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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단막극인가? 연속극인가? 조선구마사......

by 마음대로다 2021. 3. 23.

단막극인가? 연속극인가? 조선구마사......

 

 

 

 

 

 

 

 

1.

 

최근에 묻지마 폭행, 살인사건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지금 강력한 정치적 이슈가 없고, 북한 공작, 그런 것이 없고, 성적으로 답답한 마음이 결합되어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을 자극하는 것 같은 언론, 방송, 영화, 드라마까지 합쳐서. 마땅한 조작 세력이 없대도. 그리고 일본에서 엽기적인 사건들이 많고, 그것에 비례해서 발굴하니까, 우리에게도 없지 않았던 것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이고, 보편적이며, 거대한 중국 고대의 솥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약간의 희뿌연 그림자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증폭시킨다면, 그대로 미국의 도시가 되고, 남미, 그리고 멕시코, 아랍, 아프리카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조용히 통일이 될 수도 있었다. 북한이 핵만 포기한다면, 조용히 개성공단도 추진하고, 어느 아침에 일어났더니, 바이런처럼 통일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했었다. 그러나 늘 죽고, 자주 죽는, 멕시코 도시의 시장들처럼, 좀비들의 과장된 핏줄처럼, 그것들 모두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1.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싫어했다 하는데,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의 문체가, 그리고 그 한없는 볼륨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좋아해도, 우리들의 철학은 게으를 수밖에 없는데, 철학을 그렇게 달성한 다음에는, 우연적으로 민주주의를 좋아하네 마네 그런 말은 들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민주주의를 싫어했겠는가? 그것은 다만, 정확한 의미에서는, 사탄의 통제가 그만큼 치밀하고, 자기의 철학보다도 심오하고, 도저하고, 생각하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력해서가 아니겠는가? 그것이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싫어했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포를 쏘는데, 다수결로 하는 때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수결로 하는 것이 기껏해야 사람 죽이는 것에서 드러난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도 아니겠기 때문일 것이다.

 

 

 

1.

 

나는 킹덤이라는 드라마는 매우 싫어했다. 그리고 무슨 판관포청천, 청첩, 포교, 확진, 무슨 이름이 있는데, 확발, 병이 창궐, 창궐이라는 영화도 싫어했다. 하나는 돈 받고, 조선의 풍경을 재미주의와 연결시킨 것 같았고, 다른 하나는 다만 남의 나라의 어지러운 상황을 우리가 다만 똑같이 그림 그리기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괴도 그렇다. 물괴도, 우리나라 배우 시스템, 연기 시스템, 어떤 사극의 분위기를 그것들과 연결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싶었다. 민초라는 것도 그렇다. 사람들이 민증깐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나이 어린것들이, 무념무상으로 노는 것도 능력일 수 있겠지만, 그들이라고 섬세한 예술적 양심이 없겠는가? 옛날에 강동원 나오는 사극도 그렇다. 그런 것을 도대체 어째서 찍는지 알지 못하겠는 것이었다. 돈은 많고, 극작가들은 많고, 뭔가 그럴듯한 구도가 잡히니까, 그것으로 끝까지 가보자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민촌깐다. 민촌깐다. 그러면 뭔지 라틴어 같고 그렇다.

 

 

 

1.

 

육룡이 나르샤도 그렇다. 척사광 하나만 마음에 들고, 하나 같이 이상하고, 흥미는 진진한데, 묘하고, 드물고, 가수 나르샤도 있는데, 이름을 그렇게 민촌깐다. 그렇게 짓는 이유를 모르겠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다들, 리얼리즘을 향한, 우리들의 오래된 매너리즘 같은 것이었다면, 다만 민족 현실주의 같은 그물망에서 벗어난 것이, 통발에다가 생닭을 집어넣으면, 우럭도 잡히고, 문어도 잡히고, 장어도 잡힌다는데, 사람 몸뚱이만 한 장어를 잡고, 그것을 먹기 전까지 얼마나 깊은 충격에 빠지겠는가? 단정한 물고기 떼 사냥을 하지, 그물을 길어 올리지, 통발 같은 것은 자세히 보면, 정신질환 걸리는데 지름길 같은 것이다. 가난한 부부가, 통발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으로는, 눈물을 감추는 것일 수 있겠으나, 재미 삼아 잡다가는, 문어는 금방 없을 무 자 같고, 장어는 사람 인 자 같은 것이다. 이념이 없고, 더더욱 관념도 없는 이들만 정신이 똑바를 수 있는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 같은 것은, 다만 척사광이 나올 때만, 한예리처럼 예쁠 수 있었다. 만일 이런 우리에게 진짜 좀비 비슷한 인간 현상이 나타나서, 리얼리즘적인 힘을 얻고, 어떤 수사관적인 진지함이나, 의사적인 안타까움을 동반해서, 재미와 낭비의 좀비적 현상에서 영화가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한 내가 좋은 글을 써서, 사람들이 또한 좋은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그런데 그만, 연속극은 아니어도 좋을, 조선구마사 일편이 그렇게 수준이 높고, 피를 토할 것 같은 진실성으로, 태양을 향해 들어가는 해인사의 박력을 연출하는 것 같은 것이었다. 나는 순간순간 눈물이 나왔고, 징비록도 물리치고, 차이나는 클라스, 선을 넘는 한국사 강의, 칼의 노래, 손 더게스트, 그런 것도 다 물리치는 것 같은 쾌감을 맛보았다.

 

 

 

1.

 

한글이 백척간두에 걸린 것을 두고, 이제는 일본도, 중국도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우리가 자유를 느끼는 때는, 반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가 착하기도 하고, 여자도 아름답게 사귀는 것을 볼 때인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잘하다 보면, 착하지 않다는 것을, 그런 가능성과 현실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들의 자유도 많이 삭감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낭만주의가, 형식주의에 대항한 것일 수도 있고, 고전주의를 반해서 나온 것일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일종의 혼돈주의 같은 것이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오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조선구마사가 처음으로, 정말이지 내가 본 것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낭만주의의 종을 맹렬히 치고 흔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전주의도, 그것이 비평적인 대계이자, 철학자의 포맷인 것이지, 소설이나 드라마 작품 등이 고전주의로 말 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와, 그에 전후하는 작품들이 고전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주의는 경전인 것이고, 정확히 문학과 자기를 구분 짓는, 문학적인 현상을 가리켜, 고전주의이고 그것의 본질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낭만주의가 되고, 맹자가 고전주의면, 논어가 낭만주의인 것이고, 열자가 낭만주의이면, 순자가 고전주의가 되는 것이다. 고전주의는 죽음과 같고, 낭만주의는 삶의 숫자와 같다. 보통의 사람들이나, 작품들에서는, 그와 같은 숫자가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티비를 보고, 환호하는 것은, 우리가 조선시대 고전적인 배경을 좋아하는 것은, 그와 같은 논개적인 열정 때문인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일본인 장수와의 낭만적인 사랑으로 결론이 날 확률이 매우 높은. 하지만 솔직하다면, 사람들의 생명이 될 것이지만, 그와 같은 구조에 약하고, 자기의 육체에 솔직하지 못하며, 천주교적인 위선에, 그런 백척간두의 위세에 사로잡혀 있다면, 영원히 눈 뜬 장님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장님이고, 심청이 아버지로부터 죽는 것이 눈을 뜨는 것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가 되겠는가? 고전은 옛날의 시간을 가리키고, 낭만은 현재를 가리킬 때가 많다. 그래서 징비록 같은 것은 고전주의 드라마 같고, 드라마 고전주의 같고, 킹덤이나, 이번 조선구마사는 첨단의 낭만주의적 경향의 사극 드라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한글에, 신비로운 시공간 안에, 영원한 양파 세포, 현미경 학습 같은 중학생 시간에, 지금 칼이 꼽혀 있는 것이다.

 

 

 

1.

 

고전주의는 이동하는 영혼처럼 분류될 수도 있다. 우리가 과거에, 김민종, 신승훈, 이문세, 이승환, 변진섭 노래를 이동하면서 들었듯이. 처음에는 낮과 밤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는 손 더 게스트, 다른 드라마가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의 연결이 저녁 깊은 벌판을 가로지르는 열차 같아서 잊히지가 않는다. 루카에서. 그리고 아직 드라마가 끝이 나지 않은 시지프스.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어째서 사극이 이와 같은 현대극과 과학극 비슷한 것과 연결이 되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다만 무차별적이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우리 인간 존재는 다만 차원의 이동이 가능한, 부분적으로는 철저히 사물과 같아서일까? 낭만주의는 즐거운 동물성과, 사물성, 표면적인 아트 같은 것을 허용하고, 실험하는 것이 있다. 고전주의는 상대적으로는, 인간성에 대한 집중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경전이 있고, 낭만주의도 문자가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대게가 깊은 물감을 던지고, 뿌리고, 묻히고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경전을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오랫동안 읽고 있으면, 그것이 고전주의의 끝인 것이고, 그들이 소설을 읽고, 시를 쓰고, 때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낭만주의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논어 대한 언급이 없이, 난을 그리고, 세한도를 그리는 것은, 추운 낭만주의 같은 것이다. 수많은 선비들이 고전에 주를 달았던 것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는 좋은 낭만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보니, 그 에너지의 숨찬 흐름 속에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세계를 염려하는 우리들의 자리에, 처음으로 그 과거의 고전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소생하게 된 것일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해석일 것이다. 고전주의는 표현이라고 하지 않고, 해석이라고 한다.....

 

슬픈 선율은, 그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고, 남자인데도, 쓸쓸한 소나무 숲을 이동 중에 아이를 낳게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관련이 있다고 해서, 아이가 태어나서, 바로 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실인 것은, 그와 같은 현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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