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타는 다방지
어째서 우리들의 육체는 단순한 기호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부여라는 것도 그렇고, 말갈이라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어째서 우리는 그와 같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도리어 혼란이 짧고, 상당한 시간을 이성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훌륭한 이성이 아니라, 단순한 기계적 이성이래도 그렇다. 기호는 고통스럽고, 기호는 보이는 것이다. 기호는 환상적인 것이고, 기호는 미래적인 것이다. 우리가 전쟁 이후에, 아무런 기호도 없을 때가 있었는데, 그나마 수많은 기호가 우리들을 채운 것이 아니겠는가? 기호는 스피드와 같다. 기호는 거울과 같고, 기호는 어린아이와 같다. 기호는 클래식 음악과 같고, 기호는 좋은 짐작과 같다. 기호는 외국어와 같고, 기호는 꽃과 같다. 기호는 기호학파와 같고, 기호는 남명 조식과 같다. 우리는 기호코, 독일 유학을 떠나, 헤겔의 형이상학을 배울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기호 속에서 회전하고, 기호 속에서 죽는다. 사람들은 기호 속에서 같은 말을 하고, 기호 속에서 같은 말을 했는지를 까먹는다. 사람들은 기호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나 기호 속에서, 지금의 청소년들이 우리들의 젊은 시절 노래만큼 행복한 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여간 마음 아픈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맑스주의와 역사주의, 그것과 기호학과 해석학의 갈림길 사이에서, 그 시간 속에서 잠깐 보았던, 인간이 기호가 아닌가 하는 천연덕스러운, 그런 극도의 생각까지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기호가 아니고, 우리가 다쳤을 때, 우리를 고쳐줄 수 있는 외과의의 숱한 도구들이 기호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그런 말에 동의를 할 수 있다. 동의대.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육체까지도, 기호라고 한다면, 무의식과 유의식의 차이가,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적잖은 형이상학적 비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대학을 다닐 때, 도대체 어떤 학과의 학생들이 이와 같은 가공할 만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궁금한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면, 그들은 이미 대학원생이고, 이미 조교급이 아니겠느냐고. 왜냐하면, 학생의 신분에서는, 배우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그것의 정확성과 적확성의 차이. 학생과 서점 직원 간의 차이. 그러나 끈끈한 우정 같은 것이, 분명 기독교적 종말이 찾아오기 전의 광화문 광장에는, 연가에는,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결절점을 놓치고 만다. 굉장히 중요한 것이나, 친구가 일단 바쁘고, 전화를 했더니, 여자 문제로 바쁘고, 혹은 취직 문제, 혹은 술 문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말 뇌의 한 부분, 벽돌이 조금씩 가루가 되는 현상, 그것은 유명한 중국 현상이긴 하나,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없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벌써 소외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그런 말을 받아줄 만한 해안마을이 아닌 것이다. 원래, 문학동네가 어울리고, 점원이나, 객주,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장객주, 그리고 파타고니아, 아슬란 전기, 그런 해외여행이 그나마 스펙타클한 것이다. 캘리그라피가 눈물의 흔적일 수도 있다. 우리가 눈이 내리고, 김현식, 비가 내리고, 추적추적한 아스팔트의 저녁 풍경을 볼라치면, 남자들도 적잖은 비감에 휩싸이는데, 여자들은 더욱 그러한 것이다. 어딘가에 가고 싶고, 어딘가에서 더럽혀지고 싶은. 그렇다고 교수가 아는 것 같지는 않다. 교수가 견고한 건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 생각하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 굉장히 자기들끼리 바쁘고, 논문을 발표하고 나면, 사람들이 그와 같은 화이트 헤드 영원적 객체를 향해 마땅한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이 가졌던 기호주의적인 두려움, 비전을, 적극적으로 관심 가져줄 만한 인물들이 될 수 없고, 그래서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서울의 안 서울성과 비슷하다. 서울에는 인간이 있지, 서울은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형이상학적으로 서운할 때, 그리고 때린 사람은 없어도, 맞은 사람은 있는 것 같을 때, 비로소 서울이, 그런 우리 서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흐름, 그런 맥락. 정답은 말하지 않고, 그런 흐름, 그런 맥락의 장광설만 펼쳐도, 문예사조 수업 기말고사의 열 문항 모두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해도, 가난한 서울의 문학과 교수는, 정답 처리를 해줄 것이다. 백점 만점이라고 한다면, 그런 말만 똑같이 열 번을 쓴다고 해도, 칠십 점 이상을 채점해줄 것이다. 우리는 학교가 시지프스의, 어린아이들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시간 설정 속에서, 처참한 공간으로 비친다고 해도, 담쟁이넝쿨이 교실까지 들어온 어느 교실 안에서, 시험을 치른다고 할 때, 그중에, 열 명의 학생 중에, 한 명은 미친 사람이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미쳤다고 해서 침을 흘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유명한 정신 나간 회사원이고, 그러니까 회사를 멀쩡히 다니는데, 약간 풀린 나사처럼 어딘가를 싸돌아다니는, 문학과를 팔아먹은 유다 경제인, 그것의 시작은 사실 중학교 때부터일 수가 있다. 문학과를 가는 친구를 앞에 두고, 취직도 못하는 곳을 어째서 가려고 하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유다의 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만일 교회도 다니지 못했다면, 경제학과 출신 같은 목사의 설교가 있었대도, 성경에 노출될 확률, 학교와 교회가 신성 일치를 보는 시공간 안에서, 절대 알 수 없는 음성인 것이다. 유다의 음성인 것이다. 그래서 주된 입장과 자리에 늘 조금은 있다 보니까, 마침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된 것이다. 양복을 입고, 일 년에 한 번은 대학 문학과 세미나에 참석을 하는 것이다. 헤겔과 하이데거 세미나에 참석하고, 삼 년 정도 되니까, 저녁 뒤풀이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슬픔에 젖어 있고, 영원히 자기는 그와 같은 철학적 논변과, 신학적 표현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적 논변과 신학적 표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들 학과의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선배가 되어서, 그와 같은 애굽에서 탈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가 구보씨일 수도 있고, 구보씨가 만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여자가 아름다우면, 경제는 원래 돈과 자동차이기 때문에,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려고 하면, 항상 그에게 문학과를 나오셨느냐고 묻는다. 비가 오면 그와 같은 찻잔, 물컵, 접시나 포도주 잔 같은 것이 금세, 수족관처럼 변하게 된다. 처음에는 아닌 것이 잘 마른 것 같은 현대인의 느낌을 주었지만, 북어, 결혼을 앞두고, 점점 생태처럼 변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을 팔아먹을 때, 선녀들이 붙는다는 것을, 그와 같은 언변의 현상에서 경험하였다. 문학을 팔아먹을 때, 경제까지도 변한다는 것을 한국 땅을 밟은 일본인 장수처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정결하면, 또다시 예수님의 부자 청년처럼 변하면, 지식도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 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인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과에서는 누군가 신학과 같은 사람이 있고, 신학과에서는 철학을 기가 막히게 하는 학생이 있는 것이다. 국문과에서는 영어와 영문학을 기가 막히게 하는 선배가 있고, 음악과에서는, 음악과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울둘목처럼, 이순신 장군님이 그나마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결여를 두고 아무런 생각이 없다. 생각의 기치를 내걸 때, 비로소 드라마 시지푸스의 문제제기가 사실로써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마치 한글을 읽듯이, 제이티비씨 하는. 그러니까 알파벳이 연상되지 않고, 뭔지 김 씨 박 씨 하는 것 같고, 그런 제이티비씨가 있는 것 같은. 관계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그나마 전공은 잘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말에 화살이 저 멀리에서 날아와 가슴에 박히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가 지하철에서, 이어폰으로, 요즘 유행하는 무선폰으로, 바하의 프렌취 숱을 듣는다고 할 때, 그 바쁜 음표들은 모두, 바로 그와 같은 화살을 고르는 소리인 것이다. 그래서 관계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나마 전공은 잘했다는 소리겠네? 하는 화살이 몇 개 날아와, 그러니까 골랐다는 것인데, 그나마 한 개는 마치 향기로운 디퓨져 스틱처럼 지나치지만, 두 개 세 개가, 스피박처럼, 우리 가슴에 박히는 것인 것이다. 순간 우리는 죽는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계속되면, 지하철도 계속되고, 우리는 아름다운 서울을 그렇게 누군가의 부축으로써 계속 지날 수 있는 것이다. 서울이 아름다운 것은, 지방에는 군자가 있대도, 자기 방에는, 지방자치제, 조금이라도, 친구만 만나려고 해도, 관계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말을 조심하고, 몇 개씩은 적당히 침묵하고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고 할 때, 지방에는 금세, 공포의 위세를 만날 수 있지만, 서울은 환하고, 금세 프렌취 숱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전공도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세상이 비참한지 모른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고, 서울과 지방의 절묘한 만남 같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생각보다 교회가 지방에까지 많은 것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것일 것이다. 죽음의 가장 큰 특징은, 죽음의 의식이 없다는 것일 것이다. 관계의 가장 큰 특징은, 끝없는 의식이고, 끝없는 생명일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끝없는 생명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을지로에서, 저녁에, 전경과 학생들이 함께 그 비싼 페퍼고그를 쏘았던 것은, 그와 같은 끝없는 생명에 대한 표시였을 것이다. 직장은 반드시 가야하고, 우리는 반드시 시험 문장과 같은 벽돌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 또한 국군의 날에 정신 분열할 수 있고,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날에 일어나 피크닉을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 다방 영화가 많았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최인. 우리가 그것의 소재를 천하게 여겼지만, 따지고 보면 그만하게, 아름답게 시간을 마감한 민족도 우리 민족, 우리나라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공과목일지라도 심화하다 보면, 오픈 북일 때가 많고, 다방지가 무의미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문학이 무조건 다방지 문학일 수는 없는 것이다. 형용사일 때는 그나마 황산벌에서 계백과 그의 군사들이 끝없이 싸우는 것 같지만, 명사 몇 개를 비평에서 구사하려고 하면, 금세 관계가 되고 마는 것이다. 관계는 섹스인가? 자세히 보면, 도리어 안 그럴 때가 많은 것이다. 영화 만추도 그렇다. 젊었을 때 김혜자가 나온 것도 그렇고, 최근 중국 여배우가 나온 것도 그렇다. 그러니까 다방 레지에서 더욱 나간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 여자 영화 같지는 않는. 대학에서의 전공은, 정확한 대사로서가 아니라, 파편적인, 그런 겨울 여자나, 바보 선언 같은 것이다. 장미희의 황진희가 나올 때는, 황진희가 대학생인가 하는 격렬한 논쟁이 우리나라에, 여성문학적 대립과 갈등, 격전지 속에서 과연 있었는가 하는 것이 반성되는 것이다. 죽음의 가장 큰 특징은, 죽음의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해파리와 같고, 그것의 뇌와 척수를 닮은 기호와 같다. 상징과 같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머리 둘 곳이 없는. 해파리를 말씀한 것이냐 예수께 물을 수도 없는. 그래서 이천년 이후의 여자들이 숱한 유의식 속에서, 죽을 때까지 춤을 추었던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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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이 어른의 기호를 갖고 흥분하는 것은, 어른들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래알의 갯수만큼 제멋일 확률이 있다. 그러나 기호를 넘어서지 못하고, 금세, 정말 몇 년 있다, 의식이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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