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이야기

누군가 태어나면서 대학원생이 있을까?

by 마음대로다 2025. 1. 19.

누군가 태어나면서 대학원생이 있을까?

 

 

 

 

 

서울은 흥미로운 데가 있다. 중국 홍미. 그것은 클래식의 깊은 향연 같은 것이다. 우리가 지방을, 우리들의 고향을 고향이라고 부르고, 서울을 교향이라고 부른다면, 도대체 누가, 심포니를 대체, 교향곡이라고 해석했는지 추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단순하게, 그냥, 고향이 그리운 마음에, 내 고향 남쪽바다, 눈에 보이는, 그런 수전증이나, 홈시크니스, 씨어터, 그런 것으로, 교향곡이라 해석했을 수 있다. 그것의 고흥은 그렇게 예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예리, 그렇게 예리하지 않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심포니는 심는다는 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도 농업중심국가에 대한 비전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플라톤도 심포지움이라는, 기라성과 같은 대화록을 남겼고, 후대의 학생들은 두고두고 그것을 읽고 있다. 그러나 심이나, 신은, 갈수록 미국 영국 여자 이름 신시아처럼, 다만 한국적인 방문객, 그리고 홈시크니스의 역전 현상 같은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심는다는 영어로 플랜트이다. 나무한다. 풀한다. 경작한다. 농업이나, 산업, 공장 같은 것을 우리는 심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표면적인 유대인. 심는다는 것은, 어떤 꼬불치는, 돈을 꼬불치거나, 사람을 꼬불치거나, 강수지가 언젠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묻어버렸다고 노래한 대목처럼, 그런 우리가 아픈 마음으로, 혼자만의 방에서 아이처럼, 웅크리고 자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우리는 클래식의 음악을 들을 때, 서양 음악, 일제 침탈은 저으기 아닐지라도, 그런 것으로 인지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많은 프로그램, 방송, 그리고 영화들이, 아이네 클라이네 그런 것으로 노력과 반복으로다가, 옛날보다는 부담감이나, 경계심이 사라진 것도 없지 않다. 그리고 쇼팽이나, 리스트, 슈만이나, 브람스를 보면, 약간 한국 사람 느낌이 나는 것도, 최근의 사태일 것이다. 우리가 대학원에 이르면, 사람은 항아리치마를 아름답게 입은 여자 동료와 같고, 혹은 일 년 선배, 다른 과 연구원, 그리고 남의 나라 교향곡이 드디어, 서울의 낮과 밤, 그리고 치열한 열 시와 열한 시, 오전의 그것의 햇빛, 그런 것으로 마치 미국나라의 유에프오처럼, 안타까운 미국어, 그렇게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없는 한화의 최진행. 그것의 오렌지빛 신비 같은 것. 내 가난한 누나가, 너무 가난해서 부자하고만 살 것 같았던 누나가, 개그맨 김경재보다는, 그나마 그렇게 가난한 것 같진 않아도, 이만기 같은 살아있는 사랑의 대상을 구하는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 

 

대학원은 드디어, 대학생 때도, 너무 달콤한 인간들의 비정상적인 연속을, 샌프란시스코, 버리고, 황산이나, 화산을 향할 것 같은, 검은 눈동자를 눈에 착장할 것 같은 분위기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십 년 넘게, 한국 땅에서, 한국 음식을 먹은 일본 군인은, 다만 자기들이 야만국을 어떻게 하려고 정복했다는 느낌을 조금도 가질 수 없었던 것과 의식이 매우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김창옥을 보면 너무 대견스러운 것이, 그것의 라디오 주파수, 랜선 연결 같은 것을 매우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급하게 발제를 준비할 수 있는데, 바깥에서 반독재 투쟁의 열기가 사라지지 않고, 그런 분위기이지만, 또한 연구를 멈출 수 없어서, 누군가 준비한 발제물을 그 옛날의 복사기로 세차게 돌리고 있는데, 그것의 제목은 이러한 것이다. 대학원생이 먼저인가? 아니면 헤겔이 먼저인가? 우리는 내용을 읽지 않고도, 발제물의 제목을 보고, 그것의 깊은 신경숙의 깊은 슬픔적인 간극을 들여다볼 수 있다. 당연히, 내용을 보지 않아도, 정식으로 연구 발표를 시작하지 않아도, 대학원생이 먼저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헤겔이 먼저다는 쏘우를 범할 때가 있고, 그것이 있기 때문에, 실은 이런 문제제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일 것이다. 김창옥은 그와 같은 대학원생이 먼저다는 진영의 대표주자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헤겔이 먼저다는 주장은 무엇인가? 대표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없다. 누구도, 아무것도, 조원선, 없다. 다만 그와 같은 대결의 흐름은 있다. 한일가왕전 후지티비 편 같은 것. 거기서 윤석열이 여자로 나와서, 다른 여자들과 함께, 스피드의 화이트 러브를 감동적으로 부른다고 해도, 격한 안무와 함께, 또한 옛날 학생 운동 같은, 그런 스피드, 그것은 조금도 트랜젠덴털한 것이 아닌 것이다. 자칫하면 다른 트랜에 빠질 수 있는 공산주의가 있다. 그마만큼, 대학원생이 먼저다는 김창옥의 진영이 탄탄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더 대단했는지, 나를 반성하고, 동시에 추앙하게 되는 것 같다. 

 

물리학을 해도, 대학원에 이르면, 드디어 항아리치마, 배바지, 그런 신성이 넘치는 옷을 입고 있는 여자 동료를 만나게 되고, 드디어 철학을 하게 된다. 모든 대학원이, 전문대학원이, 실은 철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존재의 겉모양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의 처음은 종묘의 웅장한 어떤 것처럼, 개인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밀란 쿤데라의 생각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연속하고, 지탱해 주는, 작품이 당시 서울의 대학원생들에게, 현숙한 여자 회사원들에게, 수녀들에게, 큰 히트를 쳤었다. 그리고 대학원에 이르지 못하는, 암모나이트류의 한국 소설들에게 나름 모범이 되고, 경종을 울리고, 정종을 주고, 그런 것을 했었다. 대학원에 이르러서야, 암모나이트에 빠지고, 그것에서 허우적거리게 되고, 암모나이트 대학원에서 기생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연구실을 강원도에, 혹은 제주도에 만들어서, 독립하고, 존재할 것인가? 갈등하게 된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다 훌륭하고, 존재이고, 사탄이 광명의 천사를 흉내 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절대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인 것이다. 대학원이라는 무대 위에서만이, 햄릿이 되고, 때로는 낫투비가 된다. 대학원에, 그런 곳에, 가족들이 방문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마치, 컨테이너 항구에서, 대형 선박, 현대, 머스크, 거기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서, 아내와 어린 아들 딸들이, 야드의 레인들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모습과 비슷한 것이다. 굉장히 인상적이고, 대학원생에게도, 가족이 가능하겠구나, 그리고 진정한 교수가 가능하겠구나, 그런 생각의 연속과,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물론, 구성체의 백 개 중에서, 백 개가 완벽한 암모나이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과 대학원은 무엇인가? 대학원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 태허, 허균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철학 교수는 김창옥처럼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