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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사탄을 고백한 것들과 함께: 이원하, 시간과 눈물.....

by 마음대로다 2020. 10. 5.

사탄을 고백한 것들과 함께: 이원하, 시간과 눈물.....

 

 

 

 

 

 

 

어째서, 도대체 누구 때문에, 그들은 사탄에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는가? 그래서 보통의 취조를 할 수는 없고, 마녀 사냥 같은 외래종의 것은 더더욱 할 수가 없다. 그것을 의도해서 글을 쓴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것의 의도에 맞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두뇌 움직임에 감사를, 그래도 조금은 해야 한다. 우리는 두뇌의 움직임이 거의 없는, 두운 법칙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말들이 아깝고, 그 송이와 친구들이 아깝고 그렇다. 이산가족이 아깝고, 우리들의 문학과, 소설과, 창작가와, 친구들이 아깝고 그렇다. 그렇게 처음 방송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남몰래, 보이지 않는 채널로, 사탄을 고백한 마음이 놀라 떨렸겠는가? 사람들은 남자 배우들을 좋아했고, 여자 배우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배우들 중에서, 그래도 특출한 세 사람들을 뽑아, 트로이카라든지, 북두신권이라든지, 카리스마 같은 것으로 불렀다. 사람들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카리스마 있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지겨운, 쓸데없는 말을 듣지 않게 되어서, 반갑다는 생각이 있다. 그 사람에게 우리는 또한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부정확한 논리적 큐피드의 화살을 날리면서, 타락하고,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적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것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만화에서의 고백과 같이, 사람들의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두뇌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우리들의 객관적인 상점에서, 메타콘 같을 것을 사 먹는 것처럼 말하였으나, 항상 쓸데없고, 항상 더럽고, 항상 무지한 것들의 연대를 추정하고, 무지한 것들을 추정하다가, 빠져나오고, 외국어를 좋아했다가, 일본의 대마도나, 대지진, 일본 만화의 이정진 같은 것으로나 나아갔던 것이다. 유칼립투스 잎을 먹기 좋아하는 동물들이, 그런 말을 쓸데에나, 한국의 민중이 된 것처럼 환호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또한 마녀 사냥이나, 마남 사냥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언제나 세부적인 부딪힘이나, 악마에게 있어서, 우리의 할 일은 존재의 훌륭한 경치를 선사하는 것뿐이다.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나쁜 먼지 같은 것을, 스스로 제거하게끔 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이원하의 시간과 눈물이라는 드라마를 보고는, 우리들 민중이, 그러나 많이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신학대학을 가지 못하고, 일상생활, 주거 안정 자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때로는 많은데, 그들이 우리 한국의 지역을, 식당을, 비변사의 사람들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신학자 이름들도 칼 바르트, 존 칼뱅, 그랬던 것이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이, 송이의 친구들처럼, 칼 맑스, 롤랑 바르트 하는 것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 극심한 가난 속에서는, 북한 청년들이 맑스의 서적을 읽었다는 것마저도, 천사는 점수를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조안나 카리스마 있어. 주원장 카리스마 있어 하는 것들이, 자꾸자꾸 그러는 것들이, 이제는, 놀라운 일본 만화 때문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금수저 효과처럼, 좋은 것이다고 여겨진다. 그 허튼. 시각. 고급과 저급의 숱한 조합. 평범한 미학이 언제나, 거주지 불분명의 사단으로만 그칠 때, 차라리 롤랑 바르트 말하고, 롤랑 롤랑 말하고, 외국 사람들 말하고, 보통 말하고, 그러는 것이 조갑제나, 마구만이나, 안창남이나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우리들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그것으로써, 비행기 같은 알 수 없는 차원의 터널을 통해서, 일본으로도 가고, 홍콩으로도, 러시아로도, 빅토르 최, 에밀 졸라, 그렇게 자기가 가고, 남들이 잡아당기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비상한 자기 조절의 초능력이 아니라, 일종의 기상 이변처럼, 때로는 득을 얻고, 때로는 화를 입는, 비경제적인 현상 같은 것일 것이다. 그렇게 내가, 누나와, 해바라기 노래를, 누나가 오후에 청소를 한 다음에 듣다 보면, 해바라기 멤버들이 갑자기 우리 집 앞에 있는 철길을 오갔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만 알고 지냈었노라고. 성경이 동양의 것이냐, 서양, 지중해 동남단의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상기의 능력,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이, 자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불러, 옛날에는 고조선, 나중에는 조선, 그렇게 불러서, 피라미드가 먼저 오고, 그리스 철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경 철학도 아닌 것으로다가, 그러나 그리스 철학, 나중에는 성경까지 오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도 잘못이 많이 있고, 우리에게서 탈주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나는 캐나다에 갈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사탄은, 그와 같은 이동을 막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막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이동을 막아야 하는 것인가? 막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문제를 풀지 못해서, 왜냐하면, 사탄은 그 부분의 회로가 막대하게 훼손이 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이 이뤄지지 않고, 결국에는 한반도 한민족의 가족주의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도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이 맞는 것이냐 예수에게 묻는 것들이 나온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그 질문 때문에 도리어 일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신학과 율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너희는 경제적인 경험도 없고, 토대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시간과 눈물이라는 소설을 보면, 일종의 주지주의적 소설이나, 모더니즘적 진행, 자의식, 의식의 흐름이나, 주체와 대상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관계, 일종의 왕가위처럼 식사하고 직진하는 뱀의 모습 같은 창발성,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의 틈만 보이고, 너무 외롭고, 힘들고, 생각이 많을 것 같고, 그 속에서 한민족의 가족주의를, 그런 이산가족 속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소설적이고, 관계적이며, 마녀적으로 저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그와 같은 진행의 논리적 끝이 무엇을 향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내가, 마녀 고백이라고 했지, 마녀 소설이라고 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머리가 아팠고, 내 누나가 그렇게 머리가 아프다고 자주 말했었다. 예쁘기만 하고, 지능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은 여자가, 자주자주 아프다고 하니까, 나는 측은함보다도 짜증이 났었다. 학력고사의 성적으로 보면,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은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뿌리 깊은 나무처럼, 소년기 때에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미정이를 사랑했던 것도, 일종의 관계와 효과적인 측면이 있어 보인다. 미정이는 날씬했고, 목소리가 낮고 차분했으며, 태권도도 잘했고, 거기서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피아노도 잘쳤고, 노래를 잘 불렀다. 나는 휴가를 나와서, 불가능한 만남의 가능성을 또한 뚫고, 뚜레주르, 만났기 때문에, 만나자고 하는 권한이, 티켓이, 인쇄가 매우 약했으나, 세상은 나만 있을 수 없고, 반은 여자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의 육체는 형이상학적 진행을 행하였던 것이다. 학교 성적도 매우 좋았고, 그것이 도무지 내게 의심이 되지 않았었다. 나의 학교에서는, 천재성으로는, 대학까지도 이미 졸업한 사람 같았었다. 여자가 두 번 죽으면, 마침내 그 세 번째의 삶에서는 진여의 남자를 찾고 싶어 한다고, 그와 같은 여우의 목소리를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학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아닌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녀와 무등산에를 올랐다. 무등산이 있다고, 반드시 오르는 것은 생각이 이상한 것이다. 무등산에 사람이 없어서, 손이라도 잡고 싶어서 그런 것인가? 도리어 다녀와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손을 잡기는 했었다. 어째서 올랐던 것일까? 산에는 아무도, 남자만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자의식은, 너무나도 깊고, 그것은 경험과 비례해서, 그와 같은 경계적인 사물들을 많이 남겨놓는다. 집에서도 혼자고, 산에서도 혼자면, 아무래도 산을 오가면서 혼자인 것이 나은 것이다. 나의 아내가, 그와 같은 능력과 축복을 받기 원했다. 죽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머리가 아팠던 것의 이유를 드디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사탄과 같다. 소설이라는 이층에 올라, 새롭게 태어날 확률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여자가 이장군을 만나,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고는, 헤어짐이다. 여자와 데이트를 하다 보면, 그만큼 공부를 못하게 된다. 공부도 즐겁고, 성희로 가득 차 있고, 승희, 여자와 만나는 것도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머리에 공부를 가득 이고 있다가, 여자에게 쏟아붓기 좋아하는 것이다. 여자는 그런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싫다는 표정을 지으면, 남자의 내면적인 회로는, 순식간에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자기가 예쁘게 가꾸기만 하면, 언제든 쇼핑하고, 쇼핑하고, 쇼핑하고 할 것 같았는데, 남자가 처음에는 쇼핑몰 앞에서 핸드백까지 들고 있다가, 나중에는 마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기계적으로 친절하게 대하면, 여자는 그와 같은 가식적이고, 가쉽적이고, 레토릭 같은 것은 잘 인지하는 편이다. 진실이 좋아서 여자들이 진실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가식적인 것에서, 여자들이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무리 친절을 다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노력하다고 해도, 처음이 신혼이, 신성이 복귀되고, 부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아무리 기다려도, 근본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시 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진행이, 도리어 의식의 흐름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처럼 말하고, 언급하고, 추상적인 사유까지도, 아마추어리즘, 그러나 진실이 있어 더욱 가치가 있는, 말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과 장면, 알 수 없는 아이들의 싸움과 싸움, 누나를 좋아하는, 알 수 없는, 좌표 불분명의 가족애 같은 것이, 결국 소설의 발견이나, 가족의 발견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 끝에서 영원한 저주와 슬픔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여자도 같은 화랑처럼 뛰어놀고, 노루 사슴처럼, 아름다운 그림들처럼 건강하고, 흔들리지 않고, 채연처럼, 항상 빨리 차분해지고, 가슴이 작은 여자들처럼 눈빛이 총명하다면,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기름이 없을 리 없으며, 신랑이 나타나서도, 마중 나가서, 만나고, 결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가슴이 큰 여자들은, 드러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디 신비한 라마승의 도움을 받아, 거기에 눈까지를 만들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이나, 김성은 인생의 파노라마, 그것이 정말 필요한 노력이고, 우리들의 정신의 정진인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 배우는 것은 가치가 있고, 이층에 이르러서는 단 하나의 선도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매우 격렬한 슬픔의 고지이다. 우리에게 철학자가 나오지 않고, 소설가만 무한 반복하다가, 결국 젊어서 사탄에 입문하는 인격이 나오고, 그를 만나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육이오 때에 우리가 고지전을 일삼았다는 것이, 분명 산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일본의 카리스마 만화 같은, 그리고 미국의 넷플릭스, 무수한 십삼일의 공포 영화보다도, 알 수 없는 작가의, 이와 같은 한국 소설이 주는 두려움과 저녁에 기억하지 못한 악몽만을 잔뜩 꾸고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것이 있을까 싶다. 그것은 슬픔이다. 여자는 대마도의 인근에서, 부산이 보이는, 한국 여자일 것이다. 그러나, 신일숙과 함께 피라미드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신일숙은 그나마 이런저런 스토리를 상상하기는 하였으나, 이원하는 도무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미정이만 똑똑한 것이 아니라, 내게 영어 성경을 가르쳤던 누나도 한 명 있었다. 찬훈이와, 정화, 그리고 나중에 서울대 무슨 과에 합격한 허명이라는 후배와 함께, 굿뉴스 바이블로 영어 공부를 하였었다. 항상 나는 나의 거룩한 자의식이, 구체적인 학교 성적이나, 실제하는 천사들 사이에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었다. 굿뉴스 바이블의 성경이 그렇게 읽기 좋았고, 보기 좋았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의 하나를 바로 쥘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의 존재는, 신학교에 이르러, 순식간에 그것의 객관적인 질서를 능가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것은 예쁜 누나였으나, 나중에는 어디서부터 나주가 시작하고, 끝나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 그와 같은 장소를 마련한 것이다. 그와 같은 모임을, 도대체 어떤 권력이, 무엇을 조사하고, 분석하여, 친구 찬훈이 마치 지금의 공유처럼, 나를 매스미디어처럼 누르고 있는 것으로 해서, 나의 슬픈 고독의 미래를 지시할 수 있었던 것인가? 찬훈이의 인간성과 붙임성은 고구마와 같았다.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그림자에 오르면, 이처럼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어 기쁘지만,

 

                                     

                                                      그렇게 무섭고, 또한 슬프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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