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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중국과 일본의 공포

by 마음대로다 2025. 11. 19.

중국과 일본의 공포

 

 

 

 

 
 
 

 

 

 

우리는 중국이 개방하고, 그 유명한 개방, 그리고 일본으로 한국 사람들이 노다메 칸타빌레처럼 여행의 어떤 것이 넘칠 때, 나도 그만 분위기에 휩쓸려, 여행하고, 막 그럴 것으로 예상했었다. 나 자신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음은 태양과 같으나, 실상은 조금도 그렇지 못하는 것에서, 나도 공포를 느끼지만, 유엔 폴란드 할 것 없이, 나토, 그들도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 어째서 나는, 그런 여행에 대한 두려움, 아무튼 그런 것이 있는가?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서로가, 도대체, 왜, 무엇이, 우리를 심각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것인가? 그것에는 사연이 많다. 노사연. 진정 세상은 사연으로 이뤄져 있다. 영국 사람들이, 따뜻한 밥을 한 술 먹자마자, 그들의 밥이라는 이름의 근원을 깨우치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보면, 한국이 세상 모든 것들의 원천, 두려움의 원천인 것인가?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가설이나, 어떤 바람에 내리는 싸리눈 같은 것, 아니면 가정 같은 것, 가정식 백반 같은 것, 더울 때는 위력이 없으나, 추울 때는, 미국 사람들은 밥을 먹다가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반구는, 여름에. 고기 먹다가, 밥 먹다가, 죽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와 같은 뜨겁고, 달콤한, 밥과 같은 것인가? 산사태가 나서, 갇혀 죽게 되었는데, 스위스의 구조견이 나타나면, 그렇게 반갑다고 한다. 그것은 밥의 흰색도 마찬가지이다. 중국도. 일본도. 밥의 흰 색은, 씨더 디퍼런스,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흰 쌀 밥을 먹다가, 단도직입적으로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영화가 그렇다면, 중국이 낫고, 일본이 나으면, 한국의 정신적 우위가 사라질 수도 있지 않나 할 것이다. 바로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그런 것은 또다시 동양 삼국 사람들이 밥을 먹는 것처럼 흔해지고 만다. 그리고 국밥. 차가운 밥조차도, 새로 끓인 국밥 국 안에 들어가면, 다시금 새 삶을 찾고, 인생이 아주 뜨거운 것이 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만 수저를 사용한다는 원리로 보자면, 그것의 차이는 너무 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데피니션 같은 것. 맺고 끊는. 어째서 일본이나 중국은, 밥이 식을 정도로 많이 하지도 않고, 애착이 없는 것인가? 그것을 제외하는 흰색이라는 것이, 진정 신시어한 것인가?

 

음악은 만족할 수 있다. 음악은, 세상에 수많은 대연주가가 있는 것처럼, 음악은 어떠한 주제도, 만족도, 문장도, 최소한의 시집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이 밥만 있을 때는, 백의민족, 마치 한식 뷔페의 이름 같은 것으로만 있을 때는, 사람들이 축구의 에이매치, 그리고 해태와 기아 타이거즈의 코리안시리즈 우승에서 피날레를 맛보았다. 피날레는, 원래, 협박의 말이 아니라, 피난다의 걱정과 사랑의 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전라도 사람이, 상대를 겁줄 때, 쓰는 말처럼, 어미가 바뀌고 말았다. 너 피날레? 그것은 지금 네가 걱정이 많고, 근심, 피곤이 많고, 걷다가 넘어져서, 팔이나 다리에, 피가 난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세상에. 너 피날레. 그것은 그러나 꼭 사시미 칼이, 식목일날, 땅처럼 생긴 사람에게 심겨, 피가 나는 영화의 피날레처럼 어감이나 인상이 변하고 말았다. 성심당이 무서운 것도, 어쩌면 목포와 부산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중국 영화나, 일본 영화를 지금 관찰하고 있다. 한국 영화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중국 영화나 일본 영화 어느 하나를 극복하기 위해서, 의기투합하는, 그런 영화의 제작 같은 것이, 우리에게서 느껴지지 않는다. 일부러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나, 또한 한국 영화의 면면을 보자면, 박신양의 약속처럼, 그냥 최진실이 수목원을 걷다가, 관객들 모두를 슬픔으로 인도하는, 그런 피날레를 끝으로, 세상에 아무런 원한이나 아쉬움, 그런 것이 없는, 우리는 진정 대만족의 민족만 같은 것이다.

 

춥고, 예쁘고, 공기가 좋고, 밥을 함께 먹기도 하고, 혼자 먹기도 하는,

 

피날레.....

 

경주가 중국이나 일본에 있지 않고, 드디어 한국 경주에 경주가 있는 것이, 있게 된 것이 그렇게 슬프고 그렇다. 밥을 많이 먹고, 젓가락을 잘 쓰고, 일본이나 중국처럼, 그러다가 한국 사람들처럼, 뜨거운 국밥 안에서, 차갑고 뻣뻣해진 흰 밥이 다시금 따뜻해지는 메시지를 우리가, 그러나 그렇게 모든 것의 증거요, 보이는 것의 증거들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항상 시간이 걸린다. 노트북이 누룽지 같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잘 긁으면, 접을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노트북을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이 못 쓰고, 그들에게는 못 쓸 놈이라는 저주가 담기게 되고, 오직 한국 사람들만, 게이밍 노트북처럼, 게이들이 되어서, 노트북을 쓴다는 것이 아니다. 노트북을 쓸 때만이, 우리는 탑에 오를 수 있다. 그것은 선거와 같다. 겨울에 선거를 하는데, 지구의 모든 대지가 후보자이고, 숲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이 우리들의 투표라고 한다면, 대체 누가 당선되었다는 것이겠는가? 대게 고작해야 두 사람이, 마지막 결선 토론을 하게 된다. 세계 정치학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삶의 길을 걷다가, 사회와 간주관적 상태가 되고, 마침내 주관에서부터, 객관으로 점프를 해야만 인류의 정치학이 증명이 되는 것이다. 정외과 같은 것. 외교는 그냥 같이 있다 보니, 정치학이 사라지면, 외교학도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석가탑은, 사람들이 모래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 것이 있다. 그래서 그 안에, 인간이 있는지, 모래가 있는지, 끝끝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보탑은, 마침내 그 계단으로 모든 모래들이 쏟아져 나온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흰 쌀 밥을 먹고, 다보탑을 보자면, 그렇게 눈물이 한강처럼, 사탄 탱고처럼, 따라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일본은 좋은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을 능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옛날 홍콩을 보면서, 기억하면서, 마치 우리들의 고향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박신양 최진실의 약속도, 지금 보면 약간 이상한 데가 있다.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