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은 마음
삶은 죽을 것처럼 엮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인내와 교양, 진사와 선달로도 이어지는 것일까? 죽을 것처럼 예술하고, 엮어지고, 인내와 선달, 해시계와 자격루 같은 것으로도 이어지는 것이, 그와 같은 하모니가 제일일 것이다. 우리는 잊을 만 하면, 셀린 디옹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정말이지 계급이 어느 정도였을까? 광주에 영화관이라면, 제일극장, 무등극장, 광주극장 등이 있었다. 영화는 왕이 된 남자 드라마와 같다. 우리가 우리의 단어를 익혀서, 영어가 아니라, 하늘에서 쏟아붓는 혜택과 은혜, 기독교적 은혜까지를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받고는, 죽을 것처럼 전교 일이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이등 찍고, 최소한 겉으로는 유유자적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성기와 일치하게 되고,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늘 사람들은 물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벌써 왕의 경연에, 연극에, 슬픈 아뢰야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백명이었고, 중간에는 오십명이다가, 광주에서부터 두 명 정도 되다가, 수원에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볼 때에는, 그 한 없이 투명한 주자학적 공기 안에서, 왕인 사람은 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셀린 디옹은 이미 늙었고, 둘은 서로 만날 기회가 없겠지만, 그렇게 광주에서부터, 성기가 성인의 증거가 될 수도 있고, 상관 없는 것일 수도 있는 차연 속에서, 늘 그렇게, 벅차게, 하나로만 가득차게, 나를 예방하였던 것이다.
인간은 서양 예술처럼 복잡하고, 환하고, 거대하고, 오케스트랄하고, 그러한가? 아니면, 사진처럼 단순하고, 사진 하나로 단순하다가, 셀린 디옹, 다시금 사진 하나를 만나는 것으로 연속하는가? 우리가 불교의 탱화를 보고 슬픔을 느끼고, 절의 처마를 보고는 몇 분이고 계속 응시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배움 같은 것이 아깝기 때문인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것 같아도, 다 듣고 있고, 꼭 아버지가 리모콘을 들고, 우리 옛날 가난했던 시절의 집안 풍경, 말했던 것처럼, 시험에만 틀릴 뿐, 시의 전체적인 궤적이나, 시인 이름, 시의 제목 정도는 아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을 가서, 장강에 가서, 어느 프로그램에서처럼, 달리는 배 위에서 잠을 자다가, 아침 풍경을 맞이할 수 있는 영광을 안을 수 있다면, 중국은 정말이지, 시의 제목과, 시인의 이름만을 묻는, 그와 같은 문턱과 같은 것이다. 백 명의 사람들이 나루터에서 기다리고 있고, 그 백명을 모두 건너게 한 다음, 다시금 백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나루터로 가는 것이다. 천국은 시인의 이름처럼 되어 있다. 평생 자기 이름을 갖고 시를 쓰는, 동양 삼국은 얼마나 복되었는가? 셀린 디옹은, 한국에 스파이로 와서, 그냥 와서, 머리를 잠깐 부딪히거나, 갑자기 놀란 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웃으면서 띠옹 비슷한 의성어를 내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술 공주 셀리 셀리 셀리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면, 이선빈 정도로 해주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다른 한국에서 얻는 선물보다 귀할 것이다. 저울처럼, 장강이나 황하를 흐르는 배처럼, 어느 것이 더 무겁고, 어느 것이 더 무거울 수 있으나, 사탄에도 중국이 있는 것처럼, 천국에도 중국이 있는 것이다. 자기 이름이 있는데, 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것을 아직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우리는 틈만 나면 김연아를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핸드폰 알람을 꺼야 하는데, 그것이 내 몸이 아니었고, 내가 있는 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드론 소리가 들려왔는데, 시끄럽다고 생각하니까, 초절정의 묵음으로 바뀌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