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조건
우리는 무조건 사랑하고 싶어했다. 나는 인영양이 한 서른 하나 정도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은 나의 상도덕. 상 도덕적 입장. 그러나 스물 몇 정도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충격도 없다. 나는 어째서 이와 같은 한국어 점막 상태에 던져진 것일까? 그것은 과연 의미론적인 것일까? 나의 세포는 늙지만, 나는 젊고, 나의 현실은 좁고 박하지만, 나는 늘 애정의 조건이 끊이지를 않는다. 그것의 논리학을 따져 묻는 사람이 예전에도 많았다. 그러나 착상만 있었을 뿐, 정확히 어떻게 되는 것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사탄을 응시할 때만이, 겨우 그것의 홀드, 그러니까 배의 내부, 혹은 그것의 바닥을 볼 수 있었는 것이다. 그것의 예는 간단하다. 아주 잠깐 보는 드라마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왔다.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싶어서. 그 대사가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다. 사람들이 삼각관계를 좋아하고, 우리가 십년 정도 지나서, 다시금 삼각관계 소설을 누군가 써낸다면, 같은 작가가 십년 동안 두루두루 여자들을 만나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싸, 사람들이 잊었을 성 싶을 때, 그런 소설을 써낸다면, 우리는 빠져들고 만다. 내가 나를 돌아보면, 나는 삼각관계가 아니라, 빛나는 다윗의 별, 그러니까 별이 너무 많아서, 계속해서 회전하는 사람 같았던 것 같다. 우리 옛날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오래 갔다. 이승환이라든지, 이문세라든지, 인기 디제이라든지, 그 안에서 우리는 삼각관계를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서울 여의도를 지날 때, 그것이 원래 섬이어서, 어딘가에서 그 삼각형을 감지할 수 있는데, 정말 그 어딘가에서, 드라마 질투를 보면, 정말 그 삼각관계가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지대하고, 거대하고, 맘모쓰 같은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잘못을 고백하자면, 철학자로서, 너무 감각적인 조건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철학은 단순하다. 그것은 결국, 사랑을 기정 사실로 하고 싶은 세상 사랑 전도사들의 농간이라는 것이다. 나쁜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농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남자들만 있을 때는 삼각관계가 있을 수 없다. 혼자 있을 때도 삼각관계가 있을 수 없다. 사람이 결혼을 해서도 삼각관계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백제가 남자인지, 고구려가 남자인지, 신라가 남자인지, 그렇게 다른 두 명이 여자가 될 수 있는지, 삼국사기 책이 닳아질 때까지 읽어야 진리가 우리에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삼각관계 이야기를 수출하려고 하면, 얼마나 애를 먹겠는가? 사람들은 없는 과거를 있는 것처럼 이야기 듣고, 연극 관람하면서, 여덟 살 소년의 십년전 과거 이야기를 듣는 그 아름다운 눈빛으로, 마침내 주인공이 한 여자를 선택하게 될 때, 이차돈의 순교처럼, 섬진강의 아름다운 길 위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공부가 본질이지만, 누구도 그것에 충실할 수가 없다. 다만 타박만 할 줄 아는 어머니가, 공부에는 좀체 관심이 없는 딸을 두고, 평생 오토바이만 타고 다니는 남자나 만나라. 그렇게 저주를 하니까, 딸은, 그래, 평생 오토바이만 타고 다니는 남자나 만날거니까, 걱정하지 마셔 하는 것이다. 애정의 조건이라는 것도 그렇다. 외국 영화가 있었고, 나는 참 재미 없게 봤다. 내 누나와 봤던 것 같다?? 내가 아직 성기능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런 중층적이고, 항상 이월되는 생각의 장애 같은 것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인지, 조금도 전이해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타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를 잘 접수하고, 눈물도 흘리고 했던 것을 보면, 다만 그것이 섹슈얼러티와 반드시 연관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성인은 해석의 능력이 있지만, 어린아이도 팀스피릿, 그것의 영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비슷한 제목들을, 엄청난 배우들의 혹성탈출과 같은 열정으로 만나보았지만, 제목을 달 수 있다는 것에나 만족하고, 성공 여부는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애정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간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인 것이다. 주자가 아닌 세상에, 비탄과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촌스럽고, 예술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유사예술 세계에도, 그것의 연결, 그것의 애정은 있는 것이다. 혼수 품목이라고 있었다. 며느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애정의 조건은 있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세포는 갈수록, 자기들의 브레인이 거짓말에 침식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세포는 그래서, 그것에 아무런 희망이 없으면, 세포 자신이 일어나 사랑을 결단하고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평생 애정의 조건을 감추고 사는 수도 있다. 너무 꼭꼭 감추고 살아서,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남자가 오토바이를 탄다고 하면, 하나 사오면, 도리어 화를 내고, 집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집어 던지고 하는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