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선에 관한 궁예의 관심법이니라. 비정통적인 합성적 직관의 가능성
나는 나의 텃밭인 민주통합당에 많은 점수를 주는 사람이지만, 선거는 당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출신 당과 대통령이 딱히 많이 상관한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만일, 전라도 출신의 대통령이 서울지역 대학 학생들을 따로 모아 오찬을 열고, 은밀하게 장학금을 주었다면 이런 천인공로할 일이 있는가? 눈에 불을 켰을 것이다. 아주 극단적인 피사체가, 한국의 역사의 스크린에는 누워있고, 이런 표현, 도저히 표현으로 밖에 도달하지 못하는 스페이스, 만일 우리가 또한 극단적으로 춥고, 국영수 재단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만 수많은 날개를 우리에게만 접어 아기새에게 먹이를 물어주는 단 하나의 장면 밖에 가질 것이 없다면, 과거에 약간 그런 빛을 적잖이 띄었듯이,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없잖은 것이다. 자식은 어미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없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아주 충효동의 효자들이라면, 효자동의 충자듯이, 살 집도 한 채 선사할 것이나, 제사상을 앞으로 받을 확률의 위치에서 장난 삼아 내려와서는 자식들과 아직 음식을 함께 나누는 포근한 곡식감과 적당한 기름기, 그리고 음식이 마치 옆으로 많은 사람들을 상정하는 것처럼 많을 때는 금세, 무엇을 위해서 우리가 늙어가고 곧 죽어가는지 모르는 것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정보. 그것이 국정원에서부터 전달되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는 단순 평면 국민들로서, 문화가 클래식의 침투를 받지 못하고, 어제의 홈런 볼을 운좋게 받고, 꿈속에서 권투 시합의 공을 울리는 사람이 되어서, 공즉시색할 때 그 공, 공을 울리는 것으로 권투는 시작하나 개인의 영화는 마감을 하는 것을 겪는 것이다. 관계의 우수일 수 있는 부모의 위치도 그러할진데, 부모의 결합으로 이뤄진 지방색이라던지, 출신학교주의라던지, 고향을 상기할 때 익숙한 건물들이 싸이의 새됐어의 새 춤을 하고 있는 것이 대체 나의 하나 뿐인 의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대통령이 되면 자기 있는 곳에 다리를 더 지어줄 수 있다 한다면, 만일 그렇다면, 나이가 조금 있어도 다리를 직접 짓게끔 한다고 할 때 누가 반기겠는가? 대통령이 나오지 않았으면 할 것이고, 대통령을 나오는 것까지는 지혜를 발휘해서 응원하고, 선거 운동하고 하지만, 다리는 짓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이루지 않겠는가? 사람의 능력은 생각보다 초현실적이다. 우리가 다리를 경험하는 것은, 단순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의 지금 당장의 소용 없음으로 인해, 내가 그 어렵고 추운 겨울 날의 공사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수많은 기성도로, 간선도로, 차선책, 대체 수단, 대체 작물이 있는데, 떡하니 어느 날 갑자기 번개처럼 자리하게 된 다리는, 교통량을 보다 분산시키고, 흐름을 원할하게 하는 힘은 갖고 있다. 우리는 갈수록 거미줄화되고, 사람들은 도로에 나앉듯이 질주한다. 질주의 목적. 그것은 관성과 같다. 그리고 개인적인 익숙함이 달성될 때는, 소용보다도, 이미 타지역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관광의 강간을 행한 다음일 확률이 높다. 얼마나 벌판을 달릴 때 마음이 쓰린가? 도로만 있는 곳을 갈 때, 숭고함은 우리를 구타하는 듯 하는가? 남의 공장들을 지날 때, 선한 단 하나의 붉은 점등식을 행하는가? 완전 뜬금 없는 외국 작가 중에 브레히트가 그것을 가리켜 사천명의 선자라고 불렀다. 투표는 만화처럼 차가운 휴게소의 관광안내 표지판에 있고, 국가적 관계는 외국계 투어러 오토바이의 보다 밝은 색감의 노출에나 있다. 우리는 선거를 점처럼 행할 수 없다. 이것이 결론이다. 돌아가신 우리 김대중 형님이 될 때에나, 뭔가 대통령 한 명이 바뀌는 것이 서울의 언론출판의 자유에 보다 배가된 힘을 보탤 것 같고, 연주자의 연주 실력이 날카로워질 것 같고, 서울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철학자와 문학 비평가가 생길 줄로 알았다. 그러나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지표나 상승시킬 뿐, 우리가 그것의 엡엔웨브, 밀물과 썰물에 무감각할 수 밖에 없는 중간인이라면, 작고하시기 전까지는 저작이 없는 것도 폴리티컬 컨셔스니스의 관점에서 보면 마이너스인 것이다. 나는, 박근혜가 뒷머리를 풀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박정권 시절부터의 머리 모양이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그때 자기의 간섭과 구속, 구속일지라도 가장 사람들로부터 좋은 인기를 받았을 때의 노출이었던 것이다. 박근혜가 서울에서 사람들과 수다를 많이 떨고, 수다를 구타하고, 희한한 에세이집, 수다여 너를 구타한다 책까지 내고, 기계적 음표들을 나보다도, 올드보이보다도, 많이 적발하고, 사람들에게 날려서, 지적이며 정치적인 큐피트의 화살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면, 그 인기는 내가 과거 시절의 복지를 누리지 못하고, 정치 군인들로부터 고문을 받은 적이 없어도, 제법 아름다워 보이는 머리 모양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두려움은 사실 거기에 있는 것이다. 여자는 지근거리의 입체적인 자극의 노예가 되기 쉬운데, 박근혜는 그런 사람으로 또한 그치지 않을런지 하는. 그럼 무겁고 비싼 검은색 육단차를 타고, 비까번쩍한 이슈(유신, 혹은 있을 유)메이커(건물을 크게 만들었다는 뜻) 같은 건물들 사이를 오가면서, 무슨 춤을 추거나 커피 전문점에서 시를 적거나, 자기의 인기를 활용해서, 에스엔에스, 시를 자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건반의 화음을 치는 가능성의 소녀처럼 어떻게든지 유신하고자 하는지, 아무도, 그 누구도 잘 모를지라도 그것을 행할 수 있겠는가? 만일 검은색 육단차를 타고, 정책을 분석하고, 정치학적인 용어를 공부하고, 그 한 해의 우리 시대의 화두를 남이 갖지 못하는 것으로서 늘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면, 올드보이의 유명한 장도리씬처럼 멋쟁이 괴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어느새 멋쟁이가 되어 버렸다......" 문법은 화가의 그림에다가도 작가들이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은 아무리 무법을 행한다고 해도 유식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근혜가 이번에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중도하차한 이정희의 초당적인 염원이기도 하다. 여자는 젊음의 지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젊었을 때는 굴러다니는 금덩이처럼 보이겠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에 귀도 어둡고 겁도 많아서 더 이상은 볼 수 없는 커다란 크기의 엘이디티비 속의 공포 영화와 같아진다. 남자에게는 장자가 있으나, 여자에게는 여씨춘추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평등한가 물을 것이다. 박근혜는 본질적으로 불리하고, 더 이상 늙어서 그림 그릴 곳이 없다. 대통령의 운명이,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과 이명박 같은 수준으로 단 하나의 탑도 아무런 절에다가 짓지 못할 것이라면, 보다 젊었을 때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아무렇게나 그렸지만, 출중한 실력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책이라는 것은, 연애 다음으로 콩깍지와 같다. 민주 탄압만 하지 않았다면, 박정권 시절의 콩깍지는 비전도적일지라도 장로회적인 성격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갖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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