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의 연향동
우리는 우지 라면 같은, 국물의 우리는 그런 것 같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그런 모든 판단들의 근거가 되고, 포 이그젬풀이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영어는 처음에는 단 일 미리도, 그런 담배만 한 크기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타 들어가기 시작하면, 끝내, 종료 어학원되는 것이다. 파고다나, 조팝, 존네쉬름, 그런 것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성공적으로 잘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우리들을 돌아보면서, 영화 감시자들의 어떤 한국의 어학원의 매시브한 풍경들을 기억하자면, 사람들은 어학이라는 것을 도무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 한효주. 약간 멍청한 연장이, 꽃돼지 같은. 그래도 내게 피아노 소나타 근사한 것을, 사람 없는 카페에서 쳐주고는, 함께 케이티엑스 타고 부산에 놀러가자고 하면, 우리는 그 모든 존네쉬름을 놔두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 다시 힘을 내어, 영어 공성전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꼭 젊은 후배 한 명이 죽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영어 공부를, 순전히, 한국 롤코물로써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토익 시험 같은 것은 분명 그런 것들을 잡아주는, 알지 못할 삼각지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감당 못할 모습이었어도, 일정한 각도로 나와주겠다는 다짐을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롤코물이 실은, 다만 청년 학생의 각성제나, 안각성제, 그러니까 안각성제를 먹은 이에게, 각성제를 먹은 것에 대한, 안각성제의 질 들뢰즈의 주름 단계에 있게 되면, 지능을 보장할 수 없고, 도리어 도끼날만 날카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남의 도끼날이고, 자기가 믿고, 자기가 의지하는, 자기 자신의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그런 심란한 날의 십이십이 사태 같은, 그런 일을 저녁에 스스로 거행하기도 한다. 그것이 있으니까, 그것이 질 들뢰즈의 주름 서너 개 너머에서 엿보이니까, 실은 청년 학생들이 공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겉으로는, 늘 보는, 중국 오토바이 회사의 이름 같은, 늘 보는, 그런 오토바이 같지만, 롤코물로, 안각성제를 세 번 맞은 얼굴을 하고, 세상이 종료된 것 같은 곳의 어학원에 다니지만, 그래도 거기서 각성하고, 때로는 개방되며, 그리고 마침내 남원 광한루에서, 계몽되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목에 칼이 있다가, 춘향이도 아니었으나, 그것으로써 도리어 목검을 깎아 세상을 향해 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것 같지만, 다만 언어적 익숙함의 미망에 빠져, 미몽에 빠져, 다만 시간을 보내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그것을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 나름으로, 나르는, 하늘을 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나 언어에는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암 촘스키, 나쁜 것들도 있기 때문에, 일 미리의 단차를 주는 계단에 계속해서 넘어지는 사람들의 인터넷 쇼츠처럼, 계몽되지 않고, 배움의 진리와 기쁨이 아니라, 실력의 어중간함을 유지하는, 클래식이 아니라, 바로 그런 식의 전개에 눈을 뜰 수도 있는 것이다. 넘어지고, 안 넘어지고, 넘어지고, 안 넘어지고. 마침내 젊고 보다 나이 어린아이들에게는, 공포와 좌절을 주는, 이상한 외국 언어의 집장촌 같은. 겉으로는 롤코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대화하고, 계약하고. 그러나 하나하나의 차이가 심각한 테스티들에게는, 절망과 이상한 에스피씨 삼립빵 같은 상상을 주는.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일거에, 그것들 모두를 새로나온 우지 라면과 함께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택배 아저씨들이 그것을 빨리 가져다준다. 그것은 실로 장관이다. 그것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이 그렇지 않은 것은, 토익과, 파고다와, 그런 것들, 소나타를 기가 막히고 치고는, 부산으로, 해운대로, 저녁에, 아름다운 그대여, 해운대 호텔로 오라, 그런 것으로 다녀오는 것이 없는 것은, 학생들에게, 시민들에게, 그런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적이 노출되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니라, 적이 노출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두려울 수 있다. 삼겹의 안각성제에 빠진, 어학의 잠깐의 예비군 시가전 같은 것은, 때로는 드론의 비행 제한 고도보다도, 한없이 낮은 것이기 때문이다. 뜨기는 떴으나, 영원히.
우리가 옛날에, 어떤 시인의 시에 열광했던 것은, 그가 약간, 보들레르보다도, 엘리엇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으로 사용된 소재, 토익, 햄버거의 비닐 껍질 같은 것, 친구의 자취방에서, 혼자 있다가, 읽다가, 발견했던 것. 그것은 광양 컨테이너 항구에서 일하다 보면, 너무나 흔한 것이다. 그것이 시의 순결한 공간에 침입해 일어난, 시각적이고, 공감각적인 현상인데, 그러나, 그렇게 직접적이며, 종료 어학원적인 상태로 접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시학적으로도 즐거웠지만, 한국 학생적으로도, 그것은 납득이 되었던 것이다. 햄버거 씹다가, 포장지까지 씹어먹는, 어린아이의 발견 같은.
토익은 그런 한국 현대 도시의 경제적 동물들을 위한 향연으로 제작된 것일 수 있다.
최초의 검은 진흙을 지나, 미몽 상태이긴 해도, 걸어다닐 수 있는 영어 실력이라는 것은, 주변에 그런 학생 좀비들이 많으면, 특이할 것이 없고, 제천해수욕장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으나, 자기 자신에게서도, 시절이 지나고 나면,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생 어학은 걱정 없는 사람이 있고, 평생 어학은 생각도 않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창문에 끼인 여자가 제일 불쌍하다는 시적 주장처럼, 처음에는 토익 시험은 다만 예쁜 관심이 많이 가지는 않는 예쁜 여학생 같다가, 지금은 그에 관해서는 연락도 할 수 없는 독거노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토익은 그것을 검은 진흙처럼, 칼처럼, 숨기고 있다. 그것은 한국 연안에서 발견되는 옛날 배들과 같다. 사람은 죽으면, 컴퓨터가 되는데, 검시관이 컴퓨터를 조사하다가, 과거에 제법 영어 공부를 잘했던 것으로 분석이 되는 것이다. 그릇들이, 미적 가치는 없으나, 생활 그런 토익 같은 것은, 수만 점이 발견이 되는. 그것이 그렇게, 우리들,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사람들만 같다. 경상도도 토익, 껴주는.
우리 인간의 이성이란, 보편적이며 높은 수준의 언어 능력을 가진 도시를 상정한다. 고대의 경주. 그리고 무진주. 사비성. 개경. 진안. 무주. 나주 등등....
과연 지금의 걸그룹들이, 토익과의 전투를 마다하지 않고, 로얄 엔필드의 고환까지도 타고 들어가, 적의 심장을 손에 쥘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클래식의 연향동 안에서, 환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어가, 영원한 클래식 음악에 아첨하는 대지를 가지고 있다.
전 국토가 한국어를 향한, 전쟁 기지화되어 있다.
토익 시험을 못 보면, 형이상학적으로, 갑자기 익룡이 승천하는 어둡고 회색적인 하늘, 참담하고, 그래서 다만 한국어라도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듯이,
그런 한국인만 한국인이라면,
전국에 한 열 명이나 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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