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 주한영국대사가 헬기를 타고, 서울대학교를 방문해서, 둘이 함께 학교 외빈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용봉탑이 하늘을 난 적이 없는 것처럼, 그런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 스치는 인연 같은 것은 있다. 그것은 불교이며, 그것도 선명한 인구수인 것이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그 두 가지 책을 읽기에는, 너무 유식이 깊은 것이다. 헤겔의 말마따나, 형식적인 보편성이 너무 깊은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관심도 생기지 않고, 다만 끊임없이 인기에 영합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수원역에서,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때도, 저 사람은 정신현상학을 읽는다 하였다. 어떤 남녀가, 한신대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자리 근처의, 수원역 아래 쪽의, 병점 가는, 인구수의 길에서, 나 보라고, 뽀뽀를 뽀뽀를, 미친 것처럼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학생은 밤하늘의 별과 같은가?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도, 조금 어둡다는 이유로, 둘이 손을 잡고, 뽀뽀하고 웃고, 뽀뽀하고 웃고 하였다.
철학 공부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러나, 한신대학교에서는, 잘하면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턴가 세느 강이 맑아졌다. 황구지천이 시커멓게 흘렀는데, 그것이 수처리 시설 때문에, 대학 일 년 때부터,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것이 되었다.
억지로 읽는다는 것. 그리고 읽지 않는 것을 방조한다는 것. 그리고 억지로 읽는다는 것. 그리고 인구수처럼, 정신현상학을 이처럼 언급한다는 것. 한신대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것.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것. 다른 대학을 다니다가 한신대학교를 간다는 것. 나처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신대학교를 간다는 것.......
한신대학교......
나머지는 후회
.....
온통 양수경의 노래처럼
후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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