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드레드(dredd, 2012)와 산파술적 파스의 길항관계에 관하여
우리는 많은 신비한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은,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도모다치, 만토바니, 몬테네그로이다. 안토니오. 뭔 말인지 알지 않은가? 안토니오. 안토니오. 그것의 이딸리안식 발음. 언덕이 야트마하게 겹치는 곳에서 늙도록 어디 다친 구석이 없는 일본 천왕과 같은 얼굴과 키의 노인이 젊은 안토니오를 부르는 소리. 안토니오는 이름이 안토니오이다. 토니오 트레거. 우리는 많은 신비한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너무나 발쉽게 우리 자신의 정체와 테리토리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비롯하고 기인한 것,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거나 향항하는 것. 우리의 주변을 그림 그리고, 우체부와도 친하게 지내는 풍경. 우체부 아저씨가 자전거도 좋아하고, 시절이 지나 씨티도 좋아한다면, 나는 작은 다마스마저도 그렇게까지 일본풍이라던지, 현대적인 일본 태평양 연안의 바닷가 풍경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앙드레 가뇽. 어째서, 어째서 앙드레 가뇽이었을까? 키치. 그렇다. 숱한 음담과 양담, 질투와 작전적 미스, 처녀지, 처녀비행, 처녀들을 놀래키는 무수한 단어들을 볼 때, 선생이 한 명 있다는 것과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가족들의 가족유사성과 보편화용에 걸쳐 무드포럽을 상실하게 하는지, 우리는 모르나 코스모폴리탄들은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혹은 숱한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존재론적으로, 크리스마스 트리. 시가지 한복판에서의 관권선거적인 점등식, 돈을 조금 들여서 오대수와 친구로 지내는 부산 앞 바다의 달동네에 같은, 달동네에서, 그러니까 거기도 좋고, 비슷한 모든 언덕 달동네를 가리키는데, 작은 방안을 후끈하게 달아오르게 한 뒤에, 저녁에 점등식을 하는. 금지된 장난. 미쉘. 아름다운 조개. 미쉘. 다시금 영화는 안토니오를 부르는 대신에, 우리가 아는 콘티와 라스트 씬처럼, 풰이드 아웃, 미쉘, 아름다운 조개, 아름다운 조개를 부르는 내가 아는 문학 장치로서의 돈호법으로다가 마감을 하는 것이다. 피짜 보다는 앙드레 가뇽이 낫다는 것. 기독교 다음으로는 차라리 조개종이 낫다는 것. 그것은 삶의 지혜가 아닐까? 모두스 비벤디?...... 바닷가에서 연애가 시작되었는데, 누군가 화약총을 쏨으로써, 여자의 이름이 참 지혜를 가리키는 김지혜라고 한다면, 얼마나 한국 이름이 아름답고, 이제부터는 딱딱한 주자의 세계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잘못은 왕과 왕비에서부터 전가되는 양명학적 대지에 우리가 오르는 것이 되겠는가? 산파술도 그렇다. 그것의 이름을 소크라테스가 지었는지, 아니지었는지, 갑자기 가물하다. 가물가물. 그러나 머리 약간 벗겨진 숱한 한국 선생들이, 춥고, 가난하고, 오직 정신의 마른 성기만이 있던 때에 학생들에게 했던 말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다. 피짜 보다는 앙드레 가뇽이 낫고, 참 지혜, 심판의 주자학만이기보다는 양명학과 더불어가 낫다는. 산파술이라면, 그것은 분명 비철학적인 난생 처음의 가지인 것이다.
이딸리안 스타일이라면 뭣을 가리키는가? 그런 게 있겠는가? 습화게띠에 바지락 같은 것을 넣어서 먹는 지혜 같은 것? 섭취식물의 종 다양성 같은 것? 유럽 사람들이 가난하면, 감자만 먹고, 감자만 먹고, 맥주 먹고, 쏘세지 먹고, 감자 먹고 하는 것 같은데, 이딸리아 사람들은 습화게띠에 조개를 넣어 볶은 쏘스를 겻들여 먹는다는 것. 다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한국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인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 중요하느냐? 친구가 한 명 있고, 집에 쏘세지와 조개가 있다. 조개는 비존재이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쏘세지를 좋아하는가? 우리는 천생이 육식이었던 것 같다. 떨어지면 그렇게도 떨어진다. 둘다 교양이 있어서, 서로 먹을 것을 먼저 고르게끔 하는데, 가까운 시일 내에 자기가 근사한 쏘세지를 먹은 기억이 있으면 마다하고, 친구에게 권하지 않겠는가? 조개의 힘은 거기에 있다. 조개도 결코 안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쏘세지 대신에, 조개 습화게띠를 먹는 것이 무슨 차별적이고 피지배상태인가 할 것이다. 그만큼, 미식가들에게는 알아주는 만족감이고, 포지션이고, 내면이 가득찬 저지인 것이다. 만일 한국에서 살라, 일본에서 살라, 누가 일본 대신에 한국을 택했다고, 혹은 반대를 택했다고, 탓을 하거나 각시탈을 출동시키거나, 불을 피우면서 쳐다보는 나찌즘적인 만행을 저지르겠는가? 한국은 한국대로 영화 일억명 시대를 돌파했고, 일본은 일본대로 아직도 근사하고, 성적 자유의 손톱이 손톱만큼 여유로운 경제 위로 나름의 문화적 코드로써 진행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고 또 누군가 말한다면 할 수 없으나, 그런 말 좀 안했으면 좋겠다. 인터넷 답글에 실명제도 못하는 코스모폴리탄 판사와 검사, 대학 교수들이 넘치는, 남의 깊은 내정간섭의 시대에..... 동등한 것이기도 뭣한 게, 성적 자유는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안토니오...... 이것은 높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자 비싸기만 한 양명인데, 결국에는 가난한 주자가 침을 삼킬 것이라는 직관 안에서, 마침내 공부를 포기하고, 그것의 정신, 선을 집어던지면서, 뭐가 자유로운 것인지 모르는 대상 속으로 무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플라톤은 형식적으로 아름다운가? 그리고 선생들의 산파술.....)
피짜가 아니면, 주여 남정신입니까?
결국 갠지즈 강의 모래보다 많은 인간들이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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