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말은 도리어 대나무 같은 기운이 있다. 기운생동하고, 금방 자라고, 빨리 자라서 소용이 많고, 사람들에게 많은 피노키오들을 나눠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나무의 소리를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면, 도리어 완전 대립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대립, 콘트라스트, 콘트라베이스, 살아있는 것들은 당연히 산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L'air Du Soir
어떻게 한 나라의 단어가, 오휘가, 김태희가, 단어가, 다 내가, 말들이, 은는이가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전쟁 이후에, 신성일에게 많은 어깨짐 지우면서 살았었다. 영화롭다고 하기에는 그런 것이, 바보들의 행진이나, 다른 초절정의 슈퍼샤이안인의 것 같은 영화에는 도리어 신성일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무슨 망변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별들의 고향이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현균씨가 지금 별들의 고향을 보고 하는 말이냐고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장계국을 밥에 말아먹고, 좀더 쉬다가, 나는 어렵게 말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별들의 고향은 한국영화 같은가? 그것은 정말이지 무덤 같고, 집 같고, 사람들이 서로의 인격들로 장작을 지피고, 근대와 혼돈, 사돈과 남말의 사회를 견디면서 진행하는, 한국어 특유의 토인네이션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했다. 내 형이 그렇게 신성일을 닮았다. 다들 잘 생겼다고 했다. 그런데 내 외사촌 형님이 어떻게 보면 신성일을 닮았다. 다른 외사촌은 유덕화를 닮았다. 나는 어쩌면 출발부터가 홍콩 영화나 한국 영화를 적당히 싫어하면서 시작하였을 것이다. 식은 송편 같은 것. 먹을 것이 없어도, 막 쪄냈을 때는, 가족 영화의 주인공처럼 맛있다고, 먹기도 전에, 모범생처럼 말했겠으나, 어디서 뭔가를 집어 먹고 집에 오는 길이면, 그것이 있다고 어머니가 말하는 경우에는, 여간 손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무당처럼, 작두에 올라타고, 피를 토하고, 그래야지만 다시금 김을 들인 송편을 먹었을 것이다. 나는 음식 맛의 조화를 요리사처럼 언급하면서, 흑설탕물이 들어간 것이나, 팥쏘가 들어간 것을 찾았고, 항상 어머니는 두번 먹으면 퍽퍽한 콩이 들어간 것을 권하셨다. 먹을 때마다, 힘들게 집에 오르는 골목이 생각났고, 먹을 때마다, 대체 집에 먹을 것이 얼마나 없어야 이런 것이 맛이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곳에 가서, 달떡이라는 것을 가끔 먹는데, 그것이 그렇게 내가 원하던 송편이었었다. 그렇다고 보면, 신성일은 달떡에 가까웠지 않나 한다. 막상 나는 신성일의 작품은 보지 않고, 신영균이나,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뒤늦게 보았는데 말이다.
우리는 어느 말이 사언 그러니까 죽음의 말이고, 어느 것이 생언, 그러니까 삶의 말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고종이나 되어야 이것은 사언이구나, 이것은 생언이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망국의 지경이 되었어도, 황쮼센의 글을 생언이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남만인소, 그렇게 들고 일어난 것일 수 있다. 생언이 나와야, 생언이다 하였을 것인데, 하도 그런 글들도 나오지 않으니, 황쮼센의 글이 그나마 지리적인 정확성이 있다면서 사람들에게 권한 것일 수 있다. 영어는 생언인가? 아니면 사언인가? 우리는 일본말이 우리들의 한 눈을 찌르는 것처럼 사언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언이 그로 인해 아주 환하게 부각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로부터 침탈을 당할 수록, 이상한 물리적인 반발심에, 죽지 못한 절대성으로다가 생언의 흐름과, 그것의 민속들, 그리고 젊은 청년들의 가능성을 점쳤는지 모른다. 참으로 피라미드 같은 것이다. 피라미드는 큰 것 작은 것이 있고, 작은 것은 모르겠으나, 중간 것이 저처럼 몇 개 있다. 스네푸르의 것도 아름답지만, 저처럼 굽었다 해서 벤트 피라미드라고 하는데, 저것도 아름답다. 한 민족과 국가가 위기에 던져져서, 도리어 생언이 폭발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생언으로 권력을 잡고, 과학과 함께 국제 관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고 해야, 몸으로 떼우는 생언들을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언은 하루하루 터져나온다. 수많은 신문지상에서, 민중들의 대화 속에서, 심지어는 김두한의 활력 속에서도, 시라소니도, 결국은 시간을 뛰어넘어 방학기의 그림들이 그것의 생언들을 포착하였고, 그나마 최선을 다하여 묘사하였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쓸데없이 자기들 사언도 반성하지 않은채, 서양 제국주의를 흉내낸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은 말 그대로, 아프리카나 아프리카, 그리고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동남아시아까지, 아무 것도 없는 것들을 향해, 생언과 사언의 놀이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시공간적인 입방체를 만들어놓고, 그냥도 짓눌려 죽을 것인데, 자기들에게 침공을 당하고, 적당히 수탈 당하면서, 건물들 몇 개씩을 지음받고 하면 좋지 아니하냐? 그런데 어떻게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상대로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아주 짧은 기간, 한국과 중국이 아주 과도하게 정체되었다고 한다면, 약간의 퇴행 같은 현상이 집단적으로 보고가 되는, 그랬다고 한다면,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적 사언과 생언의 논리로써 침공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황쮼센의 글이 그렇게 생언이다면서 사람들에게 권하고, 미국을 갖다오는 사절의 이름을 뜨거운 거기다가 얼음을 집어넣는 사절이라고 부르고, 새로 생긴 신문사에는 실상은 깡패들로 가득차 있고, 아관파천이라고 할 때는, 고종이 여자 옷을 입고, 그와 같은 사언의 고고학적 레파토리를 쌩쌩돌리고 했다면, 돌리고 돌리고, 일본은 우리에게, 자기들이 생언이라고 주장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미이라 같은 것들만 보기 흉할 뿐, 나머지 그림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변함이 없고, 끊임없이 이집트는 이씨 조선 같은 느낌만 드는 것이다. 생각하고, 공부하고, 양명학에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조르기가 다가오고, 그렇게 힘이 빠져있다 보니, 딴 생각 한 방에 그냥 엎어치기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그렇게 이동 중에 있으며, 말 위에 있고, 군사 훈련을 받는 중에 있으며, 친구가 보다 많이 알고 있는 것에 있는 것이다. 무국적적인 생원들이 실은 국가의 미래적 자산이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의 에세이적 기능은, 성능은, 역량은 지금도 피라미드처럼 죽은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폼이 있고, 기세가 있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그들 엘리트들에게는, 사언의 세계에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가 소문처럼 횡횡하였었다. 제국주의적 연합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으나, 그들의 실상은 사납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식인종의 식량창고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노동력의 비극만 빠지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과학이 이처럼 발전하였으니, 이제는 그렇게만 봐도 좋지 않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그렇게 발전해도, 식인종의 식량창고이고, 영향의 상호적인 운동성이라고만 여긴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뭘 제국주의 해야하는 지도 모르겠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다가 이광수의 글이 도쿄를 공습하였고, 윤동주의 글이 일본 처녀의 마음들을 루팡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제국주의가 사언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지만, 그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군인들은 당연히 군인이 아니겠는가? 군인들이 어떠한 피라미드를 거쳐, 소설가가 되고, 예술가가 되고, 근대적인 디자이너가 되고, 박람회를 개최하고 하겠는가? 어쩌면 조선이 너무 근대적인 군대 실력이 없어서, 자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한 모든 사회적 관계와 범주가, 군대 실력을 배양하다보니, 과학과 경제, 군사력의 발전, 다시금 비스마르크 과학과 경제, 그렇게 군사력의 발전의 무한진행으로 나아가는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언으로써 그들의 그릇된 사언들을 고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어는 대표적인 사언이다. 그러나 그들 공동체의 생언이 아니면, 지금 우리들의 세계는 동서가 서로 만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일본이 우리가 사언에 먼저 노출되었던 국가라고 여길 수 있다면, 생언에 노출될 수 있었던 가능성과 구조를 그려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성일은 그의 미스테리어스한 이름을 성명학적으로 잘 해석해내는 사람도 없이, 백세 시대에 일찍 죽고 말았다. 벤트 피라미드는 어쩌면 초가집을 닮기도 하였다. 서양은 옛날부터 절대적이며 사언적인 과시를 온 몸에 달고 다녔던 것들 같다. 사람의 뼈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크고 절벽 좋아하고, 지옥을 좋아하고, 그것을 통과하면 더더욱 좋아하는, 보편성과 계산, 정신 나간 전체주의들. 그들 문학과 예술은, 그것의 주제가 자세히 보면 거의 전부 사언들이나, 숱한 생언들이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차출되어서, 이상한 균형상태를 이룬 것들 뿐이다. 배우 신성일의 죽음도, 사언의 스펙타클로써 보면, 그것의 슬픔보다도, 균형상태가 우리에게 먼저 감지되는 것일 수 있다......
신성일은 조금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