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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드라마는 고발인가? 고백인가?

by 마음대로다 2021. 3. 2.

 

드라마는 고발인가? 고백인가?

 

 

 

 

 

 

 

 

무엇보다도 드라마는 나를 위한 연구, 어떤 것의 대상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의 것인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생각이 없을 뿐이지, 감정, 그러니까 비평을 따로 못할 뿐이지, 감상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드라마를 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육체파 배우들이 나오고, 심야 시간에는 이제는 가슴 노출 정도는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늘 언제나 알 수 없는, 하이어라키,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공포적인 것, 권력적인 것, 인기적인 것, 그런 것들의 순서를 따르는, 그런 드라마에 낙점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안 하면 되지 않겠는가? 작가들도 거절하면 되지 않겠는가? 감독들도, 피디들도, 광고주들도 보이콧, 걸콧, 다 하면 되지 않겠는가? 기자들도 기사를 쓰지 않으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그럴 수 있다. 그래서 드라마가 나를 위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독립적이기 때문에, 원래 존재들은, 그것이 사탄이든, 엔젤이든 간에, 독립적인 것과의 외교를 우선으로 하는 속성이 있다. 그것은 물이 보다 낮은 골짜기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내가 잘난 것이 아니라, 워낙에 문체가, 세상의 모든 독립적인 속성을 갖고 있고, 그것이 한글날 같은, 순전히 한국말을 하는데도, 귀에 쏙쏙 거의 모든 뜻이 전달이 되기 때문에, 귀에 쏙쏙, 눈에 쏙쏙 들어오는 인물들의 인생사들의 영원한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얼마나 관념은 어려운 것인가? 독일 철학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관념이 어렵다는 운명의 영원한 탑처럼 그들이 표상이 된 것일 것이다. 꿈은 어떻게 하는가? 꿈은 관념으로 이뤄진 것일까? 아니면 표상이나, 이미지들로 이뤄진 것일까? 관념이 일단, 표상과 이미지에 영역이 걸쳐 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말들을 듣고, 귀로 흘려보내는 것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고, 그냥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자신의 세포가 귀할 때, 우리가 드라마도 허투루 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세포가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오면, 드라마는 멀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의 성리학적 배분이 균형을 잃게 되면, 자신의 세포만 한정 없이 귀하게 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자기 몸이 먼저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꿈은, 프로이트의 분석에 의하면, 숱한 이미지들과, 하루 있었던 것들의 영화적인 편집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차라리 성적인 욕망이, 그와 같은 스크린과 같은 무한정한 수동체에서 벗어난 것일 것이다. 성적인 욕망이 있어서, 수동적인 스크린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미지가 적극적인 자기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성적인 욕망이 있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무수한 장면들이 조작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적인 욕망을 등한시하면, 가치 없게 여기면, 그나마 이런 기계적인 운명론이 또 있을까 싶지만, 인간 존재의, 우리가 무한한 관념들의 스크린적인 수동체에 불과하다는 진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차라리, 성적인 욕망이, 만에 하나 사랑이, 아가페, 필리아는 제하더라도, 에로스만이라도, 리비도, 그런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를 성적으로 보는 것은 도시의 풍경이다. 자탄풍, 아름다운 그런 것이다. 우리 루카는 약간은, 한국적인 소설의 계보를 갖고 있다. 한국 소설 어디에도, 그와 같은 혼종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것이다. 한국적인 소설의 계보가 없기 때문에, 따로, 그냥 계보를 갖는다고, 양반의 족보를 만들어 줄 만한 것이다. 성적인 욕망이 그나마 있었다. 우리 학생들은, 그렇게 차가웠다. 운명에 비관적이었고, 관념의 능동적인 길을 가기보다는, 숱한 시험 속에서, 시험관 아기처럼 변해 있었다. 우리가 종교에 비판적인 이유는, 우리들의 깊은 이데아가, 종교적인 전후와, 위아래를 갖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랑은 종교적인 상징을 갖고 있고, 그래서 종교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에, 천연적으로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루카는 분명 한국 소설적인 전통, 혹은 계보를 걷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 소설은, 기독교와 기타 종교 없이는, 사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는 사랑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도시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이뤄진, 조심스러운 타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막히고, 사탄이 자기들의 소유를 주장하고 나자, 피해서 들어온 곳이 소위 내가 본다는 특징들의 드라마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작에는 자유가 없다. 오직 내가 말할 때만, 자유가, 창작에도, 문학에도, 드라마에도, 이런저런 배우에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보이는 것 같을 뿐이다. 우리의 꿈은, 꿈을 꾸다가 몽정도 하고, 오줌도 누는 것을 보면, 대단히 자유롭고, 성적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몇 개의 것을 보고, 전체 꿈이 오직 그와 같은 성적인 욕망의 억압과 전치의 것이라고 보면 곤란한 것이다. 기적처럼, 오늘 드라마의 대사에도 그와 같은 것이 나온다. 개인은 집단을 어쩔 수가 없다 하니까, 집단은 개인의 마음을 어쩌지를 못한다고 맞수를 놓은 것이었다. 우리가 드라마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많지만, 그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우리가 발성기관을 갖고 있지만, 그나마 콘텍스트가 있는 자리에서 뜻을 말하는 것은, 어떠한 대학교에서도 실상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도, 그것은 아까운 것이고, 귀에 불처럼 들려오는 것이고,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서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아주 좋은, 이것도 자탄풍과 같은 풍경일 것이다. 그것은 사실 대학교에서 발성되었고, 이런저런, 전국, 중국, 그리고 전 세계, 어느 벽돌이 왕룽일가처럼 감추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전체가 아름다운 벽돌들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뜻이 지금까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잘 아는 사람처럼 구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프로이트의 책들은, 우리가 어려워하는 관념과 이념의 길로 가게 된다. 관념은 그나마 이미지이고, 이념은 우리들의 논리라는 것이 백 개 안으로 모두가 정리되는 것들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유롭게 그것들을 나아간다. 우리가 맑스를 무서워하면서도, 사탄은 이념가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면 굉장히 흥미로워하고, 좋아하고, 오랫동안 공을 들여 연구하곤 한다, 우리도 보통 권력 장치 혹은 체계와 형이상학이라면서 비판하고, 속으로 두려워하면서 연구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두려움을 주었던 것이다. 하나는 위안부와 같은 성적인 욕망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문의 그림자들을 보면, 이름, 나이, 장소의 어떤 것, 제작자들의 헌팅 같은, 일종의 틱장애 같은 것. 그리고 다른 두려움은 사람들은 권력 안에서, 매우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꿈만 꾸는, 가치가 없는, 형이상학적, 혹은 비형이상학적 개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그와 같은 저주와 운명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그의 책을, 끈질기게 읽고, 뜻을 탐색하고, 젊은이의 죽음을, 열정을, 사랑을 아까워하고, 그래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와 같은 사람에게만, 단지 그 시간만큼만 사람이라는 보편적 개체가 확정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을 내가 지오피에서 읽는 중에, 북한의 김일성이 대충 늙어서 죽은 것도, 같은 은하수의 관측으로 보면 당연하였던 것이리라. 영어로는 읽을 수 없다. 내가 읽은 것은 견훤과 같은 흙이었고, 내가 보고 있던 것은 공기와 흙, 그리고 푸르른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도, 북한 청년들이 이와 같은 책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에 슬퍼하였었다. 남한은, 명목상, 내가 읽는 것으로 퉁 칠 수가 있었다. 나는 말이 많고, 언젠가 그것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남북국력사업소, 국책연구소, 그런 것이 다 있어도, 그와 같은 슬픈 견훤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

 

 

미국의 공포 영화도 자유롭게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공부를 어떻게 하는가? 진리가 있을 것처럼 하지 않는가? 진리가 우리를 어쩔 것처럼 하지 않는가? 영화 나라에 갔는데, 시간은 주어지고, 글씨와 건물, 디자인과 자동차는 아름다우나, 말 한 마디, 성숙하게, 아름다운 성적이게, 가끔은 과감하게 가슴을 내비칠 정도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경험하였던 진리만 말하고, 경험론, 그래서 딱 경험하는 만큼만, 자료가 되고, 살아서 돌아온 것만큼만, 그램마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넷플릭스를 보고, 찬송가를 어느 때는 부르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미국 사람들의 어떤 특수한 부류는, 넷플릭스를 보고, 친구 이름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고, 우리가 앨범을 오랫동안 본 다음에 잠이 드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는 살고, 혼자, 그나마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들에게 고발하였다고......

 

 

우리가 뭐라고.....

 

 

 

 

항상 드는 생각은, 그냥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고서, 공포 영화를 그렇게 살아 숨쉬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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