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 강소라 유이 여성적 학생적 배우적 피사체의 삼국지적 커피 마시면서의 한담
남자가 약간 나처럼 실눈이면, 여자는 민중을 선발해야 하기 때문에 세 여자처럼 눈이, 아름이처럼, 큰 게 좋다. 여자가 실눈에, 차분한 안회 풍의 사람이라면, 남자가 눈이 장비처럼 크면 좋다 하겠다. 그러나, 후자의 것이,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기울여서 찍은 나머지, 무슨 할인 같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인증 사진이나, 친구들과 넘기는 오초 정도의 존재감이 아니면, 좀더 진행하는 것이 아닌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의 진행이 아니라, 남의 인생이 나의 인생인 것처럼 꽃이 피는 인문학적 아남네시스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극은 얼마나 소소한가? 눈이 큰 남자는 만날 여자가 없고, 눈이 실눈으로 예쁜 여자는 로맨스가 없는 것이다...... 우리 근대문학의 영지, 염상섭의 삼대에서 필순이는 눈이 큰 것 같은가? 아니면 작은 것 같은가? 경애보다는 큰 것 같다. 경애가 약간, 눈이 작고, 작다는 것이 아니라 가늘고 긴 타입의 모습 같고, 필순이는 그보다는 체격도 있고, 손도 남자 손처럼 일을 하다가도 거칠어졌지만, 눈까지는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궁합은 다시 말하지만 아남네시스에서나 가능하다. 눈이 큰 여자는, 자기는 자유로운 행보를 거듭하였다 하겠지만,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잘살고 학교가 국자감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의 것처럼 높고 웅장하였다 해도, 판단이 중국 촉나라가 되지 못한다. 펜을 사줘도, 기쁨의 촉이 생기지 않는다. 대유가 없다고 순자가 불평을 거듭한 대목도, 신비로운 잠망경 안에서는, 가까운 남의 말의 복화술일 수 있다. 결단은 눈이 크고, 정확한 것이 아니라 크게 말하는 것에서 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결단은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범주가 참으로 다양한데 말이다. 서양의 오케스트라가 생산자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도, 오케스트라의 이율배반 자체가 그래놔서 그럴 수 있다. 아픔은 통증과 같고, 통증은 십자가이기 보다는 종묘처럼 얇은 한 선처럼 보일 때가 많다. 김혜수는 깜보였다. 당시의 대지는, 엔엘과 피디, 그러니까 사회 혁명의 지배적 매사와, 프로야구, 맵시나, 칠성사이다, 칼라티비, 가장 나중까지는 최진실의 질투에 이르기까지의 여의도 세력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말하고 나니 이것도 전두환이고, 이순자이다. 다른 독재자의 부인 이름은 잘 모르는데. 김혜수는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면, 나의 애인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혜수는 태권도도 잘했다. 그리고 방송에서 시연을 가볍게 보이다가, 다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하희라 김혜수는 채시라에 밀렸다. 채시라는 누구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화성의 단성생식 같은 의지가 있는 여자이다. 그래서, 이런 독특한 구조 때문에, 여명의 눈동자의 헤로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당시 동신중학교 학생들에게, 채시라가 가장 예쁘다고 선언하였었다. 사람들의 바나바를 향한 외침은 거대했다. 나와 같이 채시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닮은 사람이 도덕 선생님으로 계셨다. 내가 도덕을 사랑한 것일까? 관념의 메쏘돌로지컬한 세계관적인 피력인 것인가? 너무 빙빙 돌고, 복잡하지만, 나는 채시라를 육체적으로 사랑했다. 그 시절의 나는 복숭아 동산에 있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마치 일본의 어느 아름다운 거리를 나만 사랑하는 것처럼 기쁨의 동기가 되었다. 아무도 모르라고, 가곡을 배울 때, 그것이 꼭 이렇게저렇게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맞는다는 것은 이념이 맞는다 할 때, 스스로도 보기 좋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 한 것이다. 나만 채시라가 훌륭한 배우가 될 것이라고 외친 것이, 아무도 모르라고 가곡을 배우는 중에, 관련을 맺었다고 뭐, 그 시절의 나무 아래 타임 캡슐처럼 묻어 놓기라도 한 것일까? 이런 고리. 저런 고리. 두 개가 엮어져 있는 것으로. 김혜수는 비운의 여자이다. 김혜수는 나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결여의 절절함은 언제나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단골 테마인 것 같다. 눈이 크고 예쁜 만큼 나를 좋아한 것인데, 인식소가 맞지 않는 것이다. 나의 것이 기독교 전통의 것이라면, 그녀는 영지주의 쪽이나, 동방정교회 쪽에 가까웠다.
강소라는 마치 핵분열이나 세포분열처럼, 빛이 분열하여 나타난 것 같다.
우리가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의 눈을 큰 것으로 기억하는 것은 만화적인 기법에서, 순정만화가 워낙에 눈이 큰 것을 선호한 것에서 원인을 둘 것이다. 그러나 겨울 북해도에서 서로 누구인지 모르게 부르고 헤어지는 도플갱어에서는, 추위 때문에서도 눈이 작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결혼해서 복숭아를 서로 빨리 나눠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시집이라고 가는 길이, 시지푸스의 신화처럼, 신작로나 일년 열두달을 걸어야 한 것이라면, 눈은 마치 서바이벌 이론보다는 용불용설이 적용되어 작아질 것이다. 오아시스는, 여자의 작아지지 않는 눈의 크기와 같다. 남자가 조금 늦었다고 무조건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부드러울 여의 여명의 동네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아시스 없음은, 김여진 주연의 영화에서처럼도, 너무나 한국사나 한국문학사 한국 영화사에서 가혹하다 할 것이다. 송윤아가 눈이 크고, 눈이 작으면 왠지 순정이 없을 것 같은 문법에 확률이 조금도 높지 않아도 빠져들고 싶은 것이다.
유이와 강소라가 눈물의 극외적인 순정에 본체를 빼앗기고-있기 때문에, 단지 있음, 문법의 본체 안에 있는 부처님의 대웅전에 있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김태희를 떠올린다. 연기가 부족하다던지, 진작부터 그랬어야 한다는, 돌아보면 입을 열고 있는 사람이 없는 군중 장면에서의 목소리. 그리고 대흥사의 부처님의 눈은 얇아도 그렇게 얇을 수 없다. 생각보다 날씬하고, 비교해 보면 가장 인간적인 외체, 느낌의 비율을 갖고 있으신게 아닌가 한다.
인문학도가, 눈물을 절삭시키고 공부에 임하는 것이면, 티비의 드라마 보기란 것은, 범람의 문법이라는 모순어법의 극치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인문학도들은 공부를 잘 할 수가 없다. 그것들의 문건은 완전히 말라 있지 않고, 중복을 확인하여 버리지 않고 있고, 그렇다고 강소라나 유이와의 데이트 같은 포근한 대학로의 풍경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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