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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작가란 무엇인가?

by 마음대로다 2021. 2. 8.

작가란 무엇인가?

 

 

 

 

 

 

 

 

 

 

보통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하지 않는가? 대나무로 만든 못. 그러면 옆에서 그냥 크기가 큰 못, 대못 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다. 사람들은 비평이 있어서 사는 것일까? 아니면 막무가내의 보고 듣는 작품이 있어서 사는 것일까? 세상 돌아가는 슬픈 일들을 보면, 다 나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도, 더 자세히 보면 우리들이 보는 드라마들과 그렇게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좋은 것은 무엇이고, 그래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다 그리스도의 도가 전해지는 길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말씀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본 사람들도 그렇다. 사탄이었는데, 사탄에게 당하면, 결국 그리스도의 도를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먼저 그리스도의 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좀 더 정확하고, 사실적인, 뜻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어째서 사탄이 좀 더 거대한 사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이 사탄이 되는 것을 우리는 모르는 것일까? 결국 전도라는 것은, 사탄끼리의 세력 싸움에서 비롯되는 인간적인 각성이라는 것인가? 작가는 이 세상에 무엇이고, 숱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억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새해를 맞이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린 청소년들이, 나중에 국문학과에 지망해서, 이문열을 조금 보고, 자기에게 문재가 있음을 발견하고, 자기에게 보이지 않는 길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렇게 타자기나 컴퓨터 키보드가 없으면 다중적인 의식이라든지, 글쓰기, 속도성이라든지, 만족감, 그런 것이 없었을 것인데, 세종대왕 컴퓨터가 나오고, 한글과 컴퓨터가 나오고, 드디어 이문열이나 황석영, 그런 사람들보다도 눈에 보이는 드라마 작가에게 그것의 원형적인 끌림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슬픔 큐비즘 같은 것이다. 그것은 슬픈, 슬픈 미술관 옆 동물원 같은 것이다. 나의 말에 전기반응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미술관 옆 동물원이 있고, 올드보이가 있었던 것이다. 올드보이만 하늘에서 똑 하고 떨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 짱가라는 만화가 있었지만, 작가는, 잘 가라는 말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이다. 작가는 사람의 숫자와 같다. 하루 저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계 사람들이 보는가? 사람 목숨을 좌우지지하는 사탄들이 보는가? 작가는 시인과 다른가? 어렸을 때는 시인을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시인을 싫어하게 되어 있다. 그것도 약간은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 평론가는? 비평가는? 문예비평가는? 비평가는 어려서부터 상을 받는다. 우리나라 말이 그렇게 미래를 점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학교로 가서 일을 도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시락도 받아 가지고, 수박을 서리한 다음에, 누가 놓았는지 모르는 계곡의 평상에서, 도시락도 먹고, 수박도 먹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을 날아다니는 환각과 환청보다는, 가까운 도시로 친구의 차로 비행하여 다녀오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쓰레기이거나, 배설물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에게도, 그와 같은 운동의 주도권을 선물하거나 하면, 표정이나 생각 등이, 빠르게 어른들을 닮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 종일 공부로 지치게 하고, 두려움을 감출 수 없게 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세포의 점막이나, 형상의 원형질에 마음이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 루카는, 계속해서, 자세히 보면, 그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많이 진열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나의 비평은, 그와 같은 고통스러운 대위법이 있고, 그런 형상들 안으로, 음악이 흐르는 절체절명의 기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의 비평을 읽은 다음에는, 신문에 나오는 비평들을 사람들이 읽을 수가 없게 된다. 대단히 훌륭한 비평조차, 어느 때는 불평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나의 비평은 그렇지 않은가? 버려진 학교 같고, 그 안에서 아직도 학생들이, 그림자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가? 그것은 레토릭인가? 그러니까 기술. 연애의 기술. 혹은 사랑의 기술. 아니면 기억의 어떤 증류수 같은 것인가? 나도 처음에는 그것이 궁금했고,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잘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최근에 갑자기 그랬다면, 그와 같은 기술법이, 그렇게 되었다면 어색한 것이고,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면 이상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스테레오 타입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 것이다. 입체적 성격이라는 누군가의 오래된 표현이 있기는 있지만, 비좁은 성격론에서는 입체적일지라도, 어색하게 연기하면 더더욱 편협하고 단편적이 되는, 그와 같은 한계를 벗어나, 의미와 구조에 걸쳐, 문학적 본질에 걸쳐 입체적이 된다고 하면, 드디어 그와 같은 입체성에 햇빛이 드는 것일 것이다. 입체적인 것의 특징은, 스토리적인 단절이 상시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스토리의 어색함으로 여긴다면, 드디어 우리들의 옛날 작품의 성격과 일반적인 이해를 상기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부단한 단절을 도리어 연극적인 기법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여기서부터 평범한 시청자와, 고급한 독자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인데, 평범한 시청자는 스토리가 어색하지 않아서 재밌고, 고급한 독자는 스토리가 어색해서 더욱 좋을 수 있는 것이다. 입체적이 되어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비친 것은 슬픈 작가인 것이다. 나미의 슬픈 작가. 그렇게 어색하고,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로 불렀지만, 노래 자체가 좋아서 많이 리메이크가 되었지 않은가? 셰익스피어의 연극들이, 비극들이, 자연스러운 스토리가 있는지, 아니면 고급한 어색함이 있는지 아는 이가 없다.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탄과 비참함, 고통과 한없는 슬픔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리어왕이나, 햄릿, 그리고 오델로는 유럽 사람들 같다. 한국어 왕이라고 지칭하면, 리어왕이 한국 사람들 같겠지만, 내용은 전형적으로 슬픈 유럽의 스토리들 같다. 이와 같은 단호함. 세상의 어떤 비평가가, 버섯구름과 같은 현상을 무시하고, 총체적인 형이상학을 지명하고, 그것의 영향을 언급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맥베쓰가 그렇게, 서예하는 사람 같다. 서예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쓸어내리는 것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펜은 그렇지 않다. 펜은, 펜싱. 그렇게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서예는, 사람이 어둡고, 의식이 사라지는 영역까지를 비쳐주기 때문이다. 근본적이라거나, 근본이 없다거나, 뿌리가 있다거나, 지오프리 초서가 있다거나, 하는 것까지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의 서예가를 만난 적이 없다.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서예를 잘하면, 그렇게 신기하고 자랑거리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저녁에, 자기를 때리는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는, 아무런 말 없이, 작품도, 비평도 없이, 밝은 빛의 화랑 안에서, 레깅스를 입은 여자를 좋아할 것 같은 남자가, 서예를 기가 막히게 하는 것 같으면, 띄어쓰기, 그리고 어떤 자유, 사람의 말에, 유가증권이 있고, 정치적 암시가 있고, 내일의 권력이 있음을 알아서, 저녁에 집으로 가다가, 스토리가 단절되어 버리는 것이다. 작가가 그것까지 말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예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얼마나 사람들이 달마처럼 슬픈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시를 써도 알아주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그것이 무슨 유가증권이고,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첫 단추와 같다. 우리가 첫 단추에 배부른 경우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예술이 남자에게 있다, 여자에게 있다, 논쟁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시를 써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남자들에게서나 발생하는 불평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으나, 도리어 그와 같은 방향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중성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와 같은 절대주권의 감각이나, 그것에의 자기 확신이 없다 보니, 처음부터 사금과 같고, 처음부터 거의 모든 가로등의 숫자와 같은 것이다. 남자들은 헤겔만이 철학자이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가 아니나, 여자들에게는 철학자들은 다 철학자들인 것이다. 절대권력과 싸운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싸운 적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은 남자들의 독특한 신경증이거나, 미신, 신화적인 정신병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사탄과 싸우다 보니, 다만 숫자만 무한하게 세거나, 옛날 일을 기억할 수는 있어도, 가치로써 분별하는 것이 약한 여자들은, 그와 같은 문법이 놀라울 따름인 것이다. 여자들은 여자들과 결혼한다. 아합이 그래서, 이세벨과 결혼한 것일 것이다. 예후가 그렇게 서예를 잘했다면, 드디어 여성성 안에서 남성성이 벼락처럼 발견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은 종이도 없고, 붓도 없고, 글씨가 세로로 그렇게 날씬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먹물을 오랫동안 갈았던 것도 이상하고, 그것이 점점 더 윤기 나는 검정색으로 바뀌었던 것도 이상했을 것이다.

 

 

 

우리 사는 도시의 사람들이 다 그렇다. 평생을 어색하지 않는 스토리나 찾으러 돌아다니고, 어색하면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비평은 불평처럼 하고, 그런 불평이 자랑스러운 친구들이나 만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끝이 나도 좋다.

 

내 이런 글을 읽고, 라라랜드의 슬픈 노래를 듣다 잠이 들면,

세상의 모든 스토리가 사라진 사람의 눈에서

종교를 가진 어머니와 싸운 자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