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모든 기호의 끝
끄트머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네 꼬마 녀석들. 우리가 여자 한 사람을 알아서, 캠코더를 갖고 세상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김치. 어떤 한계의 직시일 것이다. 맛이 없으면, 마쓰이, 그런 것은 하기가 싫은 것이 아니겠는가? 맛이 없어도, 삼백 이하여도 마쎄이를 행한다고 한다면 그는 전위예술가이지, 아방가르드, 반대로 성숙한 가르드, 참 예술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말(馬)이 예술가이지, 오토바이를 탄 사람은 결코 전위예술가가 아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는 맨 처음 전위예술가로 나온다. 그것의 스쿠터 엔진음과 그렇게도 잘 어울릴 수가 없다. 그리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앉아서 하는 말도 약간은, 독일 낭만 계열의 전위예술가적인 독백이다. 우리에게 그런 것이 없느냐, 도중에 갑자기 타임 외치면서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행하고, 도저히 사구체 논쟁이 아닌 것은 출판을 하지 못했던 엄혹한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류의 말은 발설될 수가 없었다. 가난에도 스타일이 있다고, 한이 맺혀 있거나, 공즉시색 색즉시공, 반야바라밀다시 하는 말을 동원하지 않고, 눈앞의 정경을 향해 독백하는 케이스는 여간 해서는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석규의 냉택 없는 독백은 사람들의 심금을 파고들었다. 니체라고 하기에는 릴케에 가까웠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느 시인이 자기 시에다가 그 인명을 적었던, 이름이 시의 단어 같았던. 시는 무엇이 어려운 것일까? 흉내내기가 어려운 것일까? 진심지도. 그러니까 진심에서 사골 국물 끓여지듯이 우러나오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모든 예술이 처음에는 초점이 맞지 않아서 흉내내기인 것 같고, 동시에 가게에서 손님이 찾는 물건을 정확하게 찾기 위해서 삼십 분 넘게 창고를 뒤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진심지도, 그렇다고 더 비싸게 받는 것도 아닌 인지상정, 심심상흔, 그런 것들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보면 다 예술이 되는 것인가? 얘야. 흉내 좀 내 보거라. 어느 배우를 흉내 내고. 얘야. 심부름 좀 다녀 오거라. 가게까지 앞구르기로 아이스크림을 사러가고, 올 때는 녹을지 모르니 그냥 오는. 유도리. 그런 생각의 에어쉘들이 예술이 금방 되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 독설과 독거미, 스콜피온을 날리면 죄다 그렇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독거미에 쏘이는 것을 좋아한 것이, 그런 타입의 과자를 여간 해서는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새 과자만 나와도, 너무 비싸지 않게, 도시의 전력은 급격하게 상승이 된다. 오타쿠들에게는 찬양이 되고, 애호가들은 무의식적으로 경제적인 관계를 이어간다. 에이스. 버터링. 에이스. 버터링. 다른 것들은 생각나지 않아서. 에이스를 커피와 함께 먹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거기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전문 예술가들이 도시를 살아갈 때,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무슨 말이냐면, 예술가가, 예를 들면 연주자가 세종문화회관에서 멋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한 경우, 그것이 끝났을 때, 떠오르는 것은 도시의 비전이기보다는, 치즈 맛이 좀 더 가미된 새로 출시된 에이스와 커피 한 잔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에이스를 사는 것과 무슨 차이이겠는가? 다르다고 하면, 감각의 돈이 생긴 셈이고, 돈이 있다고 모든 상품이 소비의 복잡한 회로에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것을 사러 가야겠다는 피엑스 사병의 상면의 시간이 다음일 뿐인 것이다. 그것이 거의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대게의 경우, 소설가들은 소설을 쓰면, 여자들을 꼬셔서, 머리카락 몇 개를 자연스레 얻어서, 그것을 라이터로 꼬시는 것을 플레이보이 칼렌다스로 안다. 너무 히도이한 말이겠지만. 그러나 나와 같은 케이스의 소설가들은, 공부를 하듯이 글을 쓰고, 책을 읽었으니까 나도 글을 쓰며, 선생이 과제를 내지 않아도 종묘에 정성으로 과제를 제출하는 것으로 있는 존재를 일관한다. 도시에 모퉁이가 생긴 것이 기쁘고, 사람들이 그리로 돌아다닐 것이 기쁜 것이다. 전자도 예술가이다. 그러나 후자가 참 크래커가 아니겠는가? 에이스. 나도 커피에다 먹기 좋아하니까.
예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열리는 문이면, 도리어 민주주의도 확립되었을 것이다. 예술은 아이가 성숙해가는 플라타너스나 단풍의 회화 풍경 같아서, 결국은 그것이 없으면 학교도, 예술도, 교회도, 경찰도 무의미하다는 각성에 총결산되고 만다. 남자여자 예술혼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너무 말해서 이제는 뜻을 상실할 것 같은데, 민주주의 확립 운동의 동기이자 에너지가 된다. 성적 대상은 인지 능력에 있어서, 성숙지도의 극치이다. 그것에 기어코 프로이트의 형이상학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좋다. 거기다가 서로 복상사를 당해도 경찰이 간여할 수 없는 뒤주나 법궤를 지나, 우리 이렇게만 에너지를 낭비할 것이 아니라, 근사한 영화라도 찍어보자 하는 것은, 비중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계약처럼 대단히 훌륭하고 광막하기까지 한 것이다. 모든 영화는 바로 어제 본 영화에 대한 오마쥬이다는 말이 그래서 발생하는 것이다. 스스로 알파는 시작할 수 있지만, 오메가는 전라도 오메 단풍들겄네 숲이 아름다운 내장산이나 群山 가문으로나 봉착한다는 것. 그림자놀이를 많이 보면, 나중에 철학적 존재론이라도 잘하는 학자가 되지 않겠는가? 그림자놀이를 많이 보면, 그림자놀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선한 것일 것이다. 모든 예술의 형식은 순수를 배신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와, 하나님과 같은 다른 지역의 예술가를 만나, 낙원 추방당하는 것을 또 하나의 플레이보이 칼렌다스로 안다. 그렇게 미시적으로 결찰된 예술가들은 오메가 깊은 곳에까지 기고만장한 노동자들의 여리고 성의 포위 공격같이 곤란한 것이 없다. 처음에는 그 존재론적 그림자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윗을 드러내고, 스스로 입는 검정색과 흰 옷이 될 줄 알았는데, 심은하도 만날 줄 알았는데, 이차저차, 여차저차해서, 이차는 한석규가 탔던 슈퍼리드, 여차는 양정아와 심은하가 탔던 티코, 마침내 예술가에 대한 삶은 포기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예 부도덕적으로 예술의 첫 삽을 뜨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그것은 영화로 만들 수가 없고, (이미 일본에서는 많이 만들어 왔다......)
이렇듯 예술은, 팔월 영화의 거대한 예가 증명하듯이, 흥분의 미지적 연속에서는 신체적 기호와 궤를 같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보면, 이와 같은 언명은, 인다이트먼트, 얼마나 고구마줄기처럼 하이든의 뇌까지 관통하는 것이 되겠는가? 그렇다고 놀부가 선인이겠는가? 어째서 놀부가 선인이겠는가? 흥분이 진리인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의 운명이 초라한 것이, 반대급부로다가 놀부를 선인으로 만드는 실험적 착상의 스토리나 생산시킬 뿐인 것이다. 흥분의 기호적 연속이 논리를 갈급할 때, 우리는 그것을 옛날부터 알았던 것처럼 소화가 잘되는 것을 안다. 그것에는 법률적인 선후는 있으나, 의미의 선후가 있지 않다. 대게의 경우, 법률이 그래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의미는 보이지 않는 허들이고, 어느 쪽에서 넘는지 모르며, 사람들이 건너면서 넘어지거나, 공교롭게도 사타구니에 끼이는 것이다.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르황...... 심은하가 예술을 하고 싶어서 한석규에게 접근하였으나, 자기의 것이 없으면 도저히 생기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알고 있고, 그러나 맥락을 찾을 수 없고, 전개와 기승전결을 꿈꿀 수가 없어서 그냥 필름을 맞기고 가게 문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연비가 대단히 높다. 말이 의외다 싶겠지만. 무기적으로 보면 가공할 만 하나, 교육내적으로 보면 우리 사는 현실도 아니고, 예술이나 그것의 내적 연결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삼자가 만나서 영화를 보면, 그들 모두 가치 있게 기억하는 것으로 도장을 찍어줄 수 있다. 하나는 현실을 보고 싶은 욕망. 어떤 철학적 현상학파의 측면에서. 그것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것이며, 우리는 부끄럽게도 월드컵의 정상에 선 것이다 할 수 있다. 어째서 부끄러운가?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여자 한 명을 알아서 세상에 출사하러 나간 작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예술을 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예술이 늘, 한국적 조건에서는 이런저런 카테고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영화는 살인자에 취해 있다. 예술은 그와 같은 면에서는 얼마나 행정구역이 다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쌀쌀맞게 굴면, 마침내 살인자에 취해 있는 영화에 입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문불출. 뉴스도 자주 보지 아니하고, 오늘도 내일도 새로운 스타일을 강구모색하는 사람이라면, 가끔 절친을 만나 커피를 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8월의 크리스마스는 우리식의 야수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수파를 제대로 해낸 사람이, 늘 있었을 것 같은데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유명한 황소 그림은, 예술사적으로 보면 성난 채식의 야수파 같다. 그것은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 연비에 관심이 비상한 사람이면, p, f를 o 발음에서 어떻게든 r로 만드는 남의 영원한 지배의 힘을 영화가 갖고 있음에 놀랄 것이다. 그것은 거의 논어의 공야장에 육박하는 것으로서, 어느 나라 뱀이고 자시고가 없다. 대신에 원죄와 같은 원동력은, 아주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기억에 많이 남는다. 기억으로만 따지면 대지는 아프리카만 하다. 이런 식으로 부적절하게 뱀을 알았다고, 낙원상가를 없애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생각밖에 가질 만한 것이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모든 이와 같은 경우의 수를 알고 있는데도, 그것의 자의식, 무조건적으로 끝까지 간 듯한 또 하나의 아이언마스크일 수 있다. 같은 아이언마스크를 만나 반갑다고 서로 가볍게 헤딩하는 세리모니만이 구원이 될 수 있는......
패션 헬멧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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