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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4원소와 4원인

by 마음대로다 2021. 3. 22.

4원소와 4원인

 

 

 

 

 

 

 

 

 

 

우리는 퇴행할 수 있다. 우리가 나의 글에 민감한 것은, 행여 퇴행할까 싶어서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그리고 세계가. 앙드레 가뇽을 들으면, 내가 커지는 느낌이 있다. 그것은 고마운 것이다. 커지면서 퇴행하는 경우도 있긴 있으나, 애초에 음악이 보이지 않는 것이니, 서울대학교 앞에서 내가 거지발싸개를 살짝 내놓은 것일 것이다. 그런 헤어짐과 같은 것일 것이다. 아직도 내가 어느 부분에서 작전명 앙드레 가뇽이 되었는지, 코스모폴리탄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하는지, 애매하고, 인에비던트하고 그렇다. 우리는 퇴행할 수 있다. 미모가 그렇다. 여자들을 볼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비싼 것을 하면 예뻐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평범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한두 번 그렇다면, 어느 분위기 사나운 잔칫집에 다녀온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늘 그렇고, 항상 그러며, 영원히 그럴 것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세계적으로 인기 있었던 한국 교양 프로그램 알뜰신잡을 보면, 어느 과학자가 내 편을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직스는 과학 서적이 아니라고 한 말이, 바로 이와 같은 자연적인 퇴행을 우리가 함께 염려해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문제를 여자들이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이상하고, 그래서 그런 분위기가 항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절정으로 가꾸다가, 얼굴에 주름도 늘고, 예쁘지 않게 된 것을 보면, 마음이 그렇게 아프고 그렇다. 왜냐하면 나쁜 마음을 품어서, 평생을 나쁘게 살았다기보다는, 자기의 성에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남성성에 최선을 다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여자들이 방송국 관중들의 호응이나, 말을 들으려 하나 라디오를 튼 것 같을 때, 육칠십 년대의 영화 음악 이니셜 멘트 같은 것은 지금은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도대체 언제부터 작전명 앙드레 가뇽이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궁금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가 사나운 혼천의 멘트를 남발할 때, 여자들도 비슷하게, 감독이 시켜서도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더블딥 같은 것이다. 과거의 아름다운 여자들의 대사 같은 것도, 무의미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물 불 공기 흙을 태초 여자의 신화적 시간이었다 말한 적이 있다. 너무 오래되어서, 언제 말했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을 가지고도, 그것이 어느 원전에 있는지 찾았던 것처럼,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물과 같다. 그것은 순수하고, 퓨어하다. 투명할 퓨, 물고기 어. 민물에서 송사리가 오갈 때는 그렇게 퓨어하나, 바다에서 별로 길지도 않는 바다 장어나, 크기도 작은 해파리가 오갈 때는, 그저 그런 느낌이다. 그리고 사랑에 불이 댕겨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불이 댕겨지면, 당연히 그와 같은 주장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으나, 화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주장은 사회적이 되고, 어느 정도 전달이 되나, 자기는 화상을 입어 누구 하나 돌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그것을 과연 행동의 주체는 모르겠는가? 자연의 4원소는 모른다는 것인 것이다. 자연은 서로 모르기 때문이다. 나란히 있지만, 나무와 바위가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매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랫동안 병상에서, 아픈 상태로 누워있다가, 공기를, 그러니까 학교에서 서로 헤어지고, 새로 사귀고, 두 번 사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티브이로 남들 연애하는 것을 보는, 그런 에어의 시간을 보내다가, 그런 것들까지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종의 병법으로서의 괴물 작전이나, 남의 나라 사절이 있는 곳에, 살짝 얼굴을 보여주고 나가는 식의, 그런 흙이 되는 것이 고대 여자들의 슬픈 삶이라고 했다. 어느 특정.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과 단절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퇴행이 아닌 것이다. 전진도 아닌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것이 낫고, 엠페도클레스가 안 낫는 것이 아니다. 엠페도클레스가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전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냥 옛날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장수가, 사람들에게 슬픔의 비유를 말했다면, 시간이 조금 지나, 정말 어린아이들이 자연을 향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두고, 새로이 집필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질료가 있고, 형상, 그리고 기능(κινοῦν), 그리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철학자의 대표적인 주장이라고 하는 것보다, 이와 같은 생각하는 사람의 하나의 변천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렇게 음질이 뛰어나고, 우리에게 기능이 있고, 기능 프로젝트 같은 것이 있는지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칸트의 철학을 배우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을 함께 공부했던 적이 있다. 그것이 대학 때이고,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음악이 흐르고, 그랬을 것이다. 칸트의 이런저런 분류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의 형식도 뭔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가 잘 맞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기능에 있다. 아니면 질료에. 그러나 뭔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사람이, 에이도스, 형식적인 혜안이 있는 것이며, 처음부터 목적의 세례를 받은 학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공부하는 사람이, 잘 맞지 않는다고 여겨서 공부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보다 나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뭔가 원시인을 보는 것 같아서, 공부하는 것을 마다하였던 것이다. 원전을 읽었다면, 일종의 뭔가 잘 맞지 않는 미학으로 여겨서, 보다 흥미 있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만한 독서력이 되지 못했다. 사람은 대게 질료의 상태로 대학에 들어가고, 거기서 에이도스까지 잘 마르게 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된다. 그리고 에이도스에 갔다가, 기능에 갔다가, 에이도스에 갔다가, 기능에 갔다가, 결혼을 한다고 또한 질료에, 그러니까 휠레에나 싸돌아다니면, 목적은 그냥 삶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들의 문장이 영원히 그렇다.

 

나는 그와 같은 옅은 인식의 반복 속에서, 그 네 가지 원인을 갖고, 글을 쓰려고 할 때, 하나를 가지면, 다른 것들은 필연적으로 앙드레 가뇽이 되는 것을 감지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목적을 택했으리라.

 

언젠가는 수많은 질료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꽃들에게 희망을.....

 

 

 

저 하늘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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