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와 서울대
나는 노년에 동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가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동경대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말이 그렇다 할 때, 오사카 대학이나, 게이오 대학 등이, 자기 대학의 여학생들이 예전부터 동경대보다 예쁘기로 정평이 나있다 할 것이다. 교토대학이 특히 그렇다는 소문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단순하여서,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다. 나는 나의 말의 향기를 맡아본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나에게서는 여학생 장미 향기가 난다. 그것은 욕망의 상호 침투와 비슷한 것일 것이다. 장미는 전통이 있고, 역사가 있으며, 각 나라마다 레전드가 있다. 그러나 천재적인 상징학 교수가 있다면, 그것들 모두를 현대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지막 꽃이기 때문이다. 튤립과 국화, 그리고 무궁화와 장미, 그것 중에 제일 빠른 꽃이 장미이기 때문이다. 장미의 진짜 이름은 단미이다. 단미는 아름답고, 단미는 향기롭다. 우리 사는 세상에 대학이 그렇게도 많은데, 어째서 서울대학과 한신대학만 있는 것인지, 서강대도 있고, 이대, 연고대, 중대, 홍대, 그렇게 대학들이 많은데, 경희대, 어째서 서울대학과 한신대학만 성경에 언급될 수 있는지, 안타깝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나는 그냥 신학대학, 약간 루즈하고, 약간 성경적인 그런 분위기, 다른 하나는 그냥 입시위주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그런 것이면 끝이 아닌가? 낭떠러지에서 서울대는 그런 분위기를 내게 주었다. 처음의 것은, 내가 서울대학 대학원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와 같은 경기장이 있는 줄은 평생, 지금까지 진정, 알지 못했고, 처음부터 나는 아무런 근본이 없는 성경 부자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늘구멍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기름기는, 동탁은, 기름 부은 자는, 그것이 진정 세계 공기와 어떻게 세포 호흡을 하는지 지금까지도 미지수가 아닐 수 없다. 두렵고 떨리면, 항거하지는 못할지라도, 세포의 힘이 빠지게 되어 있다. 우리가 부자들을 좋아하는 것은, 부자들은 춥고 가난한 시절이 닥쳐도, 이불들을 많이 덮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먹는 것과 입는 것, 타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 처음의 어린 시절을 지난 다음에서이다. 그렇게 나의 서울대학교가 슬프고, 안타깝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항상 새벽을 보고, 티비는 별로 보지 못하고, 그것은 대학 때에도 비슷한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존재의 비율로 여긴다면, 서울대학교에서도, 지성의 빛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진부한 대학생의 빛이 아니라, 십 분의 일이 될 것이다. 그것에 양심이 개입하면, 그것이 나쁜 측면이든, 좋은 측면이든 간에, 힘이 빠지게 되어 있다. 그것에 외국어가 개입하면, 그것이 나쁜 측면이든, 나쁜 측면이든 간에, 수많은 탭스, 힘이 빠지게 되어 있다. 더구나, 남들 흔한 부자 지식 권력의 아버지를 두지 못한 서울대 학생인 경우에는, 힘이 빠지는 속도가 더욱 빠르게 되어 있다. 여자를 사귀게 되면, 마침내 델릴라처럼, 우리는 꼼짝없이 연자 맷돌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꿈에서는 그들을 물리친다고 하지만, 서울대학교의 샤 정문처럼, 그것은 오직 표상적인 현실인 것이다. 대화를 너무 나누다 보면, 학문적인 난황 속에서 길을 잃고, 목소리가 여자가 되는 것을 샤 경험할 수 있다. 두껍게 내야 하는 것도, 알레테이아의 관점에서는 여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비행하여, 화려하게 오가는 것을 간파할 만한 존재의 힘을 잃게 된다. 서울대와 건국대가 붙어서, 결국 책보다는 건물의 힘이 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속으로는,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는, 건물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것이다. 정원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도 있다. 서울대생도 아니었으면서, 나는 정원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 같다.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하면 나는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 과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을까? 내가 만일 진리에 관심을 가졌다면, 나는 정말 관현악단의 기생 오래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의 섬뜩한 육체는 오직 문학적인 주제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뒤늦게 이와 같은 이상한 공간, 그리고 경쟁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서울대를 상대로 지금까지 글을 써온 것일까? 우리가 보통 종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나는 종이를 아낀다. 나는 종이가 언제나 울어있다. 나의 기만이, 나의 표상이, 나의 거짓된 말이, 때로는 그들의 화석화된 진행보다 나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깊이 없음과, 그들의 단순한 두보 연구에서보다, 더욱 희고, 우리 사는 세상에 눈을 뜨는 것 같고, 그들의 셰익스피어 연구보다, 우리 이전의 동등됨을 취하는 제스처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별명은 썩어도 준치가 되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제한된 라스트 쉽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빛이, 방송국이다. 라스트 쉽도 돌과 같고, 방송국도 돌과 같지만, 우리들의 의식은 늘 숨가쁜 것이다. 방송국은 중대였을까? 아니면 홍대였을까? 우리의 생각은 폭탄처럼 잔인하고, 우리는 죽음 앞에서 못할 말을 모두 꺼내놓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교회를 사랑하였지만, 객관적인 항목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불교문화를 사랑하였지만, 불교문화를 사랑한 사람 중에 나 같은 이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머리를 길렀고, 다보탑을 다섯 배의 크기로 지었고, 석가탑에는 내가 좋아하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로만 가득 채워놓고 있었다. 신도들에게는 돈만 받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오면, 사람이 마중 나와 그것을 대신 주차하였다. 부처님을 보통의 관광객처럼 보았고, 나는 나의 이층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불교문화를 사랑한다는 사람 중에, 그런 소설 중에, 나와 같은 이가 없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울대 학생들에게 기호학적 외지인이었고, 나중에는 샤 삼촌이 되었다. 이 모든 게 재밌고, 슬프고 그렇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는, 가장 먼저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기름과, 공기, 그리고 지속하는 논리로 되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까이 있으면, 대게가 지워지는 그림자이나, 우리나라의 확장과 함께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다 보면, 정말 아버지의 호기심이 되는 것이다.
항상 아버지의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궁금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어떠한 고문에도 발설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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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배움의 강변, 그와 같은 모래 무지 위에서, 수많은 진행들의 만곡점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운전을 해서, 지능이 모래가 되는 사람들이 있고, 마치 노련한 여행가처럼, 피곤을 도리어 에너지 삼아, 재밌는 것들을 담는 사람들도 있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장점이 있고, 남자는 남자로서의 장점이 있는데,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은 꽃들의 환영을 받는 이는 당연히 여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엑스축에서 시작하면, 당연히 단순한 자동차 한 대와, 차박, 겨우 연료비만 있는 진행은 와이축이 되는 것이다. 시는 아버지와 같고, 음악은 헨델 어머니와 같다. 우리가 여행가들이 많아도, 학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대게가 여행적인 클리쉐가 되기 때문이다.
나처럼 동해에 이르러, 아침에 해를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여자였으나, 거기서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것이 되는......
구체성의 역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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