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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완벽한 발라드의 대결

by 마음대로다 2021. 1. 13.

 

완벽한 발라드의 대결

 

 

 

 

 

 

 

신현균 교수는 동서양의 슬픔의 시기를 그것으로 원인 삼고,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낮과 밤,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소재의 해석과 해결을 위한 실마리라고 하였다. 우리는 신현균 교수가 어떻게 세상에 태어났으며, 사태 이전의 광주를 살다가, 사태 이후의 광주를 살고, 그는 그것을 초대교회적인 삶이라고,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데, 그리고 한신대학교를 가고, 거기서도 공부하고, 음악 듣고, 음악을 걸어 다니면서도 듣고, 슬퍼하였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시, 그리고 소설, 그는 거기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경험하였고, 그것도 비사전적인 의미, 지금까지 한길사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자기가 말하고, 지금 우리가 듣고, 생각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 하셨는데, 정말 죽은 사람을 옆에서 다시 살린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처럼 암흑의 핵심 같은 것을 누구도 설명하지 않고, 곁길로만, 자신 있는 말로만, 사람들이 조금은 알아듣는 것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길이, 주된 길처럼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잘 모르는 길을, 어제의 낮과 밤에서도 묘사된 도시적 연극처럼, 잘 모르는 빌딩 방문하기 같은 것, 행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다 길을 잃었을 때는, 얼른 자기가 아는 길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친구와 영화보기를 약속하였는데,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 단성사 극장이 어디인가요? 자꾸 피카딜리 극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극장을 가면, 서울극장인 것이고, 잘 모르는 중앙 극장까지, 스카라 극장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고. 공주는 잠 못 들고. 극장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단성사, 길 건너에 피카딜리가 있다고 하면, 그제야 알아듣고, 뛰어가는 사람이 반드시 서울 사람이건, 시골 사람이건 있을 것이다. 코엑스몰에서 영화관을 간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기로 하자.

 

사람들 모두에게는 발라드가 있다. 우리가 우리들의 너무 매운 김치, 잘 익은 김치, 항아리, 동동주 같은 대중 음악에 잠겨 있을 때, 우리가 우리들의 대학사회를 거치면서, 미국의 팝송 발라드에, 심지어는 포크 송에도 빠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의 가슴에 있고, 우리의 뇌 중에 있고, 마징가 제트의 철이처럼, 영어를 몰라도, 우리의 옷이 되고, 걸음걸이가 되고, 거리를 가득 채우고, 사람들의 생명 연장을 꽉 채웠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중국에 아무런 발라드가 없을 때, 지금도 그렇다지만, 그래도, 더 아무것도 없을 때, 세상은 카나리아 같은, 카나리아 제도 같은, 일본 팝과, 한국 김치 음악, 출처를 알 수 없는 합성 음악, 서양의 전통, 혹은 유행과, 한국의 어떤 알 수 없는, 김치 냄새, 모든 사람이 죽다 살아나면, 발라드가 생긴다고, 그것의 연결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일본 문화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던 것은, 우리들의 음악이 너무 우물 속의 개구리 같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너무 앞당겨진 걱정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카나리아 제도 같은, 카나라즈 같은, 음악은 마치 미우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표현에 잠깐 적당하나, 무슨 뜻인지는 모른 채로 사라지는. 우리가 에이아이 노래 부르기 프로그램을 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 또한 비슷한 취지일 것이다. 김현식의 너의 뒷모습에서 노래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죽은 사람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 너무, 그런 강제적인 느낌으로 그리워지는 계기만 될 뿐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다는, 아직 정식 방영이 안 되었는, 그 노래는, 에이아이가 디스토피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적인 유토피아도 있어서, 그렇게 잘 어울리고,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집 뒷산에 올라, 세상도 보고, 하늘도 보고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발라드적인 시간은 무엇인가? 다만 우리들의 경제적 지배의 속국과 같은 시간인 것인가? 아니면 학교를 상정하고, 그것이 그중에 가장 음하고, 가장 악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음악 시간 같은 것인가? 그것을 위해서는, 북한으로 잠입해서, 김일성의 목을 따고도 싶을 정도인. 우리가 함께 경험했으면서도, 절대적으로 회복할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우리는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

 

우리의 서양이 그랬다. 전부 중국인들, 일본인들, 그리고 한국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들의 저항은 그리 크지 않다. 그들의 전체는, 무력은, 그리고 백과사전과 아이비리그는, 단 하나의 무적 경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겨울 만주 벌판을, 앞선 사람이 총을 남기고 죽으면, 그것을 들고 진격할 정도로, 발라드를 위해서 자기의 삶과 죽음은 개의치 않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발라드를 얻을 것이다 하는 외침도, 해남이나, 여수 앞바다에서는 그렇게 잘 어울리는 것인 것이다. 앙드레 가뇽이나, 엔니오 모리꼬네가, 우리들의 언어 습관, 말의 멈춤 상태, 그것으로도 진행하는 준 멜로디적 분위기를 어떻게 해서, 그러니까 동서양의 만남의 광장처럼만 잘 있었던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들의 판소리와, 가까운 시대의 우리들의 포크송, 발라드는, 서로 판이하였다. 사탄은 한국 음악의 도저한 흐름을 도저히, 평화의 댐처럼,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서양을 추종하는 무리처럼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도, 우리들을 괴롭히는 사탄을 몰랐던 것은, 우리들의 신분이 너무 높았기 때문인 것이다. 일본이 툭하면 지진에 휘둘리고, 세미나, 그러니까 쓰나미가 두렵게 되는 것은, 그들은 발라드마저도 사탄 소유라는 입장이 그들끼리는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얼마나 바로 이곳이 전쟁터가 되는지 모른다. 아주 비상한 사람들은, 몇몇, 그것을 예측하고, 측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얼마나 자기들이 정확한지, 자신이 없고, 또한 그것을 연구하는 모임이 없어서, 중도에 그만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발라드와 같은, 우리의 신체에서부터 나온 가지를 생각할 정도로, 의식이 높거나, 때로는 너무 단순하지 않는 것이다. 낮과 밤은 그것에 대한 에칭 같은 느낌도 있다. 나가수와 같은,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그램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는데, 나가수와 불후의 명곡의 교집합 같은 것이 빠져나가고, 불후의 명곡 남은 것 같은 것으로는, 어째서 사람들에게 지적인 삶의 연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인가? 자문하는 유일한 프로그램이자 드라마처럼도 보이는 것이다. 연세대는, 가수 싸이도 좋아하고, 걸그룹도 좋아하는 식성을 가졌다. 그러나 트로트 프로그램은, 그냥 그렇게 방송국이 실험하고자 하는 것에는, 그와 같은 애국심마저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두뇌에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도정우와 같은 차원 트래블러, 그러니까 나와 같은 음악 연구가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로나와 *로트는 오버랩이 되고 있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싱크로나이즈드의 상태에 있다. 우리는 이것이, 나 말고도 청사에 남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

 

 

어째서 평론이 발라드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와 같은 현상이, 나이가 나와 같은 오십 대를 한참 지나, 이십 대, 그리고 십 대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인가? 평론이 세계에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 사람들의 댓글을 인용하는 것은, 평론이 무너지고, 기성 문단이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론도 없이, 우리들의 부단한 핑퐁 문학, 시간, 그러니까 작품을 읽고, 해당 작품의 평론을 읽는, 그와 같은 문학 기초적인 경험도 없이, 지금과 같은 위대한 시대를 살게 된 것일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를 무수하게 인용하면서도, 우리가 복음서의 내용을 무수하게 인용하면서도, 하늘과 같은 논리는 안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화살은 새를 닮아서, 깃털이 조금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날 수가 있다. 복음서는 나이가 백이십 살이다. 성실하게 인간이 산다고 전제해서이다. 바울서신은 나이가 이백 살이다. 백이십을 다음해서 이백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출발해서 이백인 것이다. 보통의 철학서적들은 나이가 없다. 거의가 유적 판단으로 보면, 동물들과 같고, 신물들과 같다. 우리가 그것들로써, 삶을 살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사람이 여행하지 않고, 다른 책을 읽지 않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새 출발 하지 않을 확률이 없는데, 복음서와 바울서신은 수중에 몇 푼 남아 있는 것이 있으나, 철학서적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천년 동안 오십 번의 실험을 한다고 해도, 학교에서 일미리라도 벗어나면,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발라드는, 예수님의 슬픈 말씀은, 우리에게 그 오래 전의 검은색 교복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성의 같은 것은, 미스터리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슬픈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의 가난한 등굣길에, 인지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가버나움 때문인 것이다. 베드로와 안드레 때문인 것이다. 요한. 시몬. 생시몽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죄인인 것이다. 그와 같은 로마서는, 비 오는 날에, 책도 젖고, 도시락도, 김치도 엎어진 날에는 다 아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초능력과 같다. 친구와 아무것도 없는 동산에 올라, 소나무가 송진을, 마치 사탕처럼 흘리는 것을 보고, 장난하다가, 나이가 들어, 누군가의 소설 표현처럼, 향기도 그렇고, 그런 송진만 주구장창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문학하는 사람이라고, 황금빛, 아름다운 밤색, 밝은, 그런 빛깔이 되는 사람은 없다. 평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고 신현균은 처음부터 그런 것이다. 살인은 남이 저지르는 것이고, 자기는 어린 친구와 동산에 올라, 소나무 향기를 맡았던 것 밖에 없다. 인간의 죄악마저도, 사회적인 경도의 측면에서는, 필요한 요소일 것이나, 기름을 넣지 않고, 요소수만 있는 차원에서는, 아무 것도 바깥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그래도 오래 사는 방법은 외국인이 되는 것 밖에 없다.

 

그들의 모국어가 우리들의 죽음에 입혀지면,

그렇게 잘 모르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탄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서인 것이다.....

 

지능이 떨어지면, 약을 팔고, 감성이 떨어져서 잦은 심근경색에 시달리면, 공포영화를 파는 것들이 사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