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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우리는 어째서 익숙한 이야기들에 잠 못 이루는 것인가?

by 마음대로다 2021. 3. 5.

우리는 어째서 익숙한 이야기들에 잠 못 이루는 것인가?

 

 

 

 

 

 

이야기라는 말은 원래 익숙한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익기. 익기 그랬으나, 중세까지, 아마도 고려 현종 때까지, 그러나 그 말이 너무 익은 것이라든지, 새의 날개라든지, 그런 것만 있는 것 같아서, 야 자를 가운데에 집어넣으니, 왠지 모르게 우리들이 지금 사용하는 이야기의 뜻을 띠는 것 같아 사람들이 좋아하였을 것이다. 억기, 이여기 그러면, 어둡고, 이야기 그러면 고양이처럼도 들리고, 밝고 환한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승냥이라는 말도 있고, 붉은 산의 삵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었다. 아이들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던 신임 교사나, 교생 선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냥 이야기도 수업보다는 재밌어 했다. 그와 같은 뇌는 오래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할 때는, 이것이 다만 수평의 이동인지, 아니면 공부한 것에 대한 보답인지, 아니면 분명 어느 시간에 측정이 되는, 진학 위주의 학교 공부와 그것의 지배가 아니라, 순수 이성의 실질에 걸쳐, 시간의 부재 같은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지프스는, 시시푸스, 시시포스, 그와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공부만 하면, 반드시 노예 과학자들이 된다. 노예 과학자들은 블랙홀과 같은 것이다. 관측은 되지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멀리 있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비상한 능력이 있다면, 다만 관측의 사실만 가지고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선생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는 때가 있다. 우리는 수업을 하지 않으니까, 딱딱했던 기분이, 금방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생의 철학처럼 환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무가 되어서, 아침부터 들었던 수업들 모두를, 주렁주렁 매다는 느낌이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약간 공부를 못해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흐르는 눈물이 감추어지지 않는데, 돈이 많고, 상대적이지만 재벌인 여자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약육강식을 당할 것 같은 여학생은, 그와 같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해주는, 함께 걸으면서 해주는, 다부진 마음씨의 남학생이 좋은 것이다. 그러느라고 집에 조금 늦게 들어가는 것까지, 프랑스 혁명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숱한, 그때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만 섭취를 하다가, 갑자기 폭증하기 시작한다. 천번 째를 넘긴, 너무 숫자가 작은지 모르겠으나, 만번 째를 넘긴 자위행위를 두고, 뇌가 반응하는 것과 같아서, 익숙함과 레토릭이 발견이 되는 것이다. 여자들이 좀더 진한 색깔을 선망하고, 때로는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과 싸우고자 하는 것도, 그 처음의 육체와 마음이, 그렇게 좋았던 때를 기억하는 것인 것이다. 처음일 때는 김춘수의 꽃과 같은 시도 좋다. 정말 엄마야 누나야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우리 개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시온성을 지나고 나면, 지나고 있을 때면, 좋았던 사람들도, 순전히 좋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싫게 되고, 짜증이 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비판 철학을 연습해야 하는 이유는, 그와 같은 순수와 어리석음, 문학적 단순함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적 반복이 가져오는 정당한 불만족의 속도와 양에 걸쳐, 도리어 순수의 공기를 지키고자 하는, 개인과 공동의 의도일 수 있는 것이다. 밤낮으로 이야기를 짓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남자는 그런 남자를 싫어하게 되어 있다. 다른 직업이 보다 리얼하고, 천착하고, 생산성이 있고, 국가적이어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계속 이야기를 짓는 뇌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상하게도, 남자들의 우등한 육체는 감지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순간 같고, 섬뜩하고 하는 것이다. 한나는 그림 속에서 기도를 하고, 나는 관념으로 나아갔다. 관념조차, 세상의 지배에 걸쳐서 보면, 한낮 아지랑이에 불과한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죽음 앞에서 늘 기도한다. 우리가 텅 빈 건물들을 존재의 무의식에 걸쳐 좋아하는 것은, 런닝맨의 모습이 제삼세계의 모습으로도 보이는 것은, 그것들에 우리들이 시험관 아기처럼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문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처음과, 나의 여자 친구가, 그와 같은 좋은 흙에 아직 있기 때문인 것이다. 대놓고 정토종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종 최후로, 목사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매력적이고, 아직도 우리 문학이 정격적으로 탐방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교생 선생이 학생들의 협박에 못 이겨, 첫사랑과 마약한 이야기, 성적인 이야기, 그런 것을 한 것들의 수준은 몇 개 기억이 난다 싶다. 이형식이 다른 두 여자들과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닐어 우니노라 하는 것은 기억이 난다 싶다. 하지만 흙에, 그 안에 어떻게 묻히는지, 아담이 눈 뜰 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학교는 뭔가 하고 싶은 것들의 무의식인 것 같고, 처치는 누군가를 처치한 것들의 사탄적인 강요만 같다. 학교는 그래도 우리말 같고, 처치는, 갑자기 우리가 처치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일까? 띠올로지는, 어떤 가수가 노래를 부르다가, 발성 중에 허리띠가 끊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어쩌면 그와 같은 이야기로 모두 증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린아이는 이기적이다. 늘 먹을 것만 찾고, 아버지가 힘들게 일했어도, 여대생이 다만 학교에서 공부만 했는데도, 손에 든 먹을 것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이야기는 이기인 것이다. 익기는, 밥이 익는 냄새와 같고, 전라북도 익산과도 같다. 군산이라는 말도, 그것의 어원이 이야기에 있다. 숱한 이야기들이 넘실대는 숲에서, 바다에서, 사람들의 정신을 되돌려놓는 의사가 이성계와 그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방원이 이성계의 아들인 것은, 우리에게 문학이 없을 수 없다는 하나마나한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성계도 없고, 그것을 지난 이방원도 없는 것이다.

 

 

내가 삼국지를 기억하는 몇 개의 이유가 있다면, 그 중에 하나가 원소일 것이다. 원소는 승냥이를 알고, 과학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원소 상태로만 그 모든 것을 수집하고, 원소 상태로만, 그것들을 미래에 던진 것이다. 사마천이 원소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미친 듯한 비이커와 플라스크, 그런 것들만 보인다. 내가 내게 묶인 모든 시간을 통과해서, 삼국사기를 모두 연구하고, 드디어 사마천의 사기까지 읽는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싶다. 원소를 알면, 원소가 된다. 우리가 사랑을 알면, 사랑이 되는 것처럼. 어린아이 때는 원소밖에 없다. 소년과 소녀가 사귀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사랑이 다만 원소처럼 시므리와 같기 때문인 것이다. 사랑은 이야기에 있는가? 아니면 원소에 있는 것인가? 함석헌의 씨알사상도 그렇다. 그의 사상은 어떻게 진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만, 땅도 아닌, 우주에, 씨알 상태로 인지하는 것을 타자적으로 의지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기어코 흙을 찾고, 색을 찾고, 여건을 찾고, 인정을 구하고, 말을 서로 맞추고, 정권에 아부하고, 꼬리 흔들고, 지나치게 성적인 사건을 좇고, 처음에는 기자가 재밌지만, 기자지구에 휩싸이고, 차라리 너무 멀어서 공부하게끔 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기사 쓰고, 적어도 기자지구를 공부하는 이격감, 기어코 이야기를 만들고, 처음에는 이야기가 좋지만, 비평도 없고, 비평가를 학대하고, 홀대하고,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것만 좋아한다면, 그 씨가 조금이라도 싹이 트면 문제가 아닐 수 없지 않겠는가? 나의 원소가 천년을 죽었다. 천년을 아부하면서 지내던 인간의 피가, 사람의 시에다가 붙이는 무수한 더러운 이야기를 그나마 간파하고, 그와 같은 시인을 죽음으로써 높이고, 실은 먹고자 하는 것인 줄은 아직 모르는 상태여도, 종이는 한번 만져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십자가를 내리고, 주변의 군인들과 싸웠던 것이다. 기가 막히게 운이 있으면, 그리고 무술 실력이 이연걸이나 이방지 같았으면, 살아서 탈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무용담을 사탄이 좋아했다면, 그것의 의식이 낮과 밤과 같아서, 그것들이 짜증나더라도, 전체를 따먹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도리어 길을 내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고 죽었다 하나,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한 례 두 례 세 례와 같아서, 네 례하는 것은 약간은 사투리 같아지는 것이다. 원소가 어느 나라 장수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공부 중에, 이런 것은 정말 소설로 표현하면,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대단히 문학적 가치가 있을 것 같다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원소는 다이아몬드와 같고,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탄소와 프레스에 비례하는 것일 것이다. 처음에는 다만 기초 의식과 같았더라도, 워낙에 나 같은 사람이 원소의 시간에 걸쳐,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다보니까, 우리들의 뇌의 능력도 어느 정도 뇌살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 원소가, 다만 하늘을 향해 원구단을 구성한 것일 수 있다. 비슷한 사람들이 많을 때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만, 죽음의 인간 옆에서는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형이상학적 좀비 존재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쾌락주의적인, 일본 에이브이적인, 원소적인 성격도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중세가, 문맹을 천년 넘게 실험한 것도, 반대로 말하면, 자연적인, 원소적인, 시적인 꽃과 같은 성격이 분명히 우리 인간들에게는 있는 것이고, 사탄의 지배와 실험이 그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써, 시간적으로까지, 노출시킨 것일 것이다. 원소는 쾌락에 취해 있고, 죽음과 예술에 취해 있다. 그래서 그들 세계에서는 기라성과 같은, 유비 관우, 그나마 그런 것들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시황제와 나의 시황제의 내용이, 관점이 다른 것도, 그가 중국 원소의 비극을, 정말 중국 사람처럼, 가슴 깊이 품고 있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