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의 생각
우리는 엑스트라 아르바이트처럼 산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수염을 붙이고, 옷차림을 지급받고, 저녁 시간이 다 되도록 이 장면 찍고 저 장면 찍고 한다. 그 세트들이 지금 활용하면 안 되는 것처럼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문짝을 달면, 정말 여닫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집에 도통 보내주지를 않고, 어떤 절정 장면까지를 찍는데, 몸이 너무 피곤하여서, 조심히 어떤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잠결에, 총소리도 나고, 또 나고, 다시 찍겠습니다 하는 소리를 듣고, 그랬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티비를 보는 것은, 실은 티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직업의 구멍은 너무 닳게 되면, 점점 지식이나, 감각을 잘라내는 속성이 있어서, 그것을 실제로 느낀 나머지, 티비라도 켜놓고 잠이 들고자 하는 것이다. 보통 가난한 집 아버지들이 다들 그랬다. 뉴스를 보는 것도, 드라마가 어떤 때는 직업의 구멍처럼 닳고 닳아서 그랬을 수도 있는 것이다. 뉴스도 그렇게 된다. 보통의 미국 뉴스가 인종 차별이 아니면, 그것은 정말 끈질긴 적과 같아서, 그것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지식의 쏘스를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짝 일찍 죽는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것은, 어린아이가 드라마를 보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막 발간되는 잡지, 혹은 모델, 자동차, 그렇게 드라마를 보는 것은, 완전하고 온전한 것에 대한, 지식은 없기 때문에, 감각이 살아 있어서 그럴 것이다. 우리가 심은하를 기억하는 것은 다만 팔월의 크리스마스 때문이 아닐 수 있다. 드라마 엠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은 다만 드라마 더블유가 그렇게 만들어서 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수봉아 이름을 부르던 장면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그 두 드라마 역시 우리 사회를 비추는 음각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가 양각의 것으로서, 우리의 역사와 사회를 비추는 경우는 거의 없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주 길게, 아주 많이, 아주 많은 사람들을 연기시키면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주장하려고 하고, 조금이라도 이야기 속의 시간을 줄여보려고 하면, 금세 음각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미국의 과거 헐리우드 영화가 그렇게 그들의 경제적 절정과 함께 양각이 되고, 도리어 공포나, 에스페로, 에스에프 영화가 양각에 일조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캐롤 송 같은, 누구 하나는 혼자 집에 있는 것으로, 상대적인 기쁨의 절대적인 쏘스를 기약하였다면, 지금은 그것에 대한 회상과 함께,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원래의 음각이 드러나고 있다 하겠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양각 사이에서, 영화관에서도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우리 삶은 퍽퍽하고, 영어로가 아니라, 홨더, 지칠 때, 그들이 크고 우람한 불꽃놀이를 하면, 로봇도 나오고, 수많은 자동차들이 질주를 하면, 그것이 양각처럼 보였던 것이다. 터미네이터 투에서, 그렇지 않은 미래를 우리에게 고지할 때, 우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미성숙하고, 어린 우리들에게, 자기들끼리 진실의 기도를 행했던 것이, 드디어 서로, 우리가 아구찜을 먹을 때, 수많은 콩나물들을 맛있게 먹듯이, 그것들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서로 아구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음각은 나쁜 것인가? 아니면 양각은 좋은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살짝 먼저 죽어 있을 때, 그것의 대중적인 현상을 놓고, 그것이 양각이든, 중각이든, 혹은 음각이든 간에, 자기들의 고민만을 먼저 그리고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두 번 먼저 죽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뉴스까지도 닳고 닳았을 때, 우리의 감각이 더 이상 전체를 가지지 못할 때, 그것이 또한 철학적 인문관 혹은 미학적 세계관의 입장에서는 유명한 것일지라도, 영화는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동시에 가장 정확하게 죽이기도 하는 게 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세미오틱스가 원래 그와 같은 운명이라고 한다면, 계속해서 죽다 살아나고, 죽다 살아나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싶겠지만, 드라마 루카의 이번 주 내용을 보자면, 작품의 우리를 향한, 그의 점령인지, 아니면 고발인지, 아니면 고백인지 모를 내용의 총체를 놓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고학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슬픔은 피직스에도 있고, 메타피직스에도 있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나는 피곤하였지만, 처음 경험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도 있었을 것인데, 이미 국내에서 손꼽히는 작가가 된 나머지, 전개되는 내용에 대한 따분함 같은 것도, 거기에 덧붙여서 있었던 것일 것이다. 드라마를 찍고, 그렇게 사람들을 뛰놀게 하고, 사람들을 납작하게 하는 것이 싫었던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나의 뇌에는, 늘 형상이면, 바로 언급이다 하는 삶의 템포가 있었던 것 같다. 신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독립신문일 때는 나와 비슷했지만, 닳고 닳기 시작하면, 자기들끼리 결집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금세 나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었다. 작가들, 드라마 작가들도, 서로 따로 국밥처럼 살지만, 그들이 발표하는 면면을 보면, 마치 기계에서 합동 노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부품적인 긴밀함이 상당하다 하겠다.
기아 K8이 기가 막힌 무슨 티저? 루틴? 필름처럼 지나고 있고, 어딘가에서 소녀들이 일렉트릭 노래하고, 춤을 추고, 현대에서 IONIC 5를 내놓는 것이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마구니가 끼어 있는 것이다. 마구니가 끼어서, 유튜브에 나와있는 케이에잇을 보고, 그랜져는 다 죽었어 하고, 아이오닉 파이브를 보고는, 거기서는 미국 사람들이 테슬라는 다 죽었어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은, 늘 죽었다 살았다 하고, 낯선 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구하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한 학생은 방송국에 죽지 않았다. 그래서 방송국이 모든 프로그램을 동원해서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원래 서울 사람도 아니었다. 사람이 백 퍼센트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아버지의 직업조차, 매력에는, 어떤 허브차에는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가족의 경제 능력 같은 것도, 낯선 사람에 대한 인상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 필요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 대학 이년 이후, 군복무시절에 돌아가신 것이다. 서울에서 오피스텔 작은 것을 하나라도 갖고 있으면 그렇게 그가 반갑고, 한번 놀러 가 볼 것인가 한다. 그러나 그는 반지하에 살고, 큰 방은 성질이 사나운 형이 살고, 그는 일쩜 오 평짜리, 마치 홍콩의 새장 집처럼, 기가 막히게 작은 방에서 사는 것이다. 그래도 그에게는 매력이 죽지 않았다. 그것은 마테차 같았다. 우리는 친구에게 기가 죽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 한양대를 다니는 친구가 있었으나, 그가 그의 기를 죽이는지, 기를 살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양대를 다니는 친구가,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어려운 시험들을 모두 패스하고, 변호사가 되었어도, 승승장구, 그는 기가 죽지 않았고, 죽음 앞에서도 매력이 죽지 않았다. 생명은 매력인 것인가? 그리고 방송국은 지금까지도, 그를 죽이려고,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총동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사람은, 방송국에 죽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티비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 태초부터 그렇게 울었는지 모른다. 모든 문학이 사실은 티비를 지향하는, 사탄의 한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앞당겨진 죽음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만 미학적 주장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에 대한 감각이 가장 크고 아름답고 행복한 것인 것이다. 그것이 죽는다면, 인간은, 부분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죽음을 일찍 대출받으면서 죽는 것이다. 같은 함수를 미국 영화에도 대입할 수가 있다. 한국 청년들은 미국 영화를 좋아할 수가 없다. 미국 영화는 그와 같은 입각점의 모든 끝에서, 한국 청년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영화의 변화를 읽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놀랐던 것일 수 있다. 그래도 어떻겠는가? 처음으로 그 청년은, 지금은 나이 오십이 되어, 장년 중에 장년이 되었지만, 장년은 서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청년 삼십대라고 하면 어색해서, 마흔은 장년이고, 육십은 노년인 것이다. 인생은 노년에서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백세 시대라고 하면, 육십에서부터 백세까지 노년으로 나머지 오십 년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그 청년은, 지금은 장년, 처음으로 드라마와 탈 드라마의 훌륭한 존재의 능력을 가지고, 그가 서울에서 공부할 때의 종합적인 감각, 전체에 대한 사랑, 한신대 출신의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을 준비 중인 기가 막힌 하늘과 우주, 그렇게 넓고, 그렇게 높았던 때를 상기시키는 듯한 드라마를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자기는 죽음을 앞당기지 않았으나, 다들 그렇게 앞당기고 사니까, 루카라는 드라마는 우리 안의 피를 거꾸로 흐르게 하는, 어떤 혁명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결국 부분에 안착시키고, 전체는 선입견이거나, 우리들의 일방적인 사랑, 우리를 죽이는 것이고, 미국 영화는 그와 같은 어법의 최첨단인 것이다. 자칫하면 한국어를 쓰는, 그런 존재의 아주 표면 같은 것에까지도, 방사능에 노출될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서울을 걷다 보면 따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힘이 없는 양각이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그다지 들지 않지만, 성욕 때문에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것은 일종의 유미주의 철학 같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드라마 안에서 죽지 않고, 드라마 밖에서도 그런 뜻 밖의 음각적 현실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목욕탕에 다녀오고, 팔월의 크리스마스 어느 장면처럼, 서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이상한 설문지 같은 것을 받아서, 자기가 지금 이 이성을 성욕으로 만나는지, 아니면 그냥 만나는지, 작성을 하고, 라디오처럼 다만 따분해서 만나는지, 그것이 생각보다 점수가 좋지 않아서, 그 알 수 없는 사람이 그들에게, 차라리 그럴 바에야 화끈하게 미국 공포 에스에프 영화 같은 것을 보세요 하는 진단의 말을 듣는 것이다. 우리는 커피를 마신다. 커퓨라는 단어를 아는, 그런 사람들이 몇몇 있을 것이다. 잠깐 전기가 흐를 뿐, 그것도 사실 좋은 방향이 될 수 없다. 좋은 생각이 좋은 방향인 것이다. 커피는 우리를, 리스트 사랑의 꿈, 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렇다면 모든 들어가는 것은 죽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을 스치면서 지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보면, 우리는 어렸을 때, 영어도 못하고, 국어도, 국문학도, 서양미술사도, 하이쿠도, 철학 같은 것도 못하고, 성경은 언어학적으로 사람들에게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어렵고, 성스러움과 성적인 것을 같은 것으로 전기 반응을 하기에는, 그럴 확률이라는 것은 차라리 밤하늘의 별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그러니까 모든 스쳐 지나는 인연처럼, 하나였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소주 처음처럼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문장이라는 것은 원래, 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를 가두지 못하고, 곧장 죽도 밥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와 같은 말들을, 마치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생각의 메시지와 속도가 근본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문체를, 그것이 처음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교정. 수많은 출판사들이 대학교 교정을 해주기 때문에, 악필과 난문까지도, 그것을 통과하고 나면, 시대를 선도하는 문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스치는 진리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어제 드라마에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내용의 전개도 또한 앞당겨진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인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것은, 그것을 도중에 끌 수 없어서인 것이다. 영화관에서 일하고 있던 아가씨가, 내가 영화 도중에 나가는 것을 보고, 어째 영화가 재미 없으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이 나를 하루방처럼 만들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영화가 나중에 비극이 된다면서요. 그래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시간에, 나오고 말았다고 하니까, 여자가 트로트 어느 노래 가사처럼 쓰러지려고 했다. 나에게는 레토릭이 없고, 나에게는 진실함만이 있었다. 그래서 행여 그 아가씨가, 나중에 다른 남자와 사귀다가, 그 남자가 영화의 끝까지 내내 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그런 정신병적 세계에 마침내 주화입마가 되어서, 자기에게 이상한 입장을 자주 선보이고, 내비치고, 평범한 자기를 자꾸 어떤 것으로 만들고 하다가, 헤어지게 되었다면, 자기는 살짝 다쳤는데, 사고가 나서, 자기는 반년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면, 얼마나 내 말이 듣기가 좋고, 그립고, 그렇게 자신있게 혹은 쫓기듯이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나겠는가? 드라마의 내용에는 나의 행적이 슬픈 사진처럼 담겨져 있다.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며, 작가, 연출자, 조연출, 방송국 국장, 그런 사람들이 나의 그 에피소드를 갖고 열띤 토론을 했겠는가? 다들 내가 과했다고 했겠지만, 나의 순수함은 크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토리는 다만 빌딩의 스토리와 같고, 작가가 조금 다르고, 철학자는 사건과 사고를 모르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꾸 행복한 것만 생각하는 철학자라는 것도, 인류 역사의 비극적인 연속을 알게 되면, 달리 보이게 되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접시꽃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나름으로는 예언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달달한 것으로는 그와 같은 시가 나올 수 없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비극을 좋아하거나, 철학만을 문 닫고 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얼마나 우리는 드라마를 보고 좋아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국문학적 연속성을 알지 못한다. 김윤식이 이광수를 연구한 것이 그렇게 잠깐의 연속처럼 보였었다.
모든 전국 도시의 시향들이, 오케스트라 연주회들이, 음악적인, 음각적인, 양각적인 의지인지 모른다. 창원시향이라는, 이름은, 다만 그 이름만 가지고도 기분이 좋다. 광주시향이 연주를 잘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선곡은 좋으나, 늘 언제나 약간 기괴한 느낌을 선사한다. 나는 그들이 간첩이 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서울 시향을 볼 때마다, 나는 잠깐 음각이고 양각인, 그 핏줄들을 본다. 만족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나, 광주시향이 그저그런 연주를 할 때마다 짜증이 났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타는 다방지 (0) | 2021.03.12 |
---|---|
드라마는 고발인가? 고백인가? (0) | 2021.03.02 |
완벽한 발라드의 대결 (0) | 2021.01.13 |
인간이라는 두 글자 (0) | 2021.01.09 |
이론이란 무엇인가? (0) | 2021.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