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는 무엇을 위해 있는가?
신구 음악이라고 있다. 그것은 내가 지어낸 것으로서, 신비스러운 음악을 가리킨다. 하지만 신비는 너무 신비스럽고, 익숙하지만 신비스럽다는 것을 신구스럽다 할 만하다. 신구대학교도 있고, 원로 탤런트 신구씨도 있고. 무엇이 신구 음악일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만파식적이 아무래도 내가 말하는 음악을 연주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도서관을 갖고 있어도, 연구실 비슷한 것을 집에 갖추고 있어도, 저녁에 밥 먹고 잠자는 것은 매 일반일 것이다. 그래서 루카 같은 드라마가 위세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어째서 재미가 없는지, 의미가 없으면 어째서 의미가 없는지, 개연성이 없으면 어째서 들개 포획에 오십만 원 없는지 하이텔이나 그런 데에, 그날 저녁에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좋고 넓고 지적인 모던한 집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대한민국 주권자로서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저녁에 꼬냑을 마시고, 진지충, 저렴한 그런 뜻의, 포도주를 마시고, 잠을 그냥 자면, 불법 자금으로 돼지처럼 사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까 공부할 때는 행복한 필론의 돼지처럼 문제제기를 제법 하다가, 학생 때는, 돈을 벌고 살면은 금세 사극을 보다가, 마침내 이상한 사극도 아닌 원시 대륙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또다시 바이러스 판결이 나고, 일본이나 미국처럼, 그것들이 자기 집을 찾듯이 세를 과시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모던한 집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그려질 수 있고, 방금 절체절명의 초현대식 건물의 연구소에서 나오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산을 쓰고, 얼굴은 그냥 아저씨 같지만, 약간 한석규를 닮았다. 말은 자유롭지 못해도, 음악적 의지가 강하고, 규율이 불쌍하리만치 강한 사람들은 그만한 필체를 갖는다. 그러나 문학하는 사람들은 대게 초서체를 갖고, 초서체 안에다, 해서체를 심는다. 먼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들에게는 그만한 자유가 없고, 계속해서 자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자유로의 귀신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만주와 더불어, 일본 북해도, 대만, 산동반도, 인도네시아, 필리핀까지의 느낌을 갖는다. 말이 먼저인가? 의미와 친숙함이 먼저인가? 우리가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미국인 같아서가 아닌가? 미국 사람들이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고추장을 좋아하게 된 것도, 누군가의 지적처럼 갑작스러운 느낌이 있는 것이지만, 양념치킨을 일 년 내내 먹었던 이력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갑자기, 고추장 맛이 익숙해진 것이고, 쉑쉑버거에도 그것을 가미하게 된 것일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은 값진 것이고, 매우 신구스러운 것이다. 일종의 오버랩이나, 데자뷰 같은 느낌. 우리가 남태평양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남태평양 시민이래서가 아닌가? 하물며, 일본 사람들이, 대만이나, 중국 중경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호소력, 그러니까 호랑이의 능력을 가진 말씨, 감정, 인정, 그리고 논리가 될 것이다. 팔월의 크리스마스가, 우리들의 안방에서의 능력, 학교에서의 낯설기 하기,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죽음을 갖고, 우리의 의도는 아닌 것처럼, 세계 인문 대중에게 호소력을 펼친 것처럼, 영화는 한 편씩이지만, 비록 절대적인 시각성을 갖는다 해도, 나의 호소력은 그냥 앉아서, 길을 가듯이, 연구소를 나오듯이, 티비를 그만 보듯이, 그 격정에 이끌려서, 쉽게 쓰는데도, 그것이 있고, 택배 상하차 업무가 발생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감마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문명의 절대적인 규율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높이는 있으나, 수평이 있고, 달성도 있지만, 우리 식의 진행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론이 지금까지 그토록 없었던 것일까? 평론도 진심이고, 작품도 진심인데, 작품의 진심을 내가 높게 평가하는 것처럼, 때로는 셀 수 없이 많은데, 평론은 다만 이런 것이 평론이다는 건물 느낌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작품은 차라리 들인 시간만큼 마침내 이뤄지고, 그런 마침내 이뤄짐성으로서의 쉬움이 있고, 어째서 평론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곱슬머리처럼 영원히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일까? 작품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평론성의 입구에서, 평론성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의 천연적인 빛깔을 평론성을 대신하는 것으로써, 그런 피날레를 갖는 것으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원래 작품성이 높게 드러났던 것도, 평론들이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해줘서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오랫동안, 우리는 평론적인 독립성, 이분법적 정분법성, 대위법적인 불친절함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노래가 아름다웠다면, 노래에 대해서도 쓰고, 그것의 정신이 드러나고, 아프리카 사람들과 오랫동안 걸어보는 한국인 여행객처럼, 그냥 자기만의 글쓰기를 쓰고자 하고, 그러다가 가끔 우리나라 노래가 인용이 되는, 그런 인격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저 사람은 누구 빠는 아닌데, 신승훈, 오정현, 박진태, 다만 우리나라 노래 빠는 된다고. 노래는 못 불러도, 배 나오고, 잠바 입고, 비올 때는 우산을 쓰는 것이, 우리들의 대중가요의 나이 먹은 아들은 된다고, 그렇게 참칭이 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드라마는 어떠한가? 아직도 국문학은 자기들의 순수한 학문과, 작품과, 그들끼리의 매관매직, 그런 매직쇼에 갇혀 있는 것일까? 드라마 평을 기가 막히게 해서, 별명이 드라마곤이라는 사람이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그래서 쓰리쿠션은 우리들의 허영이었던 것이다. 누구도 장르나, 범주, 그것들의 생활세계적인 언술을 펼치지 못한다. 집으로. 집으로 들어가면 사라지는 수학적 포켓 순열에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 쓰리쿠션이 지나갈 때면, 우리는 빛이 사라지지 않는 것 같고, 하루에도 세 여자를 만나는 것 같고, 세 여자끼리는 서로 미워하지 않자는, 일종의 당산대형, 신사협정을 맺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쓰리쿠션의 힘은 대단해서, 사탄 앞에서 힘을 잃는 인간들의 무리와 운명을, 거대한 스크린처럼 보게 하고, 그와 같은 원인으로서의 보편성에서부터 표현할 길이 없는 감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한국어 쓰리쿠션은, 이미 등장인물들이 훌륭하고 멋져서, 그 자체가 아름다운 음악 같다. 인간이 그와 같은 지명이나, 조건, 음식을 맛있게 먹은 다음으로 날아가는 학생의 저녁 기억이 없을 뿐......
작품이 기억에 남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사탄의 지배 때문일까? 아니면 무의식 중에 수학적으로 기표되어 있는, 사탄을 무찔렀던 기억 때문에서일까? 사탄에게 죽을 때, 선배들은 기뻐하였다. 힘이 없어서. 아니면 기술이 없어서. 아니면 마땅한 막강한, 마태, 마가, 누가, 무기가 없어서. 우리들 선배들처럼 탱크가 없어서. 그것의 원한이 흑표까지는 왔다. 거기까지는 일반 의지와 몇몇 선별된 개별자들은 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준장. 소장. 아니면 원한만 갖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던 것일까? 한국 사람들이 서양으로, 문학이나, 철학, 신학 유학을 떠나서, 그것들의 맘모쓰 같은 양적 질서를 이겨내지 못했을 때, 그들은 기뻐하였다.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 되기 전에, 아주 희미하지만, 그것의 단차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학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의 해안마을 같은 그릇이 없어서인 것이다. 그것은 남자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선정적인 대상은 아무래도 여자일 것이다. 지나치게 표현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아무런 꿈도 희망도 가지지 못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여명의 눈동자에서의 채시라. 그리고 모래시계에서의 고현정. 고현정이 그래도, 죽기 전에, 마치 그것의 단차처럼, 계속되는 표현의 압박, 의식의 증거, 무르팍 도사에 나와서, 콧물을 쏟아냈던 것은, 그래도 배우의 액션의 보다 연결된 좌표 속에서, 어떤 유기질로서의 흔적을 남겨보려던 심보가 아니었겠는가? 동물들은 자기들끼리는 알아듣는 이름을 남기면서 죽고, 사람은 죽어서 혜린의 테마, 그와 같은 간절한 심보를 남기면서 죽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그와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인접 공간을 드디어 발견하는 듯하다. 얼마나 순정 부품 만화 같은가? 그래도 기억이 많이 난다. 테이프를 넣으면, 지금처럼, 조나단 스위프트처럼, 스킵하면서 들을 수가 없다. 천주교인들은 가슴에 십자 성호를 그리면서, 그치겠지만, 다른 개신교인들을 내가 몰라서, 나는 말과 글의 종말론적 처절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 공부를 하다 보면, 늘 그것이 암암리에 드러나고, 읽는 이에게 유언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해석학 수업은 아름답고, 리처드 팔머는 금쪽같고, 그리고 나의 존경하는 선생님, 그리고 최신한 교수, 그리고 플라톤의 소피스테스 강의, 그것들의 하늘은 파미르의 고원만 같다.
사람들의 육체는 육체의 육체의 육체의 단계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나의 육체는, 다만 숨만 쉬어도 육체인 것인가....
그래서 경찰들은 나만 보면, 세상 드라마적인 창의 자유 안에서
미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아니라면 저팔계의 스윗 홈일 듯......
*
어떻게 모든 말이, 문장 안에서, 사전 같을 수 있겠는가?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고,
그것이 내 쪽에서 갖는 미안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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