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인사이드(2015)가 갖는 국문학적 회기역.......
서양의 예술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솔직하고, 오늘도, 내일도, 심지어는 백년 전에도 솔직한 것을 요구한다. 도저히 그런 식으로는 우리는 살 수도 없고, 서양인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런 서양의 학문적 예술적 모범을 갖고 절차탁마, 모든 학생들은 도전하고, 시련을 걷고, 적당히 유학을 떠나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처럼, 이것은 나의 떡이다 떡 같은 것을 서로 집어먹는다. 일본은 그것의 증거이다. 휴우케. 그런 일단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은 시도조차 안하고, 지금까지 오직 무술로만 그것의 매개를 절대적으로 채워왔다. 도전에서 실패한 것도 우리에게는 소중하고, 무술도 우리에게는 소중하다. 자세히 보면 뷰티인사이드에 무술이 나온다? 그것은 어벤져스 투가 휩쓸고 간 서울의 풍경과도 같다. 사람들은 야유를 보낼 것이다. 그럴려면 차라리 바나나우유를 다오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얼마나, 별로 나오지 않는다는 서울 장면이, 감독이건, 시나리오 작가건, 배우들의 집단 무의식이건,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이 까질 때까지 차가운 돌벽을 문지른 것 같았는지 모른다. 사실 홍콩 영화만 하더라도, 헐리우드와 쌍벽을 이루었다. 우리는 미국이 잘 사니까, 당연히 헐리우드가 이긴 것으로 여겼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헐리우드 이데아주의자들, 그러니까 표현을 한 다음에 늘 잔챙이, 피라미들이 되는 것들은, 홍콩 영화가 무섭고, 오우삼, 주윤발, 이연걸 등이 두려웠다. 헐리우드에 가서 볼품이 없어지는 것을 두고, 문명의 모나드의 승리의 쾌감을 느껴야할지, 아니면 그들이 페이크를 하는 것인지를 판단하지 못했다. 유럽은 영화 자체를 만들지 못하는 토지 같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늘에 성층권이 있는 것처럼, 유럽적 정신의 고향인 한국에서, 가위사르의 것은 가위사르에게로, 가위사르를 찬양하는 팔월 풍속과도 같은, 일렬진 현상들인 것이다. 우리는 성층권에 있고 싶어 한다. 그 하늘은 빛으로 가득차 있을 것 같다. 어둠은 없고, 어둠이래봤자, 구름만 있을 것 같고, 구름마저도 어느 것은 먹을 것처럼 여겨지고, 어느 것은 침대, 어느 것은 탁자, 구름으로 만들어진 의자, 오직 그런 것처럼만 심상정이 된다. 사람들이 배구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동양에도 장신이 있어서, 외국 장신들과 서로 자웅을 겨루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층권이 갖는, 모든 문학과 예술의 원형적 공간 때문이다. 사람은 성만이 오래가지 않는다. 항상 오래가는 것이긴 하지만, 은행 나무를 아름들이, 가을에 정통으로 보고 나면 평생 그것을 잊지 못한다. 그것이 잠을 자고 나면 얼굴이 변해서, 한 여자를 사랑한 나머지, 삼일 동안을 잠을 자지 못한 남자의 경우와 어떻게 다르겠는가? 성이 좀더 끈질기고, 끈덕지긴 하지만, 만일 철저히 성을 구속하는 반대법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가끔은 그와 같은 풍경으로 휴거가 되고 싶은 것이 또하나의 인간의 심리인 것이다.
어느새 소녀가 대학을 간다. 아버지는 워낙에 가족으로부터 명왕성까지 가 있고, 어머니는 이런저런 모임에 빠져 있고, 오빠는 스타크레프트에서 나오질 못하고 있다. 취직도 하고, 야구도 보러 다니고, 오빠는 여자 친구가 몇 명은 된다. 그래서 남이 걱정하는 것처럼, 소녀가 대학생이 되어 제법 어려운 책들을 읽고 있는 것이 드디어 눈에 띠는 것이다. 그곳은 온통 개똥밭이다. 누군가 철학을 개똥철학이라고 했다. 좀더 질과 내용, 구성과 수준 등을 가리키는 말로 적당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견유학파도 있어서도, 그것의 붙임성에 대해 어떠한 철학과 학생들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혹한 것이다. 성경에 개가 나오기도 한다. 개가 정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항변하면서 하는 말로써, 자기들을 가리켜 했던 이름이요 존재의 제시였던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개싸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남자들은 시력이 좋고, 체력이 좋고, 언덕과 계단을 구미호처럼 뛰어 넘고 다닌다. 밥을 두 그릇씩 먹고, 심포지움에서처럼 날을 새면서까지 술을 마신다. 그만한 어려운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의 용량이 그 정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정신이 개별적 유물론에서, 관념론으로, 남자 여자 구분이 없는 천상지희로 나아가야 하는데, 프로이트의 전작도 남자들은 안읽는 것 같더니, 가을이 되니, 벌써 세 권째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회의주의자처럼, 다 같은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효주가 짜증을 내면서 어떻게 책들이 다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한다. 남자는 요모조모, 읽은 내용들을 피력하고, 공중에서, 성층권에서 가져온 듯한 유식을 갖고, 그것들을 임기응변일지라도, 잘 꿰는 것이다.
한효주는 핵배낭을 맨 것처럼, 싸우기 시작한다. 모든 털과 가지는 정신의 증거이다. 내게서 배운 것을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남자이지만, 여자의 편에 선 신비로운 존재로 상정하는 것이다. 남자도 수업 시간에 손을 든다. 그런 대학 수업이 있을까도 싶지만. 한효주도 손을 든다. 그리고 터널을 고속으로 들어가서, 시속 이백을 넘긴다. 문학적 과장, 영화적 특수효과로서, 그것의 실재는 죽음일지라도.
한효주는 남자와 잘 수 있었다. 지금의 대학은 신비로운 토성과도 같다. 대게의 의식이 없는 남자나 여자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어떠한 성리학적 관성에서 표현으로 드러나는 것인지를 모른다.
수업은 갈수록 지루해지고, 지지부진해진다.
처음에는 우리 국문학이 사조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면, 미래파 같은 것. 담수파 같은 것. 수묵담채적 노벨레 같은 것이 탄생할 줄로 알았다. 그러나 살다보니, 생존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런 말은 많이 들었지 않은가? 새로운 것을 창조경제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경제가 처음부터 기저였고, 그것은 엄청난 바닥의 철판으로 끝을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늙어가고, 죽어간다. 그 사이에서는 변해가는 것들이 있다.
문예사조는 한 십년 정도 되고, 좋은 것은 삼십년도 간다. 만들지 않았고, 다만 상상으로만 섹스하고, 임신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온톨로기를 갖고 있다. 유사 문예사조를 만드는 것도 눈물나는 작업인데, 누군가 영화처럼, 아무도 평론적인 대상으로 놓을 수 없는 존재론적 시학을 발휘하면, 자기는 그만 찢어지게 가난한 여자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백제와 산부인과.......
사진 협찬에 감사드립니다.
*영화가 실제 목공소처럼, 여배우처럼 너무나 아름답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0) | 2015.09.20 |
---|---|
진보와 가보의 차이가 이처럼 현격한데, (0) | 2015.08.31 |
포토샵에 독특한 철학이 있을까? (0) | 2015.08.25 |
인간에게는 보석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슬픔이다....... (0) | 2015.08.18 |
미스 와이프(2015)가 갖는 인류 소망과 기쁨의 과학적 이념에 관하여........ (0) | 2015.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