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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어째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걸으셨는가?

by 마음대로다 2021. 6. 21.

어째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걸으셨는가?

 

 

 

 

 

 

 

 

그것은 신화와 같다. 우리들의 문학이, 우리들의 국문학이, 늘 형사취수적인 성격만 띠고, 화제나 좇을 때, 그들도 나처럼, 푸코의 인식쏘를 찾는 여정을 분명 떠났을 것이다. 우리가 만두를 먹을 때. 대충 김밥에다 라면만 먹어도, 성찬이고, 나그네의, 박근혜의, 별 생각 없는 무의식적 박목월의, 그런 것이었지만, 우리가 서울을 지키고, 서울을 수복한 다음에는, 아무런 식당에서, 적당한 수준의, 맛의, 음식을 먹는 것만도, 코만도, 기쁜 일이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철학을 떠났을 수 없었고, 음악에 빠지면, 훌륭한 연주자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해병대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다. 우리가 우리들의 말로, 스스로의 인식쏘를 찾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항상, 그러나, 그것이 항상, 쉽지가 않았고, 어느 지식인 영화의 초창기 영화들이, 그것의 슬픈 비급처럼, 안타까운 여자 주인공처럼, 적당히 공격성을 제외시킨 대상과 무대를 배회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것은 목표치가 아니었고, 그것은 일종의 반영 같은 것이었다. 어째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걸으신 것일까? 손오공도 아니고. 육공도 아니고. 단지차도 아니고. 우리가 가장 기쁜 거리를 다녀온 다음에는, 중고등학교에서, 집으로, 여학생은 없지만, 여선생은 있고, 고등학교에는 없지만, 중학교에는 있는. 그와 같은 기억이 있는. 학교에는 없지만, 교회에는 있는. 교회를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의 성정이, 저 멀리 보이는 여중이나, 여고를, 무의식적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서로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 그와 같은 전자기 같은 것을 모두 버리지 않고 모을 수만 있다면, 세계는 발전소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신경을 쓰고, 신경은 에너지이며, 일종의 전기차인 것이다. 얼마나 우리가 신경을 쓰는지, 드디어 전기차가 나오고 말았다. 집에 왔을 때, 물을 마셨고, 잠깐 잠을 잤고, 티비를 보았다. 티비를 보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와 문화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백교 같은 것에나 빠졌을 것이다. 명명백백교는, 그와 같은 발전소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들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 명명백백교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소문으로, 일제에게서도 무관심 도루를 할 수 있었고, 한국 민중들에게서도 그랬을 수 있다.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있을 수가 있었고, 뭔가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그런 세계정신의 한국 지부인 것 같은 느낌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밤낮으로 티비를 보다 보니, 명명백백하게, 명명백백교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정도에 멈출 수 있었다. 우리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다음에는, 다음의 일과와 과제가 생기는 것처럼, 티비와, 방송, 언론, 그리고 불특정을 특정하고, 그것에 명백한 법리 같은 것을 사람들이 경험하고 나니, 항상 그것들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걷다가, 축지법을 쓰고, 사람들에게도 그것의 방법을 가르쳐주었다면, 세상은, 클레오파트라,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러니까 축지법이라는 것을 조금만이라도 가르쳐주었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내가 말한 것처럼, 관심의 소비가 있고, 관심의 중심이 있다. 관심의 소비에 계속해서 관심이 소비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자전거 무슨 시험, 조사,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한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꾸 재촉을 받아서, 정상으로 나왔다고 대충 둘러댔다는 일화가 있다. 항상 관심의 소비가 있고, 그것을 영향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관심의 중심은, 걷는 이의 이마와 같고, 가벼운 잠바와 같으며, 학교가 사라진 다음에도, 작은 책상에, 마치 젊은 시절처럼, 읽어재낄 수 있는 이론서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헤겔을 읽다가, 쉘링의 종교철학 책을 읽는 경사 같은 것이면, 휴지심의 절정이 아닌가 한다. 커피도 타면, 사람들을 홀릴 것이고, 월급 받고, 바이크 여행을 여수로 가볍게 다녀오며, 저녁에 잠이 오지 않는다면서, 일기를 또한 더블리 가볍게 쓴다면, 사람들은 명명백백교의 위대한 재탄생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다만 과장이거나, 이미 과장과 사장의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것이 그저 표현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관심의 중심은 그렇게 슬프기 때문이다. 구마라습도 내게는 우습게 되었다. 나는 문건은 존숭하나, 모든 전기는 다만 일렉트릭쇼크 같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건조차, 아무개의 절정에서는, 그것의 전기와 연결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어떠한가? 또한 매월당 김시습은 어떠한가? 맵고 달고, 어떤 맛있는 음식이 그렇다며, 그것을 먹고 입으로 바람을 흡입하는 것이, 그의 시의 전부라는 소리가 아닌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그리고 변경은, 그리고 시인은, 아무리 봐도 이문열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공유 같고, 기형도가 이름이 기형적이지만, 시가 그의 이름의 의미적인, 우연적인, 그리고 작가와 시의 관계의 필연적인 모습에서, 힘을 받고 있는 것처럼, 차라리 아가라고 하는 것이, 아우라고 하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다. 사람의 아들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가 이문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에게서는, 선명함이나, 한계적 주제 의식 같은 것은 있어 보였다. 이문열은 다시금 명명백백교의 전해용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이광수가 되지 못하고, 이광수의 사랑이 그것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분명 전하고 있었는데, 다만 이광수의 무정은 우리에게 사람이기보다는, 훌륭하고 명명백백한 이념으로만 비쳤던 것일까? 결국 문학은, 정치가 아니고, 꿈과 같으며, 장한몽, 몽탄, 몽유도원도, 깨몽과 같으며, 그것을 어떻게든 현실 사회와 연결지으려는 비평이 있어야 하겠으나, 그것이 다만 시도와 제스쳐에 불과하고, 설명에 설명을 다는, 꼬꼬무, 그런 것이다는 것을 또한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닌 것이다. 대상관계의 즐거움이 전부라는 것을, 또한 중국 장안의 사정을 잘 아는 우리들이 모르는 바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회가 열리고, 문학이, 작가가, 작가주의적인 근사함으로 나아가고, 그것들끼리 삼권분립을 하고, 국회에서도 연설하고, 박수를 받고, 국회의원으로 나아가, 또한 병과 같이 글을 쓰고, 그런데 그 글이 그의 젊었을 때 썼던 작품과 연계가 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엘도라도, 콜로라도, 어떻게 해야, 그런 것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이 그렇게, 예수님의 재림과, 우리들과 함께 걸으심 같은 것이다. 신화는 어렸을 때는, 새 신처럼, 기쁘고, 하늘이 높고, 영웅 같고, 새들과도 이야기하며, 숲에 열매가 많으면, 그것을 모아다가 시장에도 팔 수 있는 시장 경제 같은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 중에 소중한 것이긴 하나, 그 중에 하나 뿐인 신화인 것이, 그 사실이 명명백백하고, 분명한 것이다. 이광수가 삼일운동을 일으키고, 삼일운동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이차대전이 이광수가 일으키고, 앞으로는 일본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것. 그것들의 매개적인 사건이 명명백백교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 생각해도 무정은 아름다웠다. 무정은 인간 같지가 않았다. 무정은 그냥, 이른 아침에, 평양으로 직행하는 기차 같았다. 무정은 우리가 티비를 통해 명명백백교를 물리친 것처럼, 무정은 그것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광수와 무정에게, 명명백백교라는 메달을 수십 개 걸어주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원래 미신적이기 때문에, 문학적인 능력이란 것이 없다고, 사람들을 호도, 과자, 어떻게 하려고 했으나, 우리가 하룻나절에 한글을 모두 깨칠 수 있는 것처럼, 총명한 소년과 소녀이면, 연재와 출판은 일년 가까이 했대도, 책으로는 하룻나절에 모두 읽을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그때는 티비가 없었고, 책이 많지 않았고, 그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들은 더더욱, 마치 사진을 찍듯이 보여주는 것들은, 완전히,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티비와 소설 책이, 명명백백교의 모습과 죄질에 좀더 근접해 가고 있는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같다. 이광수에게는, 도무지 붙여지지 않으나, 지금의 우리의 티비와, 영화, 공포, 일본 공포 영화, 미국 공포 영화에는, 제법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들 국산 공포 영화도 서커스 맨이......

 

그런 가부장제 같은 질주......

 

극락의 불나비 같은.....

 

 

 

우리가 언덕에 좋은 집을 갖고 있고, 남자가 월급을 받고, 작은 소형차, 중형차, 그런 것으로 홈플러스에 다녀오고, 여자의 이름을 부르나,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는 슬퍼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바람, 바다에서부터, 향긋한 바람이 불면, 늘 다시 태어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애틀이라고 해도 그렇다. 시애틀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도시 이름 같다. 뉴욕이 고래로부터의 저주를 두루 갖고 있는 공포적인 것이면. 시애틀은, 마음만은 신형 자동차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시집 같은지. 아니면 천을 짜는 베틀 같은지. 그것을 정확하게 일러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독일의 추잠멘하이트가 알려줄 수는 있을 것이나, 그도 우리에게 다만 암시와 상징 같은 것으로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여자가 뒤늦게, 해가 아직지지 않는 언덕의, 유리의, 집에 도착하는 것이다.

 

어딘지 지쳐있고......

 

이천이십일년 오디세이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여자의 공포는, 처음에는 남자의 생명, 그것의 사랑 같은 것인데, 그 모든 우여곡절을 모두 지내고 나면, 오랫동안 섹스가 그렇게 공포의 흔적이 된다는 것이다.

 

섹스가 밤낮없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장이 났는데, 조선의 성리학이, 아는 것이 없고

스스로의 진단이 없어서,

 

어떤 주사기 핀이 붙으면, 그것이 백신인지,

아니면 혼돈을 좋아하는 자기 마음인지

구분하고, 자신할 수 있는, 우리들의 추잠멘하이트가 없는 것이다.

 

 

 

명명백백교는, 추잡하고, 정치적이며, 어딘지 복잡한 슬픔의 통신이 있지만......

이처럼 금세 다시 살아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주 오랜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

온통 명명백백교의 세상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