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불패2에서 보이는, 평론가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는 지금 조건의 그 시절의 비젼
라면라이더 여러 불굴의 히트곡 중에 레볼루션이라고 있다. 듣고 있으면 힘이 난다. 문제는 힘이 나게 되는 예술이 있느냐 많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도 대단히 중요해서 조금도 무시할 수 없는데, 그 힘을 얻고 무엇을 하겠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딱히 특별한 것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 코스모폴리탄티즘은 지금껏 내가 완벽하게 정리했고, 나머지의 일들은 무의식을 꾸준히 의식화시켜서, 자기 일에 장인이 되며, 훌륭한 선인이 되는 것일 것이다. 일본은 망언을 일삼고, 그들끼리 생각과 대화를 추진한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인내와 참을성과 용기가 미치지 못하면, 사람이 망언 자체가 되는 것임을 보편적인 세계시민들이 과연 모르겠는가? 망언을 일삼을 때,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있음이고, 선악은 반드시 기억의 편린을 갖는다고, 망언이라는 것도 분명 사케에다 먹던 마른 오징어 안주가 되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가면라면라이더는 그것의 간극을 가로지른다. 그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면라이더는 문제의 종국에 우리나라가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이차대전의 후유증으로서, 남모르게 미국을 두려워하는 것이 강하겠는가? 중국이라는 대국에 비해 그들이 섬국이고 소국이라는 것이 콤플렉스가 되겠는가? 늘 망언이 없고, 선명한 일취월장으로, 날마다 월출산으로 내장산으로 곡식을 쟁이는 듯한 한국이 두렵겠는가? 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할 과정이다. 과정은 슈퍼소닉과 같아서, 소닉붐, 비행기가 마하에 진입할 때 나는 소리이지만, 물체가 물리적 공간 안에서 소리를 입고만 있다면, 영화라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슈퍼소닉(超絶內者)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나라에만 애국이 금지되어 있을 뿐, 대국인 중국이나 섬국인 일본은 애국이 어느 정도까지는 장려되기 때문에, 그들의 통신을 우리가 기어코 듣고는 가타부타 첨언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불굴의 가면라이더의 히트곡 모음집 같은 격물치지의 모습은, 수준 이상의 이웃나라가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친교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듯 해서 분명 기쁨이 배가가 되는 것일 것이다.
어째서 평론가를 한 명으로 국한시켜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슈퍼컴퓨터는 계산한 것일까? 계사전.
그리고 그것은 폴리탄들의 중지를 얻었다. 마치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때의 기분과 흡사하다. 폴리탄들은 모든 되고 안되고의 하나님의 희생양들이다. 되고 안되고 하는 것을 알 필요 없이, 사람이 하나의 학문을 알아서, 캠퍼스에서 수많은 계절들을 보내고, 훌륭한 논문을 발표하고, 친구가 찾아온 것을 반기고, 이순신 장군처럼 죽은 것을 사람들이 한 몇 시간 모르다가 발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이해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그것일 것이다. 우리는 이해를 하지 않고서도, 오래도록 공부할 수 있고, 학위를 인정받아,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첨단에서 활약할 수 있다.
영문학은 발음과 증오의 동네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사냥하는 장총이나, 사로잡는 올가미나, 들어 올리는 그물들을 자랑할 뿐이다. 내가 만난 모든 국내의 영문학자들 중에, 영국이나 미국의 영문학자들은 제외하기로 하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는가? 사람들은 영문학의 무주성이 좋은 지도 모른다. 무주구천동. 그런데, 어째서, 무슨 이유 때문에, 영문학에는 학제가 있고, 디콘이 있고, 옥시모론이 있고, 옵티무스가 있는가? 그러니까 그것의 좌표를 정확하게 보면, 매우 기이한 우주, 거대하게 뒤틀려진 실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출판의 저변은 막대하고, 이해가 아닌 요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 같은 위악성은 영화의 음악에 늘 새 술은 새 부대에 하고 있다. 국문학은 발음과 증오의 동네인가? 국문학이, 북조선, 어감과 삽입의 자유에 입각해서, 만만하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발음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고, 복잡한 단어가 없음에 있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이해를 요구하고, 절차나, 차별이나, 콩알 앞에서 범우주적인 누미노제를 겪게끔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주술목구조가 아니라, 주목술구조에다가, 번다한 조사나 어미가 아예 권력의 장치로서의 문장을 철저하게 무두질해서일 것이다. 그것이 근사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다. 용기는 짐승도 가질 수 있으나, 이해는 사람이 천사를 보는 통로라고 말이다. 책에 독을 발라서, 책을 두렵게 하는 방식이란 거의 모든 사물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치약에는. 새로 산 옷에는. 가오싱젠. 새로 산 차는. 그것은 모든 것의 정점이긴 해도. 새로 들른 거리에는. 처음 가본 도시는. 처음 만난 여자는. 신비로운 여자를 퐁네프 다리 비슷한 운치 있는 곳에서 만났는데, 집에 왔더니 배가 아프고 새벽까지 끙끙 앓았다면, 사랑의 열병이라고 하겠는가? 아니면 여자가 차에다 독을 탔는가? 하겠는가. 그와 같은 세계는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완벽한 권력의 주구, 보조, 돌보는 사람이 아니면 집 바깥으로는 일 미터도 갈 수 없다. 국문학은, 국문학의 영토는, 마이너리그적인 측면에서 연대하고 있다. 국내여행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천성이 다부지고, 지혜로우며, 의식적으로는 전사가 틀림없다. 물론 수준 아래로 자유형 팔을 뻗어 들어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 주구들이 바라는 대로, 홍상수의 불쌍한 채널, 철저히 마이너리그의 세상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국문학은 궁국적으로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투사들에게, 진리와 풍요를 약속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너무 이상한 것들을 많이 먹어서, 배가 수박처럼 불러와서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잠도 잘 오지 않으며, 기진하여 빨리 죽는 것 밖에, 그것도 영화랍시고, 가죽은커녕 이름조차 남는 것이 없는 것일 수 있다.
가면라이더의 여러 히트곡은 참 輝트곡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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