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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준다.

by 마음대로다 2019. 2. 11.








천사는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준다. 





굴욕감이라는 말은 며칠 전에 썼던 것 같다. 모욕감이라는 말은 어느 연예인의 이야기처럼, 한 두 시간 목욕을 다녀왔는데, 어디 목욕가는 길이냐 하는 것에서 그 뜻이 극명해질 것이다. 사람의 재산은 어디에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어제는 바벨 드라마를 기대했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그만 보고 말았다. 좀더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켜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드라마는 그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이다. 트로이의 목마를 보자. 그 자체가 잘못인 것이다. 드라마는 인격의 삼대 요소, 공부, 열정, 인격 중에, 오직 열정과 인격으로만 승부하는 세계와 같다. 과학적인 사고, 공부의 여러 기억, 항상 새로운 깨달음 같은 것은 드라마와는 상반되는 것들인 것이다. 그냥 좋고, 혹은 그냥 싫고, 같은 사람만 계속 나오고, 일년 전에 봤던 것 같은 스토리가, 새로운 여자에 의해서 다시 새 포도주가 되는 것을 우리는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이다. 드라마에는 병사들이 없다. 그러나 트로이 목마에서는 드라마가 병사들을 가지고, 속으로 숨기고 있다고 하였다. 얼마나 병사들이 어처구니 없는 고문을 당했고, 사탄의 뒤나미스가 되었는지, 고통스러움에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낙차와 같은 것이다. 혼자서 책을 읽고, 처음에는 여자도 함께 시를 읽으나, 남자는 성경을 읽고도, 사회 생활의 눈이 떠지고, 문학도 잘하게 되지만, 여자들은 그나마 가장 높은 곳에 성경이 있으나, 허튼 목사들의 허튼 소리들을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거나, 책을 하나도 읽지 않거나, 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거나, 책이 주자학에서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일을 당하거나 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유물론과 같아서, 정말로 남자를 보쌈하여서,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 떨어뜨려 놓지만 않으면, 소년 때에 읽은 것도, 사춘기 때에 읽은 것도, 대학 때에, 군대에서도, 읽은 것들도 모두가 그 옛날 민주화 운동에서처럼 지속적인 양심 선언 같은 것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일종의 요요현상처럼, 버렸다가, 들었다가, 버렸다가, 들었다가 하고는, 사도바울의 다마스커스 신드롬처럼, 어느 부분에서는 다만 문자를 버린 것을 두고 여자들처럼 펑펑 울기도 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트로이 목마와도 같다. 처음에는 먹을 것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인격의 삼대 요소 중에서, 공부, 열정, 그리고 인격이, 순서대로 사라지는 것이나, 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나,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들도 드라마를 좋아한다. 우리가 고대의 유물들을 좋아하는 것은, 남자들도, 여자들도, 남자들도 그와 같은 때에는 매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이것은 드라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가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번의 삶을 살지 못하지만, 반드시, 두 번의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발굴 현장이나 작업 같은 데에서 일할 만한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하다 보면, 다만 책으로 읽은 것과는 다르게, 책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중언부언이어서, 발굴을 하게 된다. 계급 의식 같은 것이 매우 치명적인 독과 같다. 항상 사약을 받고, 김을 모두 뺀 콜라 같은 것을 한 세 사발 들이킨 것처럼, 방안에서 키우던 강아지나 고양이들과 죽는 것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정말이지 성경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 독일 사람의 과도한 열정처럼, 과연 섹스북과 같은 것이었을까? 다만 일기나 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양의 문물들을, 그들의 위대한 정신과 차마 셀 수도 없는 저작들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인가? 독일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시류에 이끌려서, 그와 같은 혁명적인 발언을, 덩달아서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자기가 난중일기만 쓰고 나면, 이제는 편안하다 할 수 있는 것이고, 그와 같은 확신이 진정 있었던 것일까? 모든 드라마는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것이고, 모든 저작은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비극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설이라도 그러하고, 그나마 문예비평서나, 철학책 같은 것도, 거기서부터는 조금씩 형태가 잡히지 않아서도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섹스하고, 발굴한다. 


저와 같은 작은 창문에서 얼마나 우리는 많은 책을 읽었는지 모른다. 그와 같은 서양서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서, 결과론적인 것이지만, 얼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력하였는지 모른다. 우리가 삼국사기를 해석하고, 번역하고,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려고 할 때, 비로소 그것의 모습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에덴 동산과 같았다.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책들의 열거와 같았고, 그와 같은 학문의 대학에 들어가서도, 막상 연구하는 것들은 특수 유행 전문 분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는 것들을 경험하여야 했다. 그래서 뭐든 입문 하는 시간이 가장 좋은 것이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가장 풍요로운 영혼인 것이며, 그들 자신도 겨우 그 안에서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와 같은 볼링에서의 빠지는 길을 걷지 않고, 핀들이 가지런한 본문으로의 길로 맹렬히 회전하여 들어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천사의 관점에서는 매우 흥분되는 시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천사이고, 천사장이며, 자기들은 그저 섹스 심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팡세 같은 것은 문장의 실재로 파고들기가 어렵다. 너무 많은 인용과, 너무 많은 해석의 인용은, 저작의 실상이 팜플렛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소월을 갖고 문장의 실재로 파고들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것의 맨 처음의 각과, 어떤 동음이의어 같은 것들, 국정원의 신참내기 화랑 같은 것은 있을 지 몰라도, 시의 본질은 늘 언제나 국가는 남에게 넘긴다는 저의식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와 같은 저의식에 우리들의 의식과 사유 모든 것이 침윤되고 마는 것이다. 시를 썼다가, 평을 했다가,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적 시문으로 나아갔다가, 하이데거와 헤겔은 가까우니까, 그런 철학도 전통이 드디어 되어서, 전통적이며 반복적인, 기억의 상보적인 표현을 가져보는 것이 좋은 것이다. 시를 썼다가, 만화를 그렸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렸다가, 여행도 갔다가, 드라마 찍는 사람들과 친구도 되었다가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하이데거도 카테고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하이 카테고리 정도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와 같은 사유를 행할 수가 없다. 이미 중언부언하는 것 같은 느낌은 다분하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크라이스트, 그러니까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하이 카테고리가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천사와 악마는 거기에서 공존하고 있다. 천사와 천사장은 문장의 실재에 들어가서, 생목하고, 발언하며, 그림자를 그려내고, 항상 기억하고, 항상 기도하며, 사람들과 더불어 웃기를 좋아하는 자이다. 이상한 데서 공존하는 천사와 악마라고 할 때, 사탄에 대응하는 천사는 분명 섹스 심볼리즘으로서의 천사가 분명하나, 사탄이 사람들에게 주는 굴욕감과 같은 양의 굴욕감을 주는 존재가 항상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의 끝을 선언하는 것은 천사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거의 모든 드라마를 권하는 힘 같은 것은 천사인가? 아니면 사탄인가? 하이 카테고리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거의 모든 드라마를 권하는 힘 같은 것은 천사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악마일 것이나, 천사라고 하면, 당연히 슬픔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들은 김소월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팡세라고 하면 빵하고만 생각이 그치는 사람들일 것이다. 드라마가 장면을 바꿔주면, 거의 모든 장기가 그 뜻을 모른 채로 책장을 넘기고, 몇 년이 지나, 똑같은 일을 경험하는 것들일 것이다. 도무지 오늘의 포토샵은 있을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다. 중학생 때에나 잠깐 할 수 있는 정도. 가장 나쁜 종류의 것이긴 하나, 세상 출판 사람들이 보면, 그런 내 말에 깜짝 놀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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