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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딱딱하다는 것의 크낙새 혹은 딱따구리의 결혼현상학.......

by 마음대로다 2015. 7. 8.

딱딱하다는 것의 크낙새 혹은 딱따구리의 결혼현상학.......

 

 

 

 

 

 

 

 

 

 

 

 

사람들은 팜플렛, 트렘펫 소리 한 음만 들어도 좋아할 수 있다. 자연적인 바이브레이션, 혹은 정말이지 우연적인 하모니가 가능할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소리 하나에도, 미국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 슬픔이 목구멍에까지 차오르는 것일까? 차력. 그것은 보석일까? 차보라이트. 보석 이름에 그런 것이 있다. 차력하고, 차보라는 권유의 플러스 함수인 것 같다. 인간의 정신은, 그것의 소재와, 노동과, 음표를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미군이 적군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는 것일까? 미군들은 그 지상에서 영원으로, 다만 그 한 소절을 듣고만서도, 미군이 지구상에서 적군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것일까? 자각할 수 있는 것일까? 차보라이트. 호은 자갈을 손으로 깨는 차력.

 

일동 차력. 하니까, 연병장에서 대대원들이 저마다 차력을 벌이는.....

문화부 장관......

 

딱딱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뼈는 골이 흙에 파묻혀, 가장 주변의 딱딱함과 결합되어 있다. 인간이 흙을 파기 좋아하는 것은, 그리고 채소를 키우기 좋아하는 것은, 그것들이 금방 파지고, 캐내지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이란 대게, 딱딱함과 부드러움의 하모니이다. 노동이 냄새가 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전부이다. 대게의 노동이란, 딱딱함의 하나님의 제국주의에서 살다가, 허구한 날 부드러움을 찾는 정력방계 삼십육조에 의거, 내려가는 하염없는 계단을 걷는 것이다. 얼마나 전두환과 이순자는 딱딱했나? 학생 운동권과, 당시 지성들은 전두환을 의지했던 것일까? 전두환은 지리산에 올라. 내가 악역을 맡을 것이다 외친 밀림의 왕자 사자처럼 연상이 된다. 악역이란, 여자와 아기의 자연적인 악역으로부터,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키는 창구 같은 것이다. 삽십육번 창구에서는, 예치하는 물건이 볼품이 없어도, 늘 삼백만원 이상씩을 대출해준다. 갚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 이상을 갚는 사람도 있다. 일종의 워터프론트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근대화 민주화 글로벌화의 핵심 창구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것까지 함수 푸는 사람은 본 적이 없고, 풀 수 있는 슈퍼맨 원투쓰리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슈퍼맨을 누나들과 보았다. 지금 보면 해골처럼 보이는 여주인공이 그때는 예쁘게만 보였고, 미국 사람들은 다들 클락처럼 키도 크고, 공부도 아이비리그, 소뼈를 삶은 물을 먹어가면서 많이도 하고, 기라성 같은, 우후죽순 같은 빌딩 숲에서, 커피도 마시고, 카푸치노, 복잡한 영자신문사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의 에머네이션. 가당키나 한 것일까? 우리는 그러니까, 슈퍼맨을 본 것이다. 독일어로 위버멘쉐.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자기들도 슈퍼맨을 보았다고. 그러니까 내 말이 그것인 것이다. 슈퍼맨. 우리는 슈퍼맨을 본 것이다. 악역을 맡은 사람이 있고, 학생 운동이 여자와 아기의 자연적인 악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참악, 사회악, 어떤 근사한 악을 두고 마음껏 정신의 질주를 감행하고,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형장의 이슬람. 이런 표현은 너무 참이슬, 과하다고 한다면, 그래서 별로 딱딱한 관념도 없이 민주진형, 현진형고, 진보진영에 있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머니 역할을 해주던 것들. 문장을 너무 쓰다보니까, 정리가 되지 않는데. 아무튼 슈퍼맨은 지금 보아도 슈퍼맨처럼 보이는 엑셀값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나이아가라 씬. 그와 같은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간극을 채우는 것은 사람들의 슬픔 뿐일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떨어지는 눈물처럼. 쏟아지는 슬픔처럼. 세계 여행의 한국 시인. 남나리씨가, 이것은 문예비평도 아니고, 서정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풍자시도 아닌 것으로다가 창비에 발표를 했는데, 나이아가라는 쏟아지는 슬픔처럼. 한국 사람들에게 반향이 있었고, 나이아가라 근처의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낸. 그것의 고통스러운 인터내셔널의 양자물리학. Alison Balsom, Paris. 그의 말에는 고양이도 나오지 않고, 알프레드 프르푸록, 꿩의 놀라는 모습도 없고, 에더라이즈드, 고양이가 마취총에 맞아 누워 있는 모습도 나오지 않는다. 슈퍼맨처럼 건강하고, 돈도 있고, 여자 주인공처럼 무인도에 한 사람으로서의, 일종의 추장적인, 추신수, 자연법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그래서 가볍게, 기자들의 사회적 기포 형식의 뇌구조를 꿩의 얼굴 모습처럼 묘사하여서, 클락의 모습을 포토샵처럼 대입시켰는데, 한번 읽은 사람이 정식 구입하고, 만화처럼 친구에게 선물하고, 삽화도 조금 있어서, 비판에 맛을 들인 사람이 칭찬하고, 자국에서는 더이상 시인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비탄에 잠긴 미국 동부 사람들에게서 얼굴도 들고 눈도 들어서 하늘 보는 듯한 감격을, 일종의 문화적 현상으로까지, 일으킨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만든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본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즐겼던 것일까? 슈퍼맨. 원투쓰리.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트랜스포머가 시카고를 부수면서 서로 싸웠던 마지막 장면. 미국에도 가을이 있다는 호소. 미국에도 읽을 책이 없어도 천고마비가 생긴다는 의식의 현상학. 누군가 한국 엔테 프로그램에서, 이마에 꿀밤을 주니까, 맞고는 좋아하는? 웃는? 아무도 카메라 바깥으로 엑소더스를 시도하지 않는, 공동체의 깊은 문장으로서의 자각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

 

 

주자의 방구 소리는 팜플렛, 트럼펫,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그노시엔느 같고,

기자들의 방구 소리는

 

말.을.말.자........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이 기자 영화를 찍은 것도 아니다.

 

 

 

 

 

 

필름과 기자재를 갖다 줘봤자,

하지 못한 것들의 연장으로 마침내 합성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