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민중문화이야기

결과적으로 뚜렷한 목적이 없는 한신대학교, 신학과 출신의 소설가가 나오지 않는

by 마음대로다 2013. 5. 11.

결과적으로 뚜렷한 목적이 없는 한신대학교, 신학과 출신의 소설가가 나오지 않는

 

 

 

 

 

 

 

 

공룡과 같은 관계공무원이란,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라는 것 밖에 유산이 없다. 그 옛날 자갈밭, 기찻길, 기차역은 넉넉하고, 사람들은 무임 승차도 하였었다. 그 초조함. 그러나 승무원 아저씨가 한 명씩 펀치 보울을 만들면서 지나가면, 세상은 무임승차가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것의 사티의 짐노페디 같은 전경은, 학교를 바라보는 관계공무원 내외자의 마음처럼 대도무문하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학교는 사무처장도 있고, 사외이사도 있고, 대리점도 있고, 바깥에서 연일 반탁이니 친탁이니, 재빵왕 탁재훈 시위도 하고, 반청이니, 고종의 서거니, 장례행렬이니, 연장이 있고, 하여도, 하여가, 대도무문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위시한, 그냥 소설 태백산맥이 아니라 태백산맥의 어느 한 분파인 것 같은 조정래, 허준의 작가, 허준, 그런 식의 자생적인 지식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건방진 시위대 학생들과, 그런 것은 잘 모른다지만 소중한 입각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국어선생님. 그러나 그 처음이 좋지, 무진기행이네, 박태원이네 들어가면, 작가가 구분되지 않고 바라다보이는, 짐노페디의 랜드스케이프나 만날 뿐이다. 우리가 씨에프에서 랜드스케이프가 바뀝니다 할 때의 그. 너무 타박하지 않는 것으로다가 어떻게 안되겠니? 하는 것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공룡과 같은 관계공무원일지라도. 내가 글을 쓰고 죽지 않으면, 자기들이 건물을 짓거나 랜드스케이프를 바꾸어서 태공조에게 아부심벨하는 이집트의 오비베어즈. 벨리스크. 우리의 양심은 글을 쓰고 죽지 않는 삶에 깊이 아이덴터티가 있어서, 회사원들끼리 카드를 발급하여 출입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백제를 가진다 하겠다.  

 

 

서울대학교에서, 생각해보면 내 친구 같았던, 중학교, 여학생이 대학원에 갔는데, 전화상으로, 함께 국제대학원을 돌아보다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주고 받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냥 서울대학교는 하니와 젓이 흘러넘친다고 생각했다. 한신대는 옛날부터 가난으로 깎듯해서, 건물 짓고, 선생들도 돈을 주고 학교에 오는 것 같은 그림자를 가졌었다. 배고픔에 죽었는지, 연탄가스에 죽었는지, 이백제가 되는 시간에는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물론 못먹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합성적인 느낌. 공부를 해봤자 씨발. 윤평중이. 미안. 그는 훌륭한 철학과 교수님. 처음부터 묘목은 말라 비틀어져 있고, 신학생만 전도사로 목사로 되는 높이가 있으며, 나머지는, 아버지의 복지와 가족 장학금과 거대 문명의 아이티 산업의 즉자대자적인 관계망의 일환으로 밖에 아무런 출구가 없는 것이다. 가르침은 촉촉하여, 입맥 같고, 줄기 같지만, 그것의 독일 문예학 강의, 생김새는 채림 같았던 나이 많은 할망구 차봉희 교수님. 나는 보아도 보지 않은 것이고, 보지 않아도 본 것이나 진배 가배 할 때 진배 없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청도는 사과나무들이 흐드러져, 기분에 수십킬로를 달리는 듯 했으나, 나주는 배가 유명하다지만 길을 지나다가 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랬더니,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반박문이 들어왔다. 나는 훌륭한 관리이기도 해서, 그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입맥보다 정교하며, 신성처럼 귀한 삶의 생명, 연한 김연아, 닮은 새생명, 버드, 그것을 접수시키고, 재빨리 여직원을 일으켜서 내게 가져오게끔 만든다. 나는 그것을 읽어보고,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금 짐노페디, 연상하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차이는 있다. 청도를 지날 때는 과수가 영글었을 때이고, 나주를 지날 때는 이런저런 겨울의 끝자락이라던지, 과수가 눈에 띠지 않는 여름이라던지 그랬던 것으로. 그래도 그렇다. 어디가 나주 배밭인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독일 문예학이란, 다만 괴테 하우스 같아서, 철학을 공부하고 문예학을 공부하면, 짤쯔부르크,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자유시민권이나 발급받는 것 같다. 헤겔의 법철학은, 수려한 문장들을 넘기다가, 그의 시민사회론으로 진입하여서 가족을 논하는데, 아름답고 한없이 사랑스럽다. 그의 절대성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주 배밭을 갖고 있고, 그것의 절대적 거리랄 수 있는 청도의 사과밭과 같은 것이다. 개인의 인륜적 의지는, 법적인 추상성과 가족에서 하나가 되고, 그것의 행동과 기억은 사회의 직접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다. 이 말들은, 헤겔의 직접적인 하이마트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미사려구와 갖가지 유사 르네상스들을 많이 품고 있는 독일 문예학에서는 그것을 선험적 고향상실성으로나 간주한다. 가장 아름다운 돌인데, 굴러다니는 돌로 여겨지고, 라인강에 버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경고하는 고통의 사이렌........

 

 

나는 교수로부터 어떠한 장학금 제안을 받은 적이 없다. 야고보 장학금이라고 있었다. 그러나 나만 받는 느낌이 없었다. 그래도 기뻤던 것이, 나의 고통이 보험적으로 연장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삶이? 필력이? 주변 사람들의 사상이 미천하다고 생각했지만, 한번도 발설한 적이 없고, 나는 그만큼도 겸손하였던 것이다. 나는 야만적인가? 아니면 이와 같은 에덴 동산은, 뱀은, 사과는, 나체는 다른 영역에서 다시금 보성되어야 하는 것인가?........

 

 

성경에서 에덴동산의 창세기 부분을 없애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 어제처럼, 그냥 대충.... 하지만 잘 모르는 부분을 무로써 훈련하지 않는다면, 무슨 창조경제의 육즙이 나오겠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