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는 기쁜가? 괴로운가?
우리는 주자의 전도서를 읽을 때, 잠깐 기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잠실과 밤실, 잠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읽을 때, 약간은 신랄하고, 때로는 통쾌하고 그렇다. 사람들은 어려서, 기독교 국문학 시간에, 너무 국문학에 인 박히지 않는, 장로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정식으로 교장이나 교감, 적어도 선생님의 설교도 들을 수 있었고, 일선의 회사원들, 그들 간부들, 그리고 평범한 늙은 노병 같은 사원의 설교도 들을 수 있었다. 장로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워서,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늘 물을 틀면 나오는 설교처럼, 교회에 가서, 그것은 기독교의 전부, 서울의 수돗물과 같은 설교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재밌고, 때로는 얼른 예배 시간이 끝나고, 교회 친구들과 놀러 가기로 한 것이, 십자가 위로, 구름처럼 지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느 때는 기도도 재밌고, 룸싸롱이나 나이트클럽 기도 말고, 기도도 재밌다는 것은, 그것은 기독교의 강압도 아니고, 착취도 아니고, 그렇다고 믿음과 교양의 해묵은 범주적 대결에서, 믿음에만 속한 것도 아니었다. 믿음은 남녀 사귐이 어렵지만, 교양은 늘 남녀가 사귀기 때문에, 우리는 에라스무스, 포기하면서, 남녀 사귐의 교양을 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남녀 사귐이 없으면, 교양도 사라진다는 것인가? 인간은 너무 짧아서, 생이, 남녀 사귐이 사라지면, 교양도 사라지게 되어 있다. 만일 남녀 사귐이 없는데도, 교양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면, 그의 말과 행동, 가끔 쓰는 글은, 즉시 출간해도 될 정도로 반듯하고, 선이 살아있고 그럴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주노 변증법도 없이, 때로는 교양의 채널로도 공중을 횡횡하는, 숱한 사회인 장로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그렇게 잠언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구석이 있는 것이었다. 가장 눈에 선명했고, 가장 주변에 있던 주택가, 가로수, 골목, 큰길, 거기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태복음에 있었다.
그리고 전도서의 유에프오가 지날 때, 소년의 시기에, 거리를 지날 때, 나는 그 말들이 매우 가깝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티비가 우리에게 가깝지 않은가? 잠언은 전도서와 나란한 지혜문학이고, 그러나 전도서는 잠언의 가족이 없어도 진행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가족들이 자주 없었다. 생각해 보면, 고시원과 같았다. 생각은 전적인 공간을 요구하는 것일까? 티비도 혼자 보고. 그리고 교회에 가면, 늘 선명하게, 마태복음의 설교를 하였다.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의 설교를 하였다. 그와 같은 복음서가 부조리하거나, 불분명하거나, 믿음에 속해 있거나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선명하고, 장수하는 문건을, 마치 수돗물처럼, 틀고, 배우고, 했던 것일 수 있다.
인간의 현대사는 기독교의 부조리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태양과 같은 공자가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주자가가 없었다면, 기독교가 수돗물과 같았는지를 몰랐을 것이고, 가난한 주자가 없었다면, 공포의 공자가 드디어 발견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옥이 수많은 문어의 빨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문어는 사각형의 빨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고백일 수 있다.
서울에서 공부를 오래 하다 보면, 숱한 남녀 사귐의 교양에 힘쓸 수밖에 없고, 마침내 숱한 공포 속에서도 공부하고,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노아가 비둘기들을 날려 보냈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나뭇가지를 가지고 온 것일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도 바울의 감추어진 에라스무스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와 같은 방주 위에서, 그것은 중국, 그것은 방주, 사람들은 틈만 나면 굴원이 되는 것이다. 중국은 이 틈에도 굴원이 되고, 저 틈에도 굴원이 된다. 그것은 유럽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중국의 약점이기도 하다. 유럽 사람들이 비싸게 먹어준다고 해도, 그것이 중국의, 때로는 우리나라 음식의 강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굴원은 싸울 수 있다. 실은 그것이 정확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굴원처럼 머리 둘 곳이 없다.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이 방주 이야기의 마지막인데
콘퓨셔스
공자의 승리를 의미한다.
서양에서 학생들에게 공부만 시킨다면, 동양 학생들은 늘 중하위권을 맴돌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의미가, 심장하고, 매우 깊은 것이 된다.
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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