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어떻게 쓰리쿠션을 치는 나라가 된 것일까?
나의 소설이 있기 전까지는, 이순신 장군은 살아서, 일본에 원자폭탄 두 개를 날린 포켓볼이 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포켓볼은, 상상을 초월하고, 사람들을 데카르트의 왁스로 만들고, 혹은 우리나라 가수 왁스로 만든다.
그러나 나의 이런저런 소설로 인해, 원자폭탄은 모헨조다로나, 페르세폴리스로 갔고, 반인반수, 한인수는 아니고, 사람들은, 소년들은, 왁스보다도 모를 수 있다. 사람들의 생각은 열라뽕따이, 킹콩과 고질라의 대결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아무도, 조원선, 윤상, 그런 대학가에서는, 이대의 대학가가 그렇다는데, 지금, 차라리 이순신 장군이 살아서, 일본에 원자폭탄 두 개를 날린, 그런 포켓볼의 한 경기, 그와 같은 포켓이 되는 것이 때로는 생각의 변칙적인 연장을 가져오는, 그런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둘 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접근하기가 어려운 숫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조금 낮고, 그것이 조금 많고, 그들끼리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관점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불교와 기독교 중에 무엇을 택하겠는가 하면, 다시 태어나도 나는 기독교를 택하고, 불교를 사랑하는 것으로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젊은 날의 햇빛, 거리, 사람들의 흰 옷, 아주 가끔 있었던 우체국 택배를 생각할 때, 우리가 보내기도 했던, 그와 같은 뼈에 상응하는 것은 기독교였기 때문이었다. 불교는 아이고 108이라는 키보드가 사랑받는 것처럼, 그런 것에 가깝다. 기독교는 키보드가 없는 것이고, 아예, 거기서 기독교가 되지 못하고, 바로 이단이 되는 사람들의 급한 성정을 닮았다. 학생운동은 무엇이었을까? 맑시즘이었을까? 아니면, 근대철학이었을까? 아니면 독립운동의 잔존세력이었을까? 윤동주. 마광수. 이청준. 내가 이렇게 숫자를 갑자기 윤석열하는 것을, 사람들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것은 타자의 스윙을 이끌어내는, 무적의 공식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학생운동은 기독교였을까? 그것의 나중 멤버가, 나중 발견 멤버일 것인데, 멤브레인, 세계 불교의 총본산 화엄사의 불교일 것이다. 지리는. 아니면 구원이 없는.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조롱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보는 그 깊은 바다 앞에서, 어떤 사물, 물자체, 풍경, 풍경소리, 약간은 무서움을 갖는 법이다. 윤석열도 어찌 보면, 화엄사의 다른 계보의 사람으로서, 태백산맥의 동물 같은 핏줄로서, 이번 미국 방문을 하였던 것일 수 있다. 아직 안 왔나 싶다. 미국에 있나 싶다. 우리는 드디어, 나의 글에서, 국제 외교 사실 하나가 반갑게, 살갑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을, 대한통운, 오네, 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김춘수의 꽃이 아닌 것이다. 학생운동은 기독교가 된다. 그리고 연개소문과 아들들처럼, 사라진다.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광명시 같다. 내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항상 내 안에서 들려왔더 소리가 그렀더랬다. 그랬었드랬다. 여기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그것은 독단이고, 철학적 독단이다. 내가 어렸을 때, 국토지리 배우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사진들이 너무 좋았고, 남해대교, 사람들이 특산물을 생산하고, 공장들을 가지고 있고, 이런저런 특별한 기차 노선을 갖고 있다 해서이다.
그런데 어째서, 예레미야 애가처럼, 학생운동은 특산물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지, 원통하고,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마치 보부상처럼, 영광의 굴비처럼 담겨 있다. 그러니까 완전한 무가 될 수 없고, 그것이 그만 굴비처럼, 적어도, 짧은 순간, 예술적인 시공간 안에서, 데카르트의 연장, 혹은 우리들의 최진행이 되는 것이다. 이득렬도 마찬가지이다. 김동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연속하지 못한다. 그렇게 서서갈비처럼,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다. 어떠한 대림 메시지도 없다.
*
학생운동이 정명석을 중심으로 이단 놀이를 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수 있다. 신천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꼼짝없이, 그 안에서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이 독이고, 그것이 함정인 줄을, 같은 낮은 등급의 존재들은, 도무지 감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꼬드기는 무수한 세력이 있다. 그것은 모두 포켓볼 몬스터처럼, 자유정신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리고 공부는,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지능이, 조건이, 환경이, 여자가, 아무튼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내리막길의 좌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가, 문학이, 축제가, 여행이, 티비 프로그램들이, 거의 단 하나의 존재를 물어 잡고, 쓰리 쿠션에 자기들이 속해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대롱대롱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그와 같은 마지막 정신까지 짜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그렇게 애를 쓰고 있다.
문재인도 그렇고, 윤석렬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저런 세계 정치인들도 그렇다. 그것의 영광 굴비의, 그 마지막 형상의, 어게인스트 그레인, 어느 미국 평론가의 책 이름인데, 그렇다고 보면, 그렇게 사탄의 축제, 모임, 잔치, 먹자 골목, 그런 것인데, 영향에의 불안, 그렇다고 보면, 그 무수한 가로 획과, 세로획 사이에서는, 같은 젊어서의 유자광, 학생 운동들의 장자, 노자들의 회합일 수 있는 것이다. 해파리를 볼 때, 그렇게 눈물이 나는 것처럼, 피아졸라의 씨네마 천국, 보르헤스, 모리꼬네, 강아지 이름 같은 보리꼬리, 드디어 하늘 높아진 지옥의 피라미드 덕분에, 우리는 슬픈 마음의 해파리가 그나마 정식으로 팔다리를 갖고, 나이도 먹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보기관들 때문에, 서로 웃고, 떠들고 하는 장관을, 문화부 경제, 외교부, 재정, 군사, 그런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퀴즈쇼 같은 마태복음은, 사람들에게 그처럼 큰 충격을 주었는데, 왕과 왕비에게 평화로운 괴롭힘과 잔잔한 날씨의 충격을 주던 정신의 그루 같은 것이, 팔다리가 멀쩡하고, 십자가에 달릴 때, 처음으로 고통받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항상 고문을 받고, 성에서 쫓겨나, 죽지 않고 있다가, 자기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는데, 외국인이고, 처음 보고, 젊고, 청년이고, 말도 잘 타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고, 경제 사정을 잘 알고, 외국 문화를 사랑한다고 하니, 가이사르의 것은 가이사르에게로, 자기와 아무런 차별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 학생운동이 그랬다. 낮에는 그렇게 반미 투쟁을 하다가, 저녁에는 좋은 미국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지금 미국 영화가 그렇게 공포 그대로를 옮기는 일을 하는 것은, 그래도 되는 것은, 반미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반미 투쟁을 그렇게 하니, 그것을 능가하는 정신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는 그나마 여유가 많았고, 팔다리도, 모두들 예수님처럼 멀쩡했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거울과, 자기들의 영화, 자기들의 예언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김범수의 하루 같은 남의 떡을 보게 되는 것이다.
다윗 종파의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집단 자살했던 것이 그렇게 슬펐다. 그것은 모파상의 목걸이 같기도 하고, 도쿄 대공습 같기도 하고,
무등산의 서석대 같기도 했다.
그러니 숫자가 너무 많아지면, 우리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팔다리가 멀쩡한 상태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티비에 달리는 것으로, 미국 의회 연설, 그렇게 나와,
같은 구조주의적 반칙왕 같은 학생운동의 남자를 그렇게 반기는 것은
어쩌면 단테의 성스러운 코미디 같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학생운동은 없을 수 없지 않은가?
그냥 육체와
졸업생 배출......
우리나라 교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대 교수
*
우리는, 만일 내가 없으면, 일종의 정이 로봇처럼, 쓰리 쿠션의 권력을 언제든지 미국으로 넘겨줄 수가 있다.
그 충격적인
미국 사람들이, 이제는 영원한 스파이더맨들이 되어서, 그나마 신문사가 있는, 항상 한국의 이단들을 좋아하는 것은, 이단이 또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조금은 신체적이고, 플라잉 소서 같은, 영양학적인 문제 때문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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