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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영문학의 변칙적인 회전중심으로서의 나 아닌 다른 사람일지라도 한국......

by 마음대로다 2012. 8. 23.

영문학의 변칙적인 회전중심으로서의 나 아닌 다른 사람일지라도 한국......

 

 

 

 

 

 

 

 

해운대 연인들이나 아랑사또전을 가리키는 것이냐. 이렇게 단순하게도, 어제 닥치고 패밀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생각이 메카를 회전하는 이슬람 신도와 같은 영문학을 지나, 메카 안으로 진입하는 듯 했다. 물론, 아주 단순한 것을 두고, 너무 우리 사는 모든 문화적 한 현상처럼 지나친 상찬이 아닌가 할 것이다. 오늘 나는 그렇고 싶다. 그것은 모델하우스. 나는 모델하우스를 지날 때마다, 어째서 저것은 내 집이 아니되는가 했다. 주차장도 널직하고, 사람들의 꿈은 한이 없다. 그리고 앙드레가뇽의 음악처럼, 금세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고 보면, 또한 금방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덩그라니. 이것은 이수영 노래 제목. 냉택없이, 이것은 전라도 사투리, 그것도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나의 형이상학적 운동을 응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의 영향이겠는가? 듀카티즘. 로보캅 원에서 나타난 세계관의 바닥치기처럼, 폴리탄 누군가의 창의성이 밀키웨이처럼 흘렀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만일 심은하와 결혼했으면, 반드시 디퍼랑스했을 것이다. 심은 할트. 은하는 밀키웨이. 할트 밀키웨이라고 말이다. 너무 발음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지금의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하트. 하트 밀키웨이. 그리고는 이니셜만 따서, 에이치, 그리고 엠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녀는, 엠, 미니시리즈, 국문학의 삼대 거두로서, 그 시절 드라마에 너무 의존했던 잘못이 있었다. 나는 둘이 만나는 가상 공간에서, 이렇게 예언했을 지도 모른다. 에이치 엠. 그러면 심은하는 독특한 연탄가스 눈물 목소리로다가, 예? 했을 것이고, 나는 에이치 엠 그렇게 부르기보다는 흐. 므. 부르자고 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부르는 일은 없으니까, 내가 그냥 부르면 될 일이지만, 국민투표로써 한 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저마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반드시 조선의 위로가 아니더라도, 아름답고, 전우주까지는 아닐지라도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그녀는 흐므라고 부르는 것이 싫다고 하겠지만, 그녀가 싫은 것은 나도 싫기 때문에, 한 두 번 정도 부르고는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예언이 지금은 맞아떨어지고 있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방정식. 수학정석을 펼치는데, 그것의 점입가경, 마치 생각의 유학자로 꼬드기는 듯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소설 제목이 종이위에 펼쳐진 스팸 한 조각처럼. 내가 흐므라고 불러서, 지금 우리는 희미해지거나, 흐물흐물해지거나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기호가, 그것을 다만 짧은 시간에 다보게 하는 것일 것이다. 어제의 닥치고 패밀리는 흐므의 흐므가 아님을 보는 듯 했다. 출신은 분명 흐므이나, 그것의 영원한 디터미니즘 인 리터러쳐, 그러나 현미나, 갑자기 아랑사또전을 능가하는....... 무슨무슨 콰트릿 트리플점프, 좀더 우리 가까이로서 설명하면, 아직도 팬이 그림자처럼 많은 샤크라를 넘어선 카라......

 

세 아이들은 공터에서 자기들의 에이도스와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아이는 넘치는 사랑을 짜증스러워하고, 새 엄마를 얻은 주인공 아이는 아직 자기에게 없는 것일지라도 사랑을 확신한다. 그때, 그에게 황신혜가 나타나는 것이다. 국문학과 학생들은 잘 적을 것이다. 우리의 심리는. 심즉리는, 옅으고...... 아무튼...... 두 아이는 그 이전에 새 엄마를 조심하라고 한다. 신문 사회면을 보면 어린아이들을 학대하는 소식을 종종 접할 수가 있다고 한다. 주인공 꼬마 이름이 막봉이인데, 자기 엄마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논증이나, 또다른 보고가 필요한 게 아니다. 현실이 불어닥치고, 밀어닥치고, 꼼짝 없이 다른 사람들이 받는 만큼 학대를 받아도, 그 목소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막봉이는 아이들이 먹으려다 만 도시락을 가리키면서, 자기도 뽀로로 도시락을 해달라고 한다. 참 새 엄마인 황신혜는 해주겠다고 한다. 그것은 아지랑이 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시차는 비행기를 타고 동서양을 분주하게 오가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옛날에 다들 지극한 선인이었는데, 지금은 높은 경쟁과 상호간의 인정이 반대급부로다가 사람들을 선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극중에 선 보인 어린아이는 그보다 더 나아간다. 우리는 영문학의 눈물을 바로 여기서 본다.

 

 

 

 

 

미하일 바흐친은 인터텍스튜얼러티. 텍스트 상호간의 해석학적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자끄 데리다는, 언어 바깥에 존재는 없다고 했다. 먼저는 텍스트를 펼치려다가 마는 경우를 계산에 넣지 않았고, 황재의 불나비 시리즈 같은, 후자는 아주 단순하게는 섹스도 언어인가 하는 것이고, 물건을 사는 경우와 못사는 경우는 핵심 형식이자 존재요 모든 것의 가치인 언어에 비추어 어디쯤에 있는 사태인지 반성이 없다. 우리는 황재의 불나비 시리즈를 보다가, 반쯤 잠이 들고, 흐므가 나타나 남몰래 섹스를 하고, 내 앞에 지티천 스포츠 클래식이 생기는 것의 파노라마틱 비씨씨튜드를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현실이기보다는 영화적이다. 아주 잘사는 집의 영화이다. 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 우리는 유럽의 모든 개별 국가들의 부정성들을 상상할 수 있다. 독일철학을 잘하는 이태리 학생. 영문학을 잘하는 프랑스 청년. 스페인 여행을 좋아하는 독일 처녀. 이집트와 스위스를 번갈아 가면서, 냉온목욕을 즐기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대학교 다니는 부잣집 학생. 아니 보다 더 세련된 것으로다가. 지금 문장으로는 묘하게 되지 않지만. 그러니 우리가 많은, 아주 많은 미국과 유럽 영화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책상 서랍에서 꺼내보는 여러 재밌는 것들의 거리와 영향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블루니, 레드니, 하는 것들만 보아도, 그것은 마치, 한국 사람이 프랑스 학교에 다시 가서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처럼 보인다. 자기가 프랑스 사람이니만큼,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 프로페셔널이 된 것처럼,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부정적인 계기, 선선한 꽃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러나, 얼마나 어려운 하박국 같은 것인가? 시니피에는 유럽의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이 가능성을 연출하나, 잠식 당하고, 불안이 영혼을, 데리다의 글들이 볼륨 상으로 영문학의 아무런 소설책보다 저스티스 면에서 낫다고 여겨지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민중적이지도 당연히 않는다. 그의 글이 세계 인민들이나 내게서도 사랑을 받는 것은, 시니피에가 너무나 어렵고 거의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라깡이 시니피에를 영문학에 적극적인 종속성으로 보았다면, 데리다는 가장 많이 프랑스를 사랑한 사람으로서, 그의 스승은 데카르트나 플로베르 프루스트가 전부이고, 데카르트 한 사람 뿐이면서도, 한 사람의 스승이 있어도, 나는 나의 가난한 아파트에서 유일한 시니피에의 철학을 행할 수 있다면서 너무나 불쌍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도, 현대 프랑스 철학은 나름대로 철학 중에 철학이 되었다. 고전이 광주라면, 그들의 것은 어쩌면 뒤늦게 서울특별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러나 데리다 철학이나, 프랑스 현대 철학을 이어받은 문학이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그들은 에펠탑을 달성한 것이 아니요, 그들이 문학이다는 주장을 한다면, 영문학이 철학이다는 말보다 쓸모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프랑스 소설도 영어로 번역하면, 영문학이 된다. 그것의 프라이오리티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거기서부터는 아무런 땅도, 다리도 놓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