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민중문화이야기
생산성 혹은 생산력이라는 영국 제국주의
by 마음대로다
2025. 1. 1.
생산성 혹은 생산력이라는 영국 제국주의
나는 내가 사랑하는 누나가, 나와는 다른 우주를 가지기 시작할 무렵이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맨날 싸웠기 때문에,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늘 스위스 같은 영세 중립국 같았다. 그것은 곧, 그리고 먼 훗날 내 친구들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이 세상에 철학자는 헤겔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탄의 영역에 가깝다. 그것은 일종의 생산력이다. 생산성이다. 오직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만이, 가난한 나라도, 지금 마약으로 찌들고 있다는 미얀마 사람들도, 베네수엘라, 그리고 영원한 슬픔의 일본 사람들도, 철학이 가능하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이 인류에게 진실로 하고 싶었던 말인지 모른다. 모든 철학은 불통이지만, 그것은 논리학이지만, 때로는 의미가 온전하게 보전되고, 전달되는 것도, 진실로 가능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또한 논리학일 수 있다는 것. 그 단순한 말을, 고백을, 그렇게 장황한 말들로, 훗날 그것도 하나의 철학으로 받아들이는, 후대 철학자들의 쏘우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써냈는지 모른다. 모든 수학들. 내가 수학을 못해서, 결국 그것은 인류에게, 내게, 깊은 크레바스가 되었다. 누가 수학을 잘하고, 그들은 어떻게 수학을 잘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오직 아는 것은, 사탄에 대한, 사탄에 의한, 사탄을 위한, 그런 산타나, 사탄학 밖에 없다. 수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영원히 알 수 없는 머리를, 무시하거나,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만 칠팔십년대, 내가 영화와 안영화의 간화선처럼 살아갔다면, 비가 내리는 서울에서, 급하게 비를 피하기 위해 숨은, 어느 이층 오르는 골목 같은, 그것의 입구 같은 풍경일 것이다. 이층은 전당포일 수도 있고, 만화방이나, 다방, 당구장, 아니면 일반 사무실일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중학생 때에 경험했던 것이다. 그렇게 중학생 때의 경험이 지배적인, 우리 현대 옛날 사람들. 따뜻하고, 시골적인, 그러나 백제의 도시적인. 그런 것들이 살아 숨쉬는. 서울도 집중된 곳만 숨쉬기가 힘들지, 조금만 벗어나면, 공기가 아주 맑았던. 수학은 그렇게 대통령 영부인의 이름에 하나 달려 있었다. 육영수가, 국영수가 아닌 것은, 이육사를 저격하기 위해서일 것인가? 아니면, 국영수까지 하면, 너무 가혹한 비트겐슈타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스피노자의 에티카. 세상이 이런대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노래들이 나오면, 정태춘 박은옥, 그래도 좋은 노래가 나오면, 김광석, 사람들은 마치 중국 화산처럼, 혹은 황산처럼, 그렇게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교수와 철학이 없는, 다만 아름다운 한국 대학교. 만화책에 자주 나오는. 한국 대학교 출신. 그런 기업 만화 같은. 그것은 우리를 국영수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육영수로 만들었다. 그리고 기미. 기미가요가 아니라, 뭔가가 될 것 같은 기미도 있었다. 그러나 육영수는, 그런 기미를 저바리는 것도 같았다. 미얀마가 갑자기 마약국으로 퇴보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철학은 비틀즈에게나 파고드는 장어떼처럼, 결국은 비트겐슈타인이 될 뿐인 것도 같았던 것이다. 양어장의 두 개의 지붕이, 하나는 지금 사용되어도 좋을 만큼 튼튼했으나, 다른 하나는 완전히 파괴가 되어 있었다. 영남 사람들이 도리어 영어를 못하는 사단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기독교와 문학이 없었던 근대 국가 일본은, 갈수록 기이해지고 있었다. 기독교는 호남에 많았다. 호시노가 암살당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학은 영남에 없었다. 왜냐하면, 영남은 영문학을 하던지, 적어도 영어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사를 나오고, 경북대학교를 나오고, 영어를 공부해야 했다. 호남은 영어로 쓰인 각종 기계 카탈로그도 없고, 여수는 일종의 파견 영남 지역으로, 때로는 육영수가 지키고도 있었다. 호남은 그들 육영수 부부를 저격하기 위해서, 영어 공부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와 문학을, 그들을 질식시키기 위해서, 과메기로 말려죽이기 위해서 발전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파멸적이고, 소모적이며, 악마적인 무한 관계는, 생각 만해도 끔찍하고, 영남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자기 혀를 잘랐던 오대수처럼, 그것은 어쩌면 핏빛 칸 영화제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늘 그런 동양의 꼬붕들을 좋아한다. 그들이 금세 악마로 되는 것을 찬양하고, 암암리에 돈을 댄다.
일본에 돈을 댔던 사탄들은,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매우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블랙 핑크를 보면, 그들의 면면이, 매우 하얼빈처럼 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이등박문 같고, 때로는 동방박사 같다.
내가 한신대학교를 나오고,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을 입학하지 못한 이유가, 그런 이토 히로부미 때부터 있었던 것인지를, 그런 전 세계적인 문제라는 것을 이제는, 이제니,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실제로 하얼빈에는, 그런 말할 수 있는 내용들이 여럿 나온다.
*
어딘가에 나의 뱀이 있다.
나처럼 어렸을 때는, 이등박문을 죽일 만큼 총명했으나, 결국 나가르주나가 되어서, 오직 뱀이 될 때만이 총명함을, 마치 전깃불처럼 되찾는, 사막 깊은 곳의 기계와 의식처럼 되어버린 이이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어린아이 비슷한 존재를
알버트
영원히 동정한다.
우리는 만주 그 거대한 곳에다가 대학이라고
쓸 수 있고
또한 중용이라고
덧붙일 수 있다.
한참 나중인 주희가 그것을
쓴 것 같지는
이제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