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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천녀유혼 일탄과 이탄의 길항관계

by 마음대로다 2013. 7. 6.

 

천녀유혼 일탄과 이탄의 길항관계

 

 

 

 

 

 

 

 

그러면 일탄과 이탄이 길항관계에 있지, 이정길 관계에 있겠나? 그리고 나는 이런 말을 참 잘한다. 내 신학대학교에 여러 성명학적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도 생존해 있지만, 정강길과 마정길이 있었다. 둘 다 총명하였다. 정강길은 화이트헤드의 책을 번역하기도 했고, 마정길은 내가 양림교회에서 목회실습차 아침기도회 시간에 설교를 했더니, 설교가 너무나 멋지고, 여러 번 해본 솜씨인 것 같다고 했다. 그것은 성경에 있는 말이다. 우리는 신학생이기 때문에, 그런 문법의 거미줄이 흔들리면 기분 좋아라한다. 하나님 나라는 문법의 거미줄이 흔들리는 어느 정도는 이미 온 것으로 있다. 그것은 성경의 번역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 이미 있다는 것. 마정길은 내 설교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성경의 룻기를 설교하였다. 사람의 감상은 눈사람 같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감상은 눈사람 같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에만 죽기 싫은 것도, 성경을 읽고 눈사람처럼 해체되는 삶이 충분히 목도되기 때문에, 정식으로 신학대학교에 다니고, 전라도 한정식 백반 같은, 신학생이 되어서 설교를 한번 해보는 것으로 원망이 들어차는 것이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여러 사람이 되었는데, 그 사람들의 설교도 함께 들어볼 수가 있었다. 여학생도 한 명이 있었다. 다들 오나전이나 중언부언이나, 가타부타나 되었다. 성결한. 나는 그것들에 극도로 짜증이 있던 터라, 나만 설교하고 나오는 것처럼 했다. 그래도 컨버세이션의 기억은 남아 있어서, 어땠냐고 물었더니, 그중에 마정길이 여러 번 해본 솜씨인 것 같다고, 그런 복잡한 문장으로 답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나의 나라가 넓어진 것을 느꼈고, 주변 사람들도 목사님의 설교를 재밌게 듣고 집에 가는 수많은 한국 사진이 되고 있었다. 계단이 있으면, 그것을 올라서게 되고, 올라서게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원형 계단을 늘 기억하는 것으로다가. 바하의 여러 숱 같은. 사람들은 그 말에 마저 마저 그러는 것 같았고, 그 사람 이름이 마정길이었다. 정강길은 함께 걸으면서, 나나 주위 사람들에게 정강 정강 그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약간 키 작은 농구선수 같은 그와는 목회실습과 같은 태초부터 있었던 듯한 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화이트헤드 철학자의 책을 번역 출판하였을 때, 그 책을 손에 들고 정강 정강 그럴 수는 있었을 것이다.

 

길항관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배움을 좋아라 했다. 반에서 성적이 좋았고, 늘 반에서 이등을 하거나, 전교 석차가 단 자리 숫자에 가끔 올라가는 처지였지만, 그것을 두고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불만스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불만은 종합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험 성적이란 그것까지 도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시험 성적은 좋으나, 실상은, 실상사, 성적이 매우 하위권을 달리면서 사회 지도층에 도달하는 맷돌의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성적이 좋게 나올 때, 영화가 아름답고, 거기까지 가는 길이 아름다우며, 친구에게 가난해도 좋은 옷이 입혀진 것 같은 렌트 오토바이의 느낌이 있었다. 친구에게 가난이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히 여자 친구에게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으로 알려지는, 향기가 나는 마음에 들었었다. 그것을 꾸준히 유지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불상사가 없었다. 여타귀도 없었다. 그것은 모두 공부에 장애가 된다. 모순이나 잘못된 인지가 있을 때는, 내가 발견해서, 혹은 동시에 발견해서 얼굴 붉혀지는 일이 없는 것이 최고이다. 독재 정권의 권력적인 하수인이 아무런 지적 없이 지내다가, 민변 소속의 변호사가 그것을 마치 정권을 비판하듯이, 정권의 개를 혼내듯이 지적하여, 처음에는 알아듣는 척 하고, 나중에는 차사고를 유도하는 것은 매우 치사한 일인 것이다. 생각의 추상 공간이 좋았고, 나만의 원사이드한 경기를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교회 친구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나만큼 공부 잘한 사람이 아주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없다시피 한 것 같다. 나는 광주에 비가 내리고 햇빛이 들어차면, 가장 먼저 옷이 빛나는 사람이었다. 공부를 못하고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논리적 인과에 있어서, 피에서 큐로, 좋은 일이겠는가? 아니면 좋지 않은 일이겠는가? 김광수나 비튜겐슈타인, 논리야 놀자의 저자는 그것까지도 좋은 일인 것으로 증명 가능한 일처럼 꾸밀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문철 셰익스피어는 에스유라이킷 혹은 메져포메져 등의 희곡 제목으로 그런 기미를 일찌감치 내비쳤다. 니 좋을 대로. 얼마나 영문학과 여대생은 그런 얼굴을 마음에 들어 했겠는가? 필요한 것이긴 하다. 그것은 큐. 그러나 피가 불문명한 것을 어째서 마음에 들어 하는지, 그것이 없는 것이 결정적인 낙제이다. 캠퍼스에 입학은 했으나, 소개팅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사람 없고, 제법 근사한 사람으로부터 헌팅을 당한 것도 아니요, 도서관에서 먼저 쪽지를 건넨 일도 없는 상태로, 도서관에 있으면 도서관 근처에서 공사를 하고, 강의실에 있으면 강의실 근처에서 같은 사람이 공사를 하고, 화장실에 있으면 늘 다섯 번에 한번 씩은 수리중이라고 하고, 다섯 번에 또 한 번씩은 중국 대학교에서처럼 휴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큐의 입장이기 보다는, 페일의 영토에 있는 셈인 것이다. 성적이 좋게 나오고, 영화를 보러가는 일이 가장 좋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영화를 싫어한다면, 성적이 평범하게 나오고, 친구와 약속한 영화를 보러가는 일이 사실은 가장 사실주의이며, 사회주의 사상의 저변이라고 할 것이다. 성적이 아주 시커멓게 나오고, 친구들과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노래를 부르듯이 몰려가서, 부수고, 소리 지르고, 주인공이 울고 웃고 하는 영화를 실컷 보는 것은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다. 아퀴나스의 말대로 짐승도 로부스트할 수 있다. 행복은 휴먼 인텔렉트. 공부를 못했더니 성적이 안 좋게 나왔다고 친구끼리 고해성사를 하고, 그래도 장래를 약속하면서 햄버거도 먹고, 콜라도 마시고, 영화를 마치 범람하는 강을 건너는 사람처럼 마음을 쓰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것이다. 나는 그래서 논리인과관계에서 늘 행복한 사람이었고, 성적이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주자학적 관점에서는 사별의 이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